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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37)화 (37/218)

37화

이게 다…… 뭐야?

총 예상 비용의 자릿수를 본 나는 그만 뒷목을 잡았다. 이 정도면 애첩에게 나라 꼴아 박는 암군 비슷하네 뭐!

상나라의 주왕은 달기와 노는 데 정신이 팔려 고기가 열린 숲과 술로 메운 연못을 만들었다.

주 유왕은 포사의 웃음에 꽂혀서 귀한 비단을 죄다 내어 찢어 버렸다.

그리고 제국력 334년, 클라티아 제국의 황태자 클레멘츠는 요망한 병아리 오필리어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국고를 거덜 내고 마는데…….

‘적폐 황태자는 나와라! 단두대 맛을 보여 주마!’

‘저 병아리를 끌어내라!’

‘바비큐로 만들어 먹자!’

안 돼, 안 돼!!!!

암담해서 책상에 고개를 박아 버리자, 클레멘츠 놈이 걱정스레 물어 왔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느냐? 오필리어?”

마음에 안 드는 점? 네놈의 그 아름다운 머리가 그만 돌아 버렸다는 점?

클레멘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뭐 국운이 걸려 있는 대단한 고민이라도 되는 듯이.

그러다 뭔가 깨달은 듯 결연히 말했다.

“설마…… 그렇군.”

뭐가 그래?

“내가 어리석었다. 오로지 너만을 위한 별궁을 새로 만들고, 너를 위한 물건과 정성껏 너를 섬길 만한 이들로 채워 주지.”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이대로 놔뒀다간 둘이서 사이좋게 단두대 정모를 하게 될 것이다.

발밑의 이것은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문서였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치가 알려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과감하고 비장하게, 아직 꽤 남아 있던 물그릇을 호기롭게 엎질렀다.

촤악!

잉크 펜으로 쓰여 있던 문서는 다행히 빠른 속도로 번지고 있었다.

“……오필리어? 이게 무슨.”

“뺙- 삐.(잘 들어요, 전하.) 삑삐약, 삐뺙뱍.(저는 한탕주의자가 아니에요. 적당히 오래오래 해 처먹고 싶답니다.)”

“…….”

예쁜 보랏빛 눈동자는 살짝 충격 받은 기색이었다. 짜샤, 방금 넌 단두대 엔딩에서 벗어난 거야.

난 백작가 만찬장에서 그랬듯 계속 삐약거리며 이렇게 주장했다.

특히나 별궁 같은 소린 입도 벙끗 말아 주시겠어요? 나라를 기울게 하는 팜므파탈 포지션은 사양이거든요. 가금류 새끼인 상태로는 더더욱!

비용도 비용인데, 이 낯선 곳에 남의 집 귀한 딸을 데려오셨으면 찰싹 붙어서 관리 좀 해 주셔야죠. 다른 건물에 누굴 믿고 떨어뜨려 놓으시려는 거예요. 예?

열변을 토하다 보니 날갯짓과 발짓이 다수 동원되었다. 한차례 실컷 각기 높낮이가 다른 ‘삐약삐약’을 쏟아 놓고 보니 어째, 클레멘츠가 조용했다.

뭐지? 저 애매한 미소는?

그는 미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되다 만 미소가 난처하고 어이없는 입가에 걸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째 더 반짝반짝 촉촉하기도 하고……. 어, 촉촉?

문득 내려다본 내 날개깃은 흠뻑 젖어 있었다. 아, 이런. 물을 흥건히 쏟아 놓은 책상 위에서 격하게 움직이다가 클레멘츠에게 실컷 뿌려 댄 모양이었다.

“삐육(앗). 삑(으음…….) 뺘아.(죄송해요…….)”

“……하하.”

그의 입장에서 보면, 기껏 생각해 줬더니 물을 쏟고 튀기고 패악을 부린 상황이었다.

“……풉. 크하핫!”

화를 내고도 남을 만한데, 급기야 웃음을 터뜨린다. 얘, 왜 이러지? 설마 병아리 변태일 뿐 아니라 물벼락 맞는 것도 좋아하나?

까면 깔수록 진짜 이상한 사람이었다. 아직 나이도 젊은데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적셔 놓으니까 더 잘생긴 외모가 동정심을 자극했다.

음, 아무튼 지나친 사치는 안 된다는 나의 큰 뜻은 알아들은 걸까 몰라.

병아리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기색을 살피던 그때, 누군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순간이었지만 문 쪽을 응시하는 클레멘츠의 눈이 차가워졌다. 뭐지?

“신경 쓸 것 없다.”

곧장 달래듯 건네지는 목소리. 방금 봤던 차가운 눈빛 따윈 꼭 거짓 같았다. 그렇지만 잘못 봤을 리는 없고. 조금 뒤 또다시, 누군가 더 사납게 문을 두드렸다. 카랑카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어렴풋이 뭉개져 들어왔다.

나는 바로 깨달았다. 카밀 드 베일리스.

‘뷰티 앤 더 비스트’의 악녀이자, 사교계의 백조이자, 클레멘츠의 곁을 차지하려는 여자들을 모두 없애 버리는 질투의 화신.

카밀은 바늘 가는 데 실 가듯 클레멘츠를 따랐다. 그가 오랜만에 수도로 돌아왔으니 그녀의 방문은 예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원작에서도, 카밀은 집무실 안에서 심상찮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클레멘츠와 벨라를 보고 머리끝까지 화가 난다.

그러나 여기 있는 건 심상찮은 상황을 연출하는 병아리뿐. 게다가 저 성난 노크 소리에도 문은 꿈적도 하지 않는다.

어?

그러고 보니 이번엔 왜 문이 닫혀 있을까? 아니지, 원작에선 왜 열려 있었던 걸까?

* * *

황태자궁의 응접실.

카밀 드 베일리스는 그야말로 여주인답게 앉아 있었다. 아마 색 머리카락은 왕관이나 후광처럼 그녀를 빛나게 했다.

눈동자 색과 어울리는 녹색 드레스. 완벽한 몸매와 당당한 자세.

그녀야말로 사교계의 백조였다. 카밀의 목소리와 말투, 화장법, 관심사, 옷차림 등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군림하는 자로 태어났고, 천성에 알맞게 길러졌다.

그래서 그런지, 카밀은 어디에 있건 그 자리를 휘어잡았다. 심지어는 주인도, 손님도 아닌 불청객 입장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뭐라고?”

“당장은 만나기 어려우니…… 대, 대기하시라는 명입니다.”

“지금 나보고, 얌전히 앉아 기다리고 있으란 얘기니?”

험한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질문을 받은 메이드는 바들바들 떨었다. 그녀의 앞에서 말 한마디, 눈짓 하나 잘못 했다가 뼈도 못 추리게 된 이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베일리스 영애가 가장 유력한 황태자비 후보가 된 이유가 달리 있던가? 자신 외에 후보가 될 만한 자들을 싹부터 짓밟았기 때문이다. 하물며 귀족조차 아닌 메이드쯤이야.

레이스 장갑을 낀 손으로 쥔 부채가 메이드의 턱을 치켜올렸다. 우아한 몸단장에 비하면 우악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너 내가 누군지 모르니?”

메이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베일리스…… 후작 영애이십니다.”

“흥.”

카밀은 내팽개치듯 메이드를 놓아주었다. 벌벌 떠는 꼴이 과연 버러지다웠다. 그녀는 곧장 일어나 응접실을 벗어났다.

“베일리스 영애.”

“베일리스 영애.”

그녀를 알아본 황태자궁의 사용인들이 인사해 왔다. 어차피 수백 번은 더 들락거린 곳. 굳이 누가 안내해 주지 않아도 원하는 장소를 얼마든 찾아갈 수 있었다.

클레멘츠 레스타 뒤싱겐.

단 한 사람. 그녀가 아무리 원해도 갖지 못하는 남자.

그는 어째서 내게 이토록 차가운가?

카밀은 자신을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클레멘츠의 냉정함은 오히려 카밀의 집요함에 불을 지폈다.

사실 귀족파의 대표인 베일리스 후작가는 황태자와는 대립하는 관계였다. 그러나 집안의 반대 따윈 아무 장애물도 되지 못했다.

그렇게 삼 년이 흘렀다.

오늘은 며칠씩이나 수도를 비웠던 황태자가 돌아온 날. 당연히 아침부터 그의 궁을 방문했건만, 응접실에 붙잡아 두고 그저 기다리고 있으라니?

그간 클레멘츠는 찾아가면 얼굴 정도는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누는 말이라곤 인사치레 정도가 전부라도. 그가 바쁘면 그조차 못 하더라도.

이렇게, 오지 말고 그저 기다리라는 통보를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노골적이진 않았지만 사실상 축객령이었다.

끔찍하게 불쾌한 예감이 카밀을 엄습했다.

그 ‘모나한 백작 성’이란 초라한 시골 성에 대해 진작에 조사를 마쳤다.

그녀보다 두 살 어린 백작의 여동생이 살고, 이름은 벨라루시아.

웃돈을 주고 얻은 자료에 따르면 제법 얼굴이 반반하다지.

혹여나 자신을 본 황태자가 그 여자를 다시 떠올릴까 봐, 더 신경 써서 꾸미고 나왔다.

시골에서 예쁘장하단 소리 듣는 정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미모임을. 수도의 유행을 선도하는 제 옷차림에 비하면 그 여자의 옷과 장신구는 촌스러울 뿐임을. 그가 알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저를 만나지 않겠다는 이유가 뭐겠는가?

이윽고 도착한 황태자 집무실 앞.

“문을 열어 주렴.”

역시나 웬 야무져 보이는 메이드가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베일리스 영애, 지금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말할게. 열어.”

오필리어가 아침에 만난 메이드, 유렌의 회색 눈이 흔들렸다. 아무 힘도 없는 메이드의 입장. 당연히 베일리스 후작 영애가 두려웠다.

하지만 더 두려운 것은 황태자 전하셨다.

너희에게 시킬 일은 많지 않다. 다만 오필리어를 위험에 처하게 하면 그 누구도 용서하지 않는다.

평소의 빈틈없으신 모습과도 달랐다. 어떤 극단적인 감정이 느껴졌다. 유렌은 동료 카렌과 함께 어떤 반문도 못 하고 엎드려 떨었다. 그게 바로 어제 일이었다.

“……송구합니다. 전하의 명이오니 소인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카밀은 눈을 험악하게 치떴다.

갈색 머리를 올려 묶은 이 메이드는 눈빛 한 번에 굴복한 응접실의 버러지보단 훨씬 쓸 만했다.

이런 걸 골라서 붙여 주다니. 어지간히도 그 시골 여자가 마음에 들었나 보지?

그녀의 심기가 엉망진창으로 비뚤어졌다.

“그 시골뜨기에게 의리를 지켜 봤자 내 손으로부터 너의 목을 지켜 줄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때였다.

“베일리스 후작 영애 아니십니까.”

붉은 머리가 눈에 띄는 사내가 접근했다. 그는 사근사근 카밀을 이끌어 내려고 했다.

“전하께서는 바쁜 일이 밀려 조금도 짬을 낼 수가 없으십니다. 안타깝지만 더 좋은 날을 기약하시지요.”

지금까지가 분노였다면, 그의 등장에 카밀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듀프레 후작까지?’

동부 귀족의 수장이자 황태자 파의 대표. 측근 중 측근인 그마저 저 문 너머에 있을 여자를 비호하고 나섰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하루 이틀의 불장난이 아니었다. 황태자는 그 여자에게 진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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