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39)화 (39/218)

39화

황태자궁 사용인들의 요즘 관심사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황태자 전하께서 돌아오신 뒤 두 배는 집요해진 베일리스 영애였다.

오늘은 차를 가져다준 어느 메이드에게 난동을 부리셨다더라. 어제는 영애의 시녀가 복도를 기웃거리려 하기에 쫓아내느라 애를 먹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전하께서 그녀를 저 정도까지 냉대하는 게 처음 있는 일이란 것쯤은 사용인들도 알았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정원 한편에 자리를 잡은 후작 영애였다. 그들은 공포와 호기심을 감추고 그녀를 슬슬 피해 다녔다.

둘째는 단연 전하의 병아리였다. 많은 사용인들은 어디선가 물끄러미 이쪽을 보고 있는 병아리와 눈이 마주친 적이 있었다. 복도를 지나다가, 창문을 닦다가, 당이 떨어져 주머니에서 과자를 꺼내다가. 마지막의 경우엔 대부분 이해할 수 없는 압력을 느껴 병아리에게 한 입씩 나눠 주곤 했다.

전하의 병아리 이름은 오필리어였다. 대우를 황족에 준하라는 명령에 맞춰, 입 밖에 낼 때는 공손히 ‘오필리어 님’이라고 불렀다. 지나다닐 때 혹시 발밑에 계시지 않은지 신경 써야 했고, 간혹 못 열고 계시는 문을 열어 드려야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꽤 즐거웠다. 뽈뽈 돌아다니는 귀여운 아기 새는 분명 황태자궁 구석구석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더러는 오필리어 님이 사실은 어느 은둔 귀족 가문의 사랑스러운 아가씨라고 말했다. 황태자궁 바깥에서 돌고 있는 소문과도 어느 정도 유사했다. 인간으로 돌아간 모습을 아는 건 가까이서 모시는 메이드들과 집사장 글로리나 부인뿐이라는 은밀한 속삭임이 퍼져 나갔다.

하지만 외부에서 질문이 들어오면, 사용인들은 해당 주제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황궁의 담벼락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무조건적인 함구령. 처음 일을 시작할 때, 그것을 지키겠다는 담보로 스스로의 목숨을 거는 마법 계약을 작성하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대강 평화로운 하루가 지나가는군.’

정원에서 일하는 존은 잡초를 뽑다가 잠시 허리를 폈다. 혹여나 오필리어 님과 마주칠까 싶어 넣어 둔 빵이 주머니에서 움직였다. 순간, 그의 몸이 굳었다. 멀찍한 곳에서 이변이 생겼다.

황태자궁 사용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관심사.

절대 마주쳐서는 안 되는 이 궁의 걸어 다니는 재앙과 활력소가, 그만 마주쳐 버리고 말았다.

* * *

푸릇푸릇한 이파리, 맑은 하늘, 따사로운 햇살! 오랜만이다, 세상아. 변함없이 아름답구나.

“삑, 삐.”

“호호! 저쪽 아름드리나무로 가고 싶으신 거군요. 좋아요. 저 그늘에서 쉬면서 시원한 차를 가져오라고 할까요?”

“삐.(좋아요!)”

아름드리나무 쪽으로 위풍당당한 걸음을 옮기자 유렌과 카렌이 뒤를 따랐다.

“오필리어 님, 오늘도 정말 사랑스러우시지 않아요?”

“당연하죠! 저 보송보송하게 비죽 나온 꼬리깃 살랑거리는 것 좀 봐요. 어떡해, 눈물 날 것 같아요.”

“황궁 메이드 중에 우리보다 업무 만족도가 높은 사람은 없을 거예요.”

뿌듯하군. 나의 존재 자체가 직장인의 직업 만족도에 기여하고 있다니.

글로리나 부인 역시 내 옆에서 걷고 있었다.

어제 저녁의 일이다. 평소처럼 방을 활보하며 노닥거리다 보니 창밖의 풍경이 눈에 띄었다.

해가 지면서 하늘이 발갛게 물들었다. 황궁을 온통 달궈 놓는 그 붉은 빛을 보자니 왠지 고향이 떠올랐다. 이곳에서도 해는 서쪽으로 지고, 서쪽에는 혼우드가 있기 때문인가.

‘벨라도 이 노을을 보고 있으려나. 그러면 곧 흑표범으로 모습이 변하겠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역시 마지막으로 얼굴 한번 못 보고 온 게 너무 걸렸다. 조만간 클레멘츠에게 말해서, 인간 모습으로 돌아간 다음 편지라도 써야지.

그때 뒤에서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유렌과 카렌이었다.

“오필리어 님께서 저렇게 하염없이 바깥을 보시고…….”

“아무래도 밖으로 나가고 싶으신 거 아닐까요? 아무리 넓대도 실내만 전전하니 얼마나 답답하시겠어요.”

“어쩜 좋아. 뒷모습이 너무나도 처량해요…….”

아, 아니 저기. 나는 그냥 석양 보고 멍 때린 것에 가까운데요!

그러나 그들은 저들끼리 한참 뭔가 속삭이더니 글로리나 부인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그 결과가 오늘의 외출이었다.

의도치 않긴 했어도 밖으로 나오니 역시 좋았다. 원래 나는 저택이며 시장이며 숲이며 잘 싸돌아다니던 활발한 시녀였으니까.

그러다 저주에 걸리기도 했고 말이지. 아무튼.

메이드들과 글로리나 부인도 모처럼의 산책을 반기는 눈치였다. 이렇게 된 거 앞으로 좀 자주 나올까, 따져 보고 있을 때였다.

글로리나 부인이 우뚝 멈춰 섰다. 세 사람과 한 병아리 사이에 돌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무슨 일이지?

그들을 따라 옆을 보니, 늘씬하고 우아한 형태가 햇볕을 가리며 서 있었다.

역광을 받은 백금발이 마치 성인의 후광 같았다.

귀족적인 생김새가 감탄을 자아냈다. 오연한 태도가 표정에서부터 드러났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심지어는 숨결 하나마저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카밀 드 베일리스. 바로 그녀다.

“베일리스 영애.”

동행하던 글로리나 부인과 유렌, 카렌이 그녀에게 예를 갖췄다. 다만 좀 떨떠름한 태도였다.

이쪽뿐이 아니었다. 몇 걸음 떨어져 카밀을 따라온 그녀의 시녀들도 눈빛이 과히 불친절했다.

뭐지? 무슨 상황이야?

병아리 두뇌를 풀가동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왔다.

지난번, 카밀은 클레멘츠의 집무실에 들어오려다 허탕을 쳤다. 그 뒤로 클레멘츠가 웬 미인을 아낀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독점욕이 대단한 카밀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당장에 소문을 확인하러 황태자궁을 전전했을 것이다.

물론 소문과는 달리 클레멘츠가 사랑에 빠진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대신에 지극정성으로 길러지고 있는 웬 병아리를 발견했으니.

갑자기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위험에 빠진 건가?

겨우 병아리 산책에 집사장과 메이드 두 명이 수행하고 있다. 내 머리에는 파란 구슬을 엮은 장식도 달려 있다. 진짜 보석이 아니라 값싼 비즈를 솜씨 좋게 엮어 낸 거였지만. 아무튼 이 모두가 고작 병아리 한 마리에겐 과분했다.

카밀의 독점욕을 결코 우습게 봐서는 안 된다. 비록 연적은 아니더라도, 클레멘츠가 이만큼 신경 쓴단 것만으로도 그녀의 분노를 사기엔 충분했다.

병아리 암살을 지시하는 백작도 있는 마당에, 짝사랑 상대의 관심을 독식해 버린 병아리를 해치워 버리려는 악녀가 없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이쪽을 보는 카밀의 녹안은 끔찍하게 차가웠다. 그녀가 천천히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글로리나 부인과 메이드들이 팽팽하게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일촉즉발의 상황.

저 손으로 그대로 나를 쥐어 터뜨릴까? 잡아 패대기를 칠까? 아니면 그냥 발로 밟아 버리려나? 아, 여기선 대충 귀여워하는 척하고 나중에 다른 루트로 독약 같은 걸 보낼지도!

안 되겠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 날 공격할 이유가 없단 걸 각인시켜야 해!

다행히도 나에겐 믿을 구석이 있었다.

나는…… 귀여웠다!

판단을 마친 즉시 애교를 시전했다. 저는 당신을 적대하지 않아요! 보살핌과 관심을 필요로 합니다. 서열 관계의 완전한 우위를 내놓겠습니다! -라는, 동물 특유의 필살기였다. 실제로 나의 서열이란…… 한없이 쩌리에 가까웠다.

일단 몸을 발랑 뒤집었다.

“뺘아-.”

좌우로 살살 구르다가 일어나서 부르르 떨고, 괜스레 목 주위의 솜털을 가다듬으며 폼을 잡기도 했다. 자, 베일리스 영애. 아시겠어요? 제가 얼마나 필사적인지?

그러나 그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

크윽, 강하군. 제국의 황태자건 후작이건 백이면 백 함락되었는데 말이야.

대충 주변을 살피니 긴장이 누그러지긴커녕 분위기만 더 싸해졌다. 제대로 망했다.

“삑.(젠장) 삐익…… 비빅…….(이, 이게 아닌데…….)”

이대로 밝은 대낮에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건가? 설마. 집사장이자 황태자의 유모이신 글로리나 부인도 옆에 있고, 은근히 보는 눈도 많은데 그러겠어!

“…….”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던가. 카밀의 무시무시한 손이 그대로 내게 뻗어 왔다.

아, 안 되겠다. 수틀리면 바로 글로리나 부인의 치마폭에 숨자. 그렇게 마음먹고 있는데…….

카밀은 뻗었던 손을 거뒀다. 그대로 돌아서서 걸어갔다.

“아가씨? 그냥 가시는 건가요?”

“아가씨?”

‘최대한 험상궂게 이쪽을 쳐다보기’란 역할을 수행하던 시녀들도 급히 그녀를 따라갔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당분간 카밀에게 붙잡혀 죽을 걱정까진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좋았어. 역시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사는 것이다.

* * *

“아가씨, 돌아오셨군요.”

“어서 오세요, 아가씨.”

베일리스 후작가의 사용인들이 후작의 외동딸을 반갑게 맞았다.

아가씨는 요즘 황태자 전하가 데려온 여자를 찾느라 바빴다. 전하께서도 무심하시지. 그깟 근본도 없는 여자 때문에 아가씨를 힘들게 하시다니.

“오늘은 찾으셨나요? 어떠셨어요? 역시, 아가씨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여자였죠?”

“……뭐, 응.”

발목에도 못 미치긴 했다. 몸높이가.

“그럼 그렇죠! 누가 감히 아가씨의 자리를 넘보겠어요?”

현관에 모여든 사용인들이 키득거렸다. 카밀은 평소와 달리 그 말을 당연히, 당당히 받아들이기보단 멍한 기분이었다. 피곤하다고 중얼대며 목욕물을 부탁하자 그들은 곧 흩어졌다.

장미 꽃잎을 뿌린 물이 피로를 씻어 내는 동안, 기억은 자연히 낮의 정원으로 돌아갔다.

벌써 며칠째 염탐했는데도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클레멘츠는 그녀의 눈치를 보며 행동할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당히 곁에 두었으면 두었으리라. 하지만 이렇게나 기다려도 보이지 않는단 건, 그만큼 그 여자를 꽁꽁 숨겨 두었단 거고. 그만큼 아낀다는 뜻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