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카밀은 한순간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클레멘츠 레스타 뒤싱겐, 어떻게 이럴 수 있지?’
그가 굳이 자신뿐 아니라 그 어떤 여자에게도 관심이 없었다는 것. 그 하나만을 믿고 몇 년이 지나도록 고통스러운 짝사랑을 이어 왔다.
‘내가 당신에게 들인 정성을 알면서. 홀랑 다른 여자를 데려와? 게다가 어디 시골에서 굴러먹던 촌뜨기를?’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카밀은 자신을 에스코트하려는 카시스의 손을 뿌리쳤다. 집무실 안쪽까지 들리라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너! 서부 구석의 촌뜨기! 분수도 모르는 헤픈 것!”
모두가 놀라서 그녀를 보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차라리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내 발밑을 기면서 빌게 될 거다!”
* * *
카밀이 작은 소동을 피우고 간 뒤, 내 일상은 평화로웠다.
유렌과 카렌은 첫날처럼 매일 내 털을 빗기고, 꽃잎으로 화관을 만들어 씌워 주었다.
클레멘츠가 내밀었던 문제의 서류대로, 원래는 내 장신구 명목으로 상당한 예산이 책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도 내 의견을 받아들여 과분한 사치는 취소되었다.
“아쉬워요, 오필리어 님. 작은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물결 모양 티아라를 꼭 씌워 드리고 싶었는데…….”
“진주와 호박을 꿰어 만든 목걸이도요.”
“이젠…… 꿈일 뿐이군요. 도안도 전부 그려 놨는데…….”
“그러게요. 아쉬워요.”
그들은 우울한 낯으로 가방에서 도안을 한 장씩 꺼내 벽난로에 태웠다.
아니, 저기, 끝이 없는데?
병아리 전용 물품에 도면까지 그리는 건 클레멘츠 혼자만이 아니었냐고.
식은땀이 났다. 아무래도 메이드들도 이 궁의 주인처럼 진지하게 국고 탕진을 고려했던 것 같다.
나라도 정신 차리고 황태자궁의 폭주를 막아야지.
화려한 보석을 못 쓴다고 불평하던 메이드들은 금손답게 곧 대안을 찾아냈다. 그들은 리본이나 레이스, 작은 구슬 따위를 이어 붙여 어떤 장신구든 뚝딱 만들어 냈다.
만들고 입혀 보는 재미에 상심은 곧 잊은 듯했다. 유렌과 카렌은 걸핏하면 새 작품을 가져왔다. 머리 장식이나 앙증맞은 발찌, 병아리용 모자나 브로치 등.
그들이 내가 인간인 걸 알긴 하지만, 나는 놀라울 만큼 뻔뻔한 관종이었다. 신상을 개시하고 적당히 우쭐대면서 넓은 방 안을 활보하면 곧바로 즐거운 비명이 터졌다.
“꺄악! 어떡해!”
“너무 귀여워요! 오필리어 님!”
크으. 이것이 바로 스타가 된 기분인가?
그러다 글로리나 부인이나 클레멘츠의 발소리가 들릴라치면 눈치 빠르게 입을 다물고 키득거렸다.
그 풋풋함과 유쾌함을 흠뻑 들이마셔 힐링하고 나면, 다음엔 집무실에서 적당히 클레멘츠나 카시스의 얼굴 구경을 하며 노닥거렸다.
그는 나만 옆에 있으면 아무 근심 걱정도 없어지는 모양이었다. 실로 병아리 페티시 변태다웠다.
“사랑스러운 오필리어, 점심은 맛있더냐.”
“뺙.(오냐.)”
이렇게 황당하게 변해 버린 세계가 과연 여전히 소설 속이긴 한 걸까?
여주인공 대신 웬 병아리가 남주를 옆에 끼고 지내는 소설을 대체 누가 읽겠어? 작가님, 죄송해요!
야속하게도, 꼬여 버린 이 세계에서 나의 난감한 존재감은 커져만 갔다. 다 이 미친 황태자 때문이었다.
“황태자 전하, 이렇게 알현을 허락해 주셔서 기쁘기 한량없사옵니다…….”
클라티아의 다음 대 황제가 될 가능성이 제일 높은 클레멘츠. 그런 그의 힘을 빌리고 싶어 하는 사람은 수없이 많았다.
대부분은 보좌관인 카시스 후작 선에서 걸러졌지만, 힘든 경쟁을 뚫고 황태자를 만나러 오는 데 성공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쪽은 그대를 상대할 시간이 한량없이 있는 건 아니네. 용건부터 간결하게 말해 보게.”
“저, 그것이…….”
클레멘츠의 냉담하고 사무적인 태도에 중년의 귀족은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어쨌든 허둥대며 용건을 말하려던 그의 눈에, 황태자의 손 위에 올라와 있는 내가 포착됐다.
“삑삑.(힘을 내요, 아저씨!)”
“……!”
피차 힘없는 소귀족 신분인 듯해서 응원을 전하려고 했지만 역효과였다.
가엾은 그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떨렸다. 긴장에 당황이 겹치자 머릿속도 하얗게 날아간 모양이었다.
“삑, 삑!(이보쇼, 아저씨! 정신 차려요!)”
“쉬, 오필리어, 신경 쓸 것 없다.”
다정하다 못해 꿀까지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그 바람에 귀족 양반은 아예 넋이 나가 버렸다.
“엇, 화, 황태자 전하. 옆에 있는 그것은…….”
“뭐지?”
“병, 병아리…….”
…….
클레멘츠가 싸늘한 눈초리로 귀족을 쳐다봤음은 뻔한 일이었다. 결국 중년의 귀족은 요구 사항의 서론도 꺼내지 못한 채 눈물을 찔끔거리며 나갈 수밖에 없었다.
“저런 한심한 자를 동정할 필요 없다, 오필리어.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제 밥그릇을 챙기지 못했으니.”
“삐빅…….”
“마음이 따스하기도 하지.”
클레멘츠는 내 머리를 쓰다듬다가 아주 섬세한 힘으로 내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일렁이는 보라색 눈이 정면으로 들어오고 그가 낮게 속삭였다.
“그런 다정함은 내게만 보여 주는 편이 좋을 텐데.”
망할 자식, 병아리의 다정함을 탐하는 이유가 대체 뭐지? 뒀다 쓸 데라도 있을까?
설상가상으로 병아리의 몸은 심장조차 나약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순간에 눈치 없이 나댄다.
야, 나대지 마라. 너도 여기에다 같이 넣어 버리는 수가 있다.
나는 머릿속에 박혀 있던 ‘자의식 과잉 방지를 위해 절대 열어 보지 마시오.’ 상자를 꺼내 심장을 을러댔다. 여기에 뭐가 들었느냐고? 글쎄, 기억이 안 나! 나는 몰라!
그 뒤로도 많은 방문자들이 나를 보면서 당황만 하다가 쫓기듯 내보내졌다.
그들 중엔 분명 제국에 도움이 될 만한 안을 가져온 사람도 있었을 텐데……. 나는 정말 나라를 망하게 할 요망한 병아리인 걸까?
일에 방해되는 것 같으니 그냥 돌아가려고도 해 봤다. 하지만 클레멘츠는 나를 붙잡으며 이렇게 속삭일 뿐이었다.
“네가 한시라도 곁에 없으면 그리워서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구나.”
나는 소름 돋은 날갯죽지를 부들거리며 폴짝폴짝 뒷걸음질 쳤다. 어떻게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런 말을 할 수가…….
다행히 모든 방문자들이 나 때문에 집중을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이분이 바로 황태자 전하께서 귀애하신다는 오필리어 양이로군요. 과연 황금빛 솜털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허허!”
나…… 황태자의 병아리라서 이런 걸로 아부 당하는 거야? 솜털이 노랗다고?
“오필리어야 언제든 사랑스럽지.”
클레멘츠, 너도 이런 얄팍한 수에 넘어가서 경계 태세 내려놓지 말란 말이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제 친척이 가진 허브 밭에서 동물에게 무해한 찻잎이 나옵니다. 특별히 오필리어 님을 위해 최상급 한 통을 준비토록 하지요.”
그런 거, 준비하지 마아!
“경은 참으로 섬세하군. 본디 물질적인 보상이 낀 청탁은 받지 않는다만, 이번만큼은 오필리어를 생각해 준 성의를 보아 받도록 하지.”
받지도 마아아!
며칠 동안 클레멘츠가 일하는 걸 지켜본 결과 그는 꽤 이성적이었고 제법 원칙도 있었다. 내 선물만 가져온다고 안 되는 걸 되게 해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병아리를 공략하면 그 냉혹하던 황태자가 약간의 호의라도 비친다. 그 사실만으로도 황도 사람들의 반응을 이끌어 내기엔 충분했던 모양이다. 황실에 관심이 많은 그들은 충실하게 소문을 물어 날랐다.
첫날의 중년 귀족은 ‘오필리어 양을 보고 적절한 태도를 보이지 못해 실패했다.’라고 넋이 빠져 중얼거렸다고 한다.
반대로 원하는 걸 얻은 이들은 ‘오필리어 양의 환심을 산 덕분에 중요한 청탁에 성공했다.’라고만 내뱉고 자세한 이야긴 입을 다물었다.
성공의 비결을 경쟁자들과 공유하긴 곤란하니 당연한 행동이리라.
결과적으로 소문은 미묘하게 와전되었다.
먼저는 내 이름 때문이었다. 너무도 인간 여자의 이름 같은 ‘오필리어’.
그리고 혼우드로 갔을 때 클레멘츠가 백작가의 여식을 만났다는 사실.
질투에 눈이 먼 카밀 드 베일리스가 황태자궁을 다녀갔다는 소식.
여기에 로맨스와 스캔들을 좋아하는 수도 사람들의 상상력이 더해져…….
나는 어느 순간 클레멘츠가 제 궁에 애지중지 숨겨 두고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는 절세 미녀가 되어 있었다.
* * *
집무실 문 앞에서 쫓겨난 바로 그날부터 카밀은 황태자궁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이전에도 자주 왔다면, 이제는 짬만 나면 왔다.
목적은 하나였다. 황태자가 숨기고 있는 그 여자를 찾아내는 것. 찾아내서, 짓밟아 놓는 것.
“베일리스 영애, 이러시면 정말로 곤란하십니다. 한동안 초대받지 못한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전하의 엄명이 계셨습니다.”
“그래?”
이젠 건물 출입도 막아 놓다니. 아주 홀딱 반해서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었다. 카밀은 분노를 차곡차곡 적립하며 웃었다. 못 들어간다면, 바깥에서 기다리면 되지. 설마 황태자궁의 드넓은 정원을 두고 그 여자가 실내에만 갇혀 있겠는가?
끈질김만큼은 독보적이라고 자부했다. 야외에 오래 있어야 하니 양산을 챙겼고, 먼 곳까지 샅샅이 살피기 위해 오페라글라스를 가져왔다. 시녀들까지 대동한 카밀은 아예 정원의 위치 좋은 곳에 눌러앉아 버렸다.
“끈질기네.”
“아무리 그래 봤자 아가씨의 집념에 비할까요?”
“그 귀한 얼굴, 얼마나 예쁜지 반드시 봐 줘야겠어.”
“제까짓 게 예뻐 봤자 아가씨의 옆에 서는 순간 빛을 잃겠죠.”
입 안의 혀처럼 구는 시녀들이 깃털 부채를 살랑살랑 부쳐 주었다. 카밀은 차려진 쿠키를 입에 넣으며 오페라글라스를 눈에 댔다.
“……?”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드디어 뭔가가 나타났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그녀는 옆의 시녀에게 오페라글라스를 넘기며 저기에 뭐가 보이냐고 물었다.
“글로리나 부인, 그 꼬장꼬장한 집사장이 걷고 있군요. 전에 말씀하셨던 그 건방진 갈색 머리 메이드가 뒤를 따르네요. 덜떨어져 보이는 긴 머리 메이드가 양산을 받쳤는데 그 그늘 밑에 있는 게…….”
시녀는 잠시 침묵했다. 왜 눈도 좋으신 아가씨가 제게 물었는지 이제 이해했다.
“병아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