소설리스트

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40)화 (40/218)

40화

오기를 갖고 황태자궁으로 걸음할 때마다 카밀의 마음 깊은 곳은 비참함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던 중 드디어 오늘 뭔가를 만났다.

작고, 보드랍고,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아기 새.

클레멘츠의 유모이자 집사장마저 그 아기 새를 시중들고 있었다.

‘이게 무슨 뜻이지?’

좀처럼 보여 주지 않는 그의 속내가 남다르다곤 생각해 왔지만, 드디어 미치기까지 한 걸까?

아름다운 사내는 미친 모습마저 독보적일 것이다. 그 광기의 대상이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이라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없애 버릴 것이다.

아니면, 드디어 자신을 떼어 놓겠다는 선언인가?

제게 아무 애정도 없으면서, 가장 유력한 황태자비 후보로 거론되도록 내버려 두는 이유를 카밀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에게 성가시게 달려드는 불나방들을 잡아채 삼키는 거미. 날파리들을 차단하는 촘촘한 거미집. 그것이 그녀의 쓸모였다.

처음 거기에 생각이 미쳤을 때는 차라리 죽어 버리고자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기꺼이 스스로 이용당했다. 그의 곁은 아니더라도, 그 어떤 여자보다도 가까운 위치를 허락받는다. 어차피 누구도 그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그보다 유혹적인 자리는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 병아리 따위로 자신을 쫓아내겠다니! 아마도 숨겨진 다른 여자를 지키기 위해서일 터였다.

뭐가 됐든 저 작고 노란 새에게 돌아가는 건 증오와 살의였다.

어떻게 죽일까. 충분히 잔인하면서, 이쪽으로는 비난이나 부담이 돌아오지 않는 방향으로.

즉시 몇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냉랭한 시선을 아래로 내리는데, 까맣고 맑은 눈과 마주쳤다.

왠지 병아리가 떨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그녀의 살심을 읽은 것처럼.

‘그럴 리 없지. 마음 약해지지 말자.’

그런데, 그 병아리가 느닷없이 발랑 드러누웠다.

‘……왜 저래?’

죽여 없애려던 것과 별개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지켜보게 되었다.

쓸데없이 이리저리 굴러 대는 품이 요망했다. 설마 제게 잘 보이려고 저러나 싶어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보드랍고 뜨뜻한 느낌이 자신도 모르게 뱃속에 차올랐다.

‘으, 뭐야.’

몸서리를 치면서도 시선은 계속 노란 솜뭉치를 보고 있었다.

“뺘아.”

“…….”

샛노란 몸체가 작게 부풀어 올랐다 소르르 가라앉길 반복했다. 그 모습이 제법…… 말랑말랑해 보였다. 만지면 부드러울 것 같았다. 카밀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이게 아니지.’

꼭 그 작은 새에게 휘말린 듯했다. 그녀는 곧 중부 귀족파의 우아한 후계자이자 사교계의 고고한 백조의 모습을 되찾았다.

내버려 둬도 상관없을 것이다. 저것은 한심할 만큼 약하고 작은 새일 뿐, 정교한 거미줄을 다루는 거미가 아니었다. 위협이 되는 존재가 아니니 죽일 필요도 없었다.

카밀은 스스로도 모르게 병아리를 향한 살의를 거둬 버린 것과, 지금껏 가차 없이 밟아 없앤 여자들도 별로 위협적이진 않았단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잠자리에 누워서까지 생각은 이어졌다. 아무래도 후회되었다.

만져 볼걸.

그깟 조그만 새 하나 잠깐 쓰다듬는다고 품위가 떨어지진 않을 텐데. 정말 부드럽고 따스했을 텐데.

‘아냐. 지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내일까지도 황태자의 여자를 찾지 못하면 정말 곤란했다. 작전을 바꿔야 하나? 설마 하니 그가 정말 서부의 영애를 방 안에 꼭꼭 숨겨 두고 못 나오게 하는 건가? 어쨌건 그 병아리는 솜털이 정말 풍성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카밀은 흠칫대며 돌아누웠다. 피곤해서 그런지 별 상념이 다 들었다.

* * *

이튿날. 카밀은 평소와 다름없이 황태자궁의 정원에 자리를 잡았다. 녹색 공단 장갑을 낀 손으로 오페라글라스를 받치고 익숙한 듯 주변을 살폈다.

“오늘은 꼭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아가씨.”

“맞아요. 아주 가루를 내 버리자고요!”

고운 입에 미소가 걸렸다.

“찾았다.”

“앗? 예? 벌써요? 정말요?”

“말이 씨가 된다더니! 역시 아가씨는 굉장하십니다!”

어떤 일이건 아가씨의 덕으로 올려 치는 데 익숙한 시녀들이었다. 그들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카밀을 따라갔다. 길 끝에서 마주친 건 어제 봤던 그 병아리였다.

“…….”

“저, 아가씨. 찾으셨다는 것이…….”

“또 만나네.”

“삐약……!”

어제와 달리 병아리 옆엔 푸석한 긴 머리의 메이드 하나뿐이었다.

“오, 오필리어 님 걱정 마세요. 제가 꼭 지켜 드릴게요!”

시녀들은 메이드를 노려보았다. 얼굴이 파래진 채 주먹만큼은 꼭 쥔 꼴이 어이없었다. 아무렴 우리 아가씨께서 저 따위 미물을 해칠 마음을 먹는단 말인가?

메이드 카렌이 잔디가 깔린 땅바닥으로 손을 내밀었다. 오필리어 님을 신속하게 대피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병아리는 종종거리며 다가와 그 손바닥에 뺨을 부볐다.

“……!!”

새파랗던 카렌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안심하라는 의도인데 잘 알아들었으려나.’

오필리어는 그 얼굴을 올려다보다 돌아섰다. 어제도 애교로 위기를 모면했으니 두 번이라고 안 될 이유가 없었다.

“크흠. 흠.”

카밀은 헛기침을 하며 몸을 낮췄다. 그리고 자신도 손을 내밀었다.

“……?”

믿을 수 없다는 아랫것들의 눈빛쯤은 후작 영애의 고고하고 견고한 자의식이 튕겨내 버렸다. 이윽고 기대하던 촉감이 그녀의 손바닥에 닿았다.

“아.”

저 메이드에게 했듯이 내게도 아양을 떨어 보란 뜻이었다. 그런데 이 겁 없는 병아리가 아예 그녀의 손에 올라와 있었다.

눈으로 봤을 때도 그랬지만, 직접 손 위에 올려 보니 훨씬 따뜻하고 말랑거렸다. 조금만 손가락을 움직여도 보송한 털이 눌리는 게 눈에 보였다. 양손으로 받아 손을 모으면, 옴폭 들어간 부분에 넘칠 듯 말 듯 쏙 들어왔다.

“으흠.”

카밀은 흡족해졌다. 곧 병아리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본인은 ‘곧 내려놨다’라고 생각했지만, 옆에서 본 이들이 느끼기엔 퍽 오래도 그러고 있었다.

돌아서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장갑 벗고 만져 볼걸…….’

하지만 아쉬울 건 없었다. 앞으로도 계속, 계속 황태자궁의 이 정원에 발걸음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 * *

다행히도 귀여운 척은 생각보다 잘 통한다.

카밀은 분명 처음엔 나의 필살 애교에도 냉정해 보였다. 하지만 다음 날, 그다음 날 마주쳤을 때는 점차 반응을 보였다.

사흘 전엔 무표정하던 얼굴에 미소 비슷한 게 보였다. 그제는 그동안 당혹스러워하던 카밀의 시녀들까지도 풀밭의 강아지풀을 꺾어 나와 놀아 주려고 노력했다.

분명 클레멘츠가 숨겨 둔 소문의 내연녀……를 찾으러 왔을 텐데. 넓디넓은 정원에서 굳이 왜 나와 자꾸 마주치는 건지는 모르겠다. 나를 일부러 찾아다니는 것도 아닐 테고.

어쨌든 살기 위해서이므로 최선을 다했다. 어제는 멀찍이서 카밀이 다가오기에 먼저 다가가 뇌물을 바치기까지 했다. 마침 옆에 보이는 키 작은 흰 민들레를 부리로 꺾어다가 내밀었다.

‘뺙삑!(수도 최고 미녀이신 카밀 님!) 삐익 뺘삐!(받아 주십쇼. 제 정성입니다!)’

다행히도 카밀은 잠시 우뚝 서 있다가 꽃을 받아 들었다. 다행이었다. 최악의 경우 ‘뭐야, 이 더러운 건! 저리 치워!’라고 하며 던져 버릴 줄 알았는데.

대신 그녀는 이렇게 얘기했다.

“허! 어처구니가 없군. 이까짓 들꽃이라니. 하! 나참. 이런 보잘것없는 걸 감히 나에게 선물이랍시고 건넨 건가? 흥. 과연 근본도 모르는 날짐승다워. 최고급 품종의 꽃들만 보는 내가 이런 걸 기뻐할 줄 알아? 흥!”

그렇지만 줄기도 짧게 잘린 민들레를 짓눌리지 않도록 소중히 들고 있었다.

츤데레인가?

뭐가 됐든 어때. 순조롭게 목숨을 보전하고 있으니 된 것이다. 나는 카밀의 주변을 방방 뛰며 돌아다녔다. 뇌물 만세!

“오필리어.”

이제 보니 클레멘츠의 집무실 창문에선 나와 카밀이 자주 마주치던 그 자리가 내려다보였다. 이야, 전경이 좋구만. 눈만 돌리면 이런 경치가 보이니 업무 중 스트레스도 바로 풀리고. 아주 그냥 능률이 끝내줄 것 같다.

“오필리어, 어딜 그리 보고 있지? 나를 봐야 할 것 아니냐.”

딱히 능률이 막 오르진 않은 모양이다. 난 마지못해 클레멘츠를 돌아보았다.

알 바냐? 일해라.

……라고 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알아듣는 것 같으니 대충 돌려 말했다.

“삑삐릭.(뭘 보고 계신 거죠?) 삐뺘악.(일을 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

“…….”

그는 아예 펜과 문서를 내려놓고 나를 들어 올렸다.

“요사이 매일같이 정원을 산책한다지? 그렇게 바깥이 좋으냐. 여기서마저 창문만 내다보고 있을 만큼.”

아침엔 서류를 검토하는 클레멘츠의 옆에서 노닥거린다. 그가 다음 일정을 위해 이동하면 메이드들과 정원에서 논다.

요즘은 거기서 카밀을 만나 생존 전략적으로 행동하는 것까지 일과가 되어 있었다. 방금도 오늘은 그녀에게 어떤 식으로 알랑거릴지 궁리하는 중이었다.

“카밀 드 베일리스가 매일같이 널 괴롭히더구나.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가엾은 것. 얼굴이 반쪽이 되었구나.”

그럴 리가 있습니까? 오늘 아침 유렌이 보여 준 거울 속에서도 제 얼굴은 변함없이 노랗고 동그랬다고요.

하지만 안타깝게 날 보는 클레멘츠는 진심이 가득해 보였다.

“그러니 말이다, 오필리어.”

“삑?”

“오늘은 나와 함께 나가자꾸나.”

“삐익?”

“어중이떠중이들에게 치이는 정원 말고, 인적이 드물고 평화로운 후원으로 데려가마.”

그간 클레멘츠가 병아리에 과몰입하긴 했지만, 야외 활동에까지 끌어들이는 건 처음이었다.

황태자궁에는 정원이 둘 있었다.

하나는 정문을 통해 들어오면 마주치는 커다란 곳. 황태자의 권위와 명성에 맞도록 온갖 솜씨를 부려 꾸몄다. 클레멘츠를 찾아오는 사람이라면 필수적으로 거치는 만큼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많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