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병아리, 아니 오필리어 님은 편한 표정으로 털을 힘껏 부풀리고 있었다. 말 한마디 없어도, 행복한 기분을 숨기지 않는단 게 느껴졌다.
내보이는 순간 찔리는 약점이나 되는 양 진짜 감정을 숨기는 것이 황궁의 풍토. 거기 익숙해졌던 그들이기에 이 모습은 말할 수 없이 신선했다.
또, 글로리나는 아직 병아리가 되기 전의 오필리어 님을 떠올렸다.
턱선 길이의 굽슬거리는 금발이 흐트러진 채 평온히 잠든 소녀. 그러나 그녀를 이 방으로 데려온 황태자 전하의 얼굴은 평온하지 못했다.
“어떻게……! 전하. 어쩌다가!”
버려진 어린 동물을 대책 없이 집으로 들여 놓고 어쩔 줄 모르는 소년 같았다. 그녀가 황태자의 유모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글로리나는 그의 어머니의 종이었듯이 황태자의 종이었다. 책임질 수 없으니 내어 버리라고 매정하게 명령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었다.
돌보라면 돌보고, 지키라면 지키는 것이 그녀의 할 일이었다.
그분은 지금껏 사고 비슷한 것 한번 쳐 본 적 없지 않은가.
어느 순간 모든 어리광이 통하지 않는단 걸 깨달아 갑자기 어른이 된 아이처럼. 너무도 부드럽게 돌아가기에 오히려 꺼림칙한 자동 인형처럼.
그런 모습을 보면 늘 가슴이 아팠다.
황태자가 총애하여 궁에 두는 것이라면 동물이든 사람이든 위험 부담이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쩌면, 어쩌면…….
이 아가씨가 그런 전하를 붉은 피가 도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 않을까. 불안함과 난처함, 또한 그 모두를 얇게 간신히 덮는 희망이었다.
“어때요, 전하. 몰라볼 만큼 예뻐지셨죠? 물론 그 전부터 귀여우셨지만요.”
“…….”
글로리나 부인의 손바닥으로 이송되어 온 클레멘츠의 집무실.
갑자기 날개가 시작되는 부분이 조금 간지러웠다. 목 부분을 부풀리며 부리로 그쪽을 가다듬고 고개를 드니, 어라.
잘못 봤나? 클레멘츠의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크흠.”
그는 한 박자 늦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유렌과 카렌 솜씨랍니다. 태자궁에는 치장을 해 드릴 귀부인이 없어 실력 발휘를 못한다고 아쉬워하던 아이들인데. 오늘 소원을 풀었다며 뿌듯해하더군요. 호호.”
글로리나 부인은 클레멘츠의 손 위에 나를 올려놓았다. 보랏빛 영롱한 눈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누구나 능력에 맞는 대우를 받아야 하지. 유렌과 카렌의 월급을 십 퍼센트 올려 주도록 해. 그들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군.”
“어머나.”
“삐.(어머나.)”
좋겠다. 이렇게 월급이 오르다니. 프로 메이드님들, 보고 계신가요? 제가 이렇게 한 건 했습니다.
“그럼 전하, 저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러지.”
아니 저 부인? 저는요? 저도 데려가요! 저 아침밥도 아직인데……!
애처롭게 삐약거려 보았지만 글로리나 부인의 꼿꼿한 뒷모습은 이내 문 너머로 사라졌다.
“삐.(아…….)”
왜 이런 곳에 클레멘츠와 단둘이 남겨 놓는 거지? 낮이고, 저놈은 워커홀릭이고, 일하는 시간 아닌가? 그럼 내가 방해될 거 아니야?
마지못해 살펴본 그의 집무실은 소설 속에 묘사된 그대로였다.
검은 대리석이 거울처럼 깔렸고, 색이 어두운 휘장과 가구가 장중함을 더했다.
간간이 놓인 장식품도 은 꽃병이나 장식용 검 같은 금속성이었다.
이곳에 처음 발을 디뎠던 벨라조차도, 삭막하고 냉엄한 분위기에 몸서리를 쳤다고 했었나.
그만의 공간에 초대받은 유일한 사람. 얼음 같은 그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미녀가 이 칙칙한 공간 전체를 밝힌다면 얼마나 좋은 그림일까.
그러나 여주인공 따위는 없고, 대신 웬 조그만 털 뭉치가 빌빌거리고 있으니. 이 괴리감은 대체 뭐란 말인가.
마치, 한식 9첩 반상에 콘플레이크 시리얼이 어색하게 끼어 있는 것만 같다.
“오필리어, 보고 싶었다.”
내 자괴감과는 상관없이 클레멘츠 놈이 절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님아, 바로 어제 봤잖아요. 수도로 오는 동안 지겹게 봤고.
우리가 무슨 한창 불타오르는 연인이냐? 돌아서면 보고 싶게.
아, 혹시.
‘(내 귀여운 병아리)오필리어, 보고 싶었다.’라는 뜻인가?
본모습으로 있을 수 있었던 이틀 동안, 클레멘츠는 사랑스럽기 이를 데 없는 병아리와 헤어져 있었던 셈이다.
그는 병아리 오타쿠 변태 자식이니 이런 반응도 무리는 아니다.
“뺘…… 아.(에휴….)”
글로리나 부인이 뭐랬지? 저래서 신붓감은 만날지 걱정이었다고? 근데 내 덕분에 안심했다고?
그녀가 잘못 생각했다.
날 데려옴으로써 클레멘츠는 어엿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남자로부터 더 멀찍이 떨어져 버렸다. 병아리와 결혼하겠다고 들지나 않으면 다행인 것이다.
나는 작고 노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삑쀼.(언제 사람 될 건지…….)”
“…….”
앗, 그렇지 맞다. 이 녀석 아무래도 내 병아리 언어를 알아듣는 것 같다는 유력한 심증이 있었다.
평소대로 막말을 하다가 거기에 생각이 닿자 조금 겁이 났다.
혹시 지금껏 참다가 한계에 부딪힌 거 아냐? 당장이라도 백숙으로 만들어 버린다거나……?
“위험할 만큼 귀엽군. 다른 이가 봐 버리면 어쩌나, 걱정될 정도로.”
그러나 예쁜 보라색 눈에서 반짝이는 저 기쁨은…… 진심이었다.
역시 병아리 언어를 알아듣는다는 둥 하는 건 내 망상이었나? 나야 좋지. 좀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삐야악.(난 네 말을 누가 들을까 봐 두렵다.)”
“……차라리 침실 안에만 가둬 놓을까.”
“삐-이.(병아리 집착광공 자식…….)”
그의 눈썹이 살짝 위로 들려 올라갔다. 흡사, 집착광공이 뭔지 묻는 것처럼…….
아닌가?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니 모든 게 의심을 뒷받침할 증거로 보이기 시작했다. 피곤하게.
“삑뺙.(됐다.) 뺘욱비빅.(이제 일이나 해.)”
간만에 황궁으로 돌아왔으니 일이 쌓여 있을 거 아녀? 병아리 놀음에 심취할 때가 아닐 텐데.
짜게 식은 눈으로 몸을 돌리……려고 했는데. 별안간 달콤한 냄새가 내 코를 찔렀다.
음, 신선도가 높은 햇곡식을 엄선해 빻은 냄새야. 고소함의 비율이 높은 걸 봐서 견과류도 섞여 있군. 거기에 새콤한 베리류까지…….
정신을 차려 보니 이 향긋한 내음의 진원으로 종종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가 오목한 그릇 속의 내용물을 티스푼으로 저었다.
“식사는 아직이겠지? 어서 먹거라. 최고급 재료만 엄선하여 카시스가 직접 배합했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카시스 듀프레’라는 이름이 마치 미슐랭 쓰리 스타 주방장처럼 느껴졌다. 믿고 먹습니다, 당신의 요리.
냠.
……역시!
한 입, 또 한 입이 저절로 넘어갔다.
“맛있나?”
“삐약!!(맛있어!)”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부리로 모이를 퍼서 목구멍에 들이붓는 수준으로 먹다 보니 클레멘츠가 두어 번 더 모이 그릇을 채워 주었다.
신이 나서 저절로 몸이 방방 떠올랐다. 그런 내 머리를 클레멘츠의 손이 흐뭇하게 쓰다듬었다.
자, 잠깐. 나는 고작 먹을 것에 홀랑 넘어가 버리는 그런 지조 없는 병아리가 아니야. 이 손 치우쇼.
“물도 같이 마셔야지.”
콕콕.
음! 맛있는 거랑 곁들이니 맹물마저도 꿀맛이로구나.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클레멘츠가 나를 애착 인형마냥 다정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여기서 지내는 한 네게 부족한 건 없을 거다. 이 영양식이 마음에 든다면 카시스에게 비슷한 걸로 여러 종류 만들게 하지.”
“……삑.”
“황실 그릇 장인에게 전용 모이 그릇 주문을 넣었다. 다음 주쯤이면 완성되겠군. 도면을 한번 보겠느냐?”
특제 영양식이야 반려동물을 키우는 현대인들도 자주 만드니 그러려니 한다. 그런데 무슨…… 전용 모이 그릇? 그건 좀 과하지 않나?
얇은 종이에 깔끔한 먹 선으로 예쁜 그릇이 그려져 있었다. 진주조개를 연상시키는 아기자기한 형태. 가장자리엔 금빛으로 내 이름 ‘오필리어’가 박혔다.
혼우드 시절 카탈로그를 보며 열렬히 갖고 싶어 하던, 수도에서 최신 유행하는 디자인이었다. 이걸…… 이걸 병아리가 돼서야 갖게 되다니 현타가 온다.
“아직 초벌 단계이니 네가 원하는 장식을 추가할 수 있다. 리본 대신 금테를 두르는 게 좋을까? 아니면, 진주를 박아 주랴?”
그는 사람을 깔아 내리는 화법 이상으로, 유혹적으로 말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녹아내릴 듯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모습은 마치…….
애첩에게 돌아 버린 나머지 하늘의 별이든 충신의 목이든 똑 따다 줄 태세가 된 왕 같달까?
……미친. 역시 그건 너무 갔다. 전생에 사극을 너무 많이 본 것이다.
어떻게 병아리 좀 어화둥둥 하는 걸 그렇게 해석할 수가 있지? 정신 차리자, 오필리어 레오라.
황태자의 병아리면 좀 비싼 모이 그릇을 쓸 수도 있는 거지. 마치 헐리우드 배우의 견공이 구X 개 목걸이를 한다거나, 아이돌의 반려견이 루이비X 담요를 깔고 자는 것처럼. 암, 그 정도야 뭐.
최대한 스스로를 가라앉히며 고개를 저었다.
“삑귱.(아니,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문제는 거기부터였다. 클레멘츠는 흡족해하며 다른 종이를 꺼내 펼쳤다.
“내게 속한 것들은 모두 최고의 대우를 받아야 하지. 그게 클레멘츠 레스타 뒤싱겐의 원칙이고, 이 나라 황실의 권위다.”
그가 잘생긴 얼굴을 괴고 싱긋 웃었다. 불길함이 엄습했다.
“특히 너에겐, 가능한 최선의 대접을 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나. 한번 살펴보고 더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 다오.”
그러니까…….
최고급 식단을 위해 매일 신선한 재료 공수. 저 멀리 옆옆 왕국에 있다는 유명 조류 건강 전문가 초빙.
황도의 유명 디자이너 고용, 병아리 전용 의상과 보석 제작. 전용 식기와 소형 가구, 각종 장난감 특별 주문 제작.
……등 등 등. 그리고 그 모든 걸 유지할 수 있는 인력과 할애할 공간까지. 그리고 각 항목당 예상되는 비용이 상세한 목록으로 들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