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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35)화 (35/218)

35화

……!

진짠가 보다. 일말의 양심이란 게 있는 마물들이었구나!

사과 비슷한 것과 나름의 보상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거라 오히려 솜털이 쭈뼛해졌다.

[우리에게 함부로 닿으면 안 돼. 조심해야 하니까…….]

이 말은 그들끼리 하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합체 마녀는 제 엄지손톱 하나를 뽑아냈다. 장난처럼 뾱 하는 소리가 났다.

‘……!?’

거 암만 꿈이라지만 좀 과격한 거 아뇨!

[진심을 다해 강렬히 염원해. 흠집이 깨어지도록.]

검은 손톱이라 생각했지만 안쪽은 또 흰색이었다. 그것이 나풀거리며 날아와서 내 조그만 가슴팍에 박혔다.

“χρυσό μανιτάρι.”

엥, 뭐라고? 저놈의 혀 꼬이는 고대어 진짜……!

따끔, 하는 감촉이 선명했다. 시야가 점멸했다. 편안한 피로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누군가 내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배부르고 등 따실 때면 으레 그렇듯, 난 긍정적인 예감에 부풀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달성했잖아. 클레멘츠의 생명 보장!

‘클레멘츠, 당신이 살아 있어서 다행이에요.’

피폐 전개에서 벗어났다는 걸 알리듯 주변은 온화하고 조용했다. 나는 몸을 뒤척이며 기분 좋은 한숨을 쉬었다.

“오필리어 님.”

으음.

“오필리어 님, 일어나십시오.”

나이 든 여성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어머니? 저 말투는 어머니가 아닌데.

가까스로 눈을 떠 보니 흰색과 금빛이 어우러진 공간에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비익…….(여긴…….)?”

“정신이 드십니까? 여기는 황궁입니다.”

“비이익.(아.)”

조금 작다 싶은 손이 한참 부르르 떨면서 정신을 못 차리는 나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깨어나 보니 이미 병아리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커다란 창이 달린 밝은 방은 미치도록 넓어 보였다.

이를테면 내가 일어난 침대는 병아리 오백 마리를 눕혀도 모든 병아리가 쾌적하게 잘 수 있을 만큼 넓었다. 데이지 꽃이 수놓인 캐노피가 흔들렸다.

날 깨운 부인은 갈색 머리가 섞인 더티 블론드를 단정하게 땋아 올린 모습이었다.

단정한 드레스 가슴팍에는 태자궁의 집사장임을 나타내는 황동 배지가 달려 있었다.

아, 누군지 알아!

‘다정하고 온화해 보이는 껍데기. 하지만 그 안에는 단단한 갑주를 둘러 입은 듯, 찔러도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부인.’

소설에 등장하는 클레멘츠의 유모, 로메오 글로리나였다.

황궁으로 따라온 벨라를 모시긴 하지만, 어딘지 모를 거리감과 냉정함으로 벨라의 황궁 생활에 은근한 스트레스를 더하던 사람.

‘레이디 모나한, 이쪽 구역엔 접근하시지 않는 편이 좋다고 분명 말씀드렸을 텐데요.’

물렁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조금이라도 황궁의 규율을 따르지 않으면 과민 반응하며 벨라를 우아하게 몰아세웠다.

그러다가 악녀 카밀의 공세에 몰린 벨라가 실수를 저지르자 평정을 잃고 그녀를 다그치기도 했다.

‘귀족들에게 빌미를 던져 주지 마십시오. 당신을 보고 그들이 입방아를 찧는 대상은 다름 아닌 황태자 전하시란 말입니다……!’

한마디로 엄격, 근엄, 진지로 무장한 채 간접 시 월드 체험까지 시켜 주는 깐깐한 황태자 지킴이였다.

나는 긴장했다.

클레멘츠의 여친에게만큼은 아닐지라도, 분명 반려동물에게도 깐깐하겠지?

‘오필리어 님은 단순한 병아리가 아닙니다. 황태자 전하의 반려동물이라면 그만한 체통과 품위를 지키셔야지요.’

‘오필리어 님, 분당 날갯짓은 60회 이상 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드렸는데……. 부디 황궁의 법도를 지켜 주십시오.’

황궁의 수많은 규율 중에 조류의 날갯짓에 대한 규정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녀가 할 만한 잔소리들을 익히 상상할 수 있었다.

벌써 머리가 아파 온다. 그녀가 날 돌보리란 걸 알았더라면, 계약서에 ‘글로리나 부인의 잔소리를 듣지 않게 해 준다.’라는 조항을 추가할 것을…….

지금도! 당장이라도 ‘황태자 전하의 병아리면서 이렇게 늦게 일어나시다니! 황태자궁을 방종과 태만으로 물들이시려는 겁니까!’ 하는 잔소리가 쏟아질 듯했다.

저, 저 안 잤어요! 그냥 누워만 있었던 거예요!

후다닥 일어나서 날개 끝으로 눈을 비비고 있으려니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잉? 웃음소리?

“아,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오필리어 님께서 너무도 사랑스러우셔서…….”

네……? 예?

부리가 빠지도록 커다랗게 벌어졌다. 절세 미녀인 벨라를 보고도 칭찬 한마디 없었으면서, 왜 이러시지?

설마 이쪽이 취향이신가? 클레멘츠의 병아리 집착공 기질은 사실 그의 유모로부터 왔다든가…….

“황태자 전하의 유모, 로메오 글로리나입니다. 전하께서 오필리어 님을 직접 돌보라고 명하셨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소개한 그녀는 가슴에 손을 대고 날 향해 허리를 숙였다. 분명 내가 인간이란 걸 알고 있는 행동이었다. 최측근인 만큼 클레멘츠에게 전해 들었겠지.

그렇다면 더더욱 나는 클레멘츠의 근처에서 소란과 구설을 일으킬 여지가 다분한 이물질인데, 이렇게 너그럽게 나오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삐이유.(왜, 왜 이러세요.) 삐익삑.(제게 잘해 주셔도 국물 한 국자 나오지 않아요.) 삐구륵.(그냥 때 되면 밥만 던져 주시면 되는데.)”

“우후훗.”

입을 가린 채 터뜨리는 부드러운 웃음소리. 그 자체가 적잖이 충격이라 인지 부조화가 왔다.

이건…… 캐, 캐붕? 캐붕 아닌가요 작가님? 비틀어진 소설 속 세계가 붕괴하고 있다는 전조?

“외람되옵니다만, 저는 전하께서 태어나셨을 때부터 줄곧 지켜봐 왔답니다.”

심지어 글로리나 부인은 맥락 없이 사담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분께서 좋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누구보다 행복하시길 바랐습니다. 허나 어느 순간부터 곁에 누구도 두려고 하시지 않아 걱정했었답니다.”

마치 지나다니며 안면만 익힌 어르신이 갑자기 말을 걸었을 때처럼, 얼떨떨했지만 별수가 없어 고개만 끄덕거렸다.

“저러다 신붓감은 맞아들이실 수 있을까, 싶었죠. 호호!”

으음, 아쉽지만 그 자식은 글러 먹었으니 포기하십쇼.

당신의 전하께서 글쎄 평생의 인연을 걷어차 버리셨거든요. 에휴. 이젠 어느 댁 불쌍한 아가씨가 저놈에게 코가 꿰일지. 아니면 어느 댁 자비로우신 아가씨가 저놈을 거둬들여 줄지 걱정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드디어 이렇게 귀여운 분을 데려오시다니, 한숨 돌렸지 뭐예요! 호호.”

“뺘아?”

예? 지금 설마 제 얘긴가요? 그 불쌍하고 자비로운 아가씨 포지션이 나인 거야, 지금?

“삑삑.(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부인.) 삑 삐약뀨.(전 그냥 1년 계약직 병아리일 뿐…….)”

뭐라고 태클을 걸기도 전, 짝짝 글로리나 부인이 손뼉을 쳤다.

“모두들 들어오너라.”

메이드복을 입은 여자들이 두 명 들어왔다. 윤기 나는 갈색 머리를 하나로 묶은 소녀가 먼저 말했다.

“오필리어 님, 안녕하세요. 저는 유렌.”

이어 말한 쪽은 그보다 색이 연하고 푸석한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저는 카렌. 앞으로 오필리어 님의 전속 메이드예요.”

전속 메이드? 고작 병아리 돌보는 데?

“불편한 모습으로 여기서 지내셔야 한단 말씀은 들었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저희가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아, 이들도 내 정체에 대해선 들은 모양이었다. 명성 높은 황궁 메이드인 만큼 입이 무거울 터.

하지만 안도하기 무섭게, 광기 서린 그들의 회색 눈동자가 곧장 나를 향했다.

“그럼, 치장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삐빅……?(으, 으응?)”

“오필리어 님, 털색이 정말 고우세요.”

“이 비단 같은 윤기는 또 어떻고요!”

“삑…….(진정해 봐 잠깐……!)”

백작가에도 솜씨 좋은 메이드들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과연 황궁 레벨은 달랐다. 그들은 명실상부한 프로였다.

손이 안 보일 만큼 빠르게 움직이는데도 전혀 아프지 않고 부드러웠다. 뭣보다 자기들끼리 손발이 척척 맞았다.

그렇게 어쩌다 보니 그들에게 붙들려서 솜털과 깃털이 빗겨져 버렸다.

거칠어졌던 발은 향기 좋은 크림으로 부드럽게 마사지되었다.

이들이 불태우고 있는 직업 혼은 원석을 꾸미고 가다듬어 미인으로 만들고자 하는 미용인의 것일까?

아니면, 전투와 같은 작업을 치르는 애견(애조?)미용사의 것일까?

말해 뭣 하냐. 후자겠지.

그들은 마무리로 자잘한 꽃잎을 엮어 만든 화관까지 머리에 씌워 주었다.

“완성이에요, 오필리어 님.”

내 앞에 내밀어진 은거울 속에는…… 솜털이 대단히 풍성하고 반질거리는 작고 노란 새가 다소곳이 화관을 쓰고 있었다.

“정말이지 엄청나게 귀여우세요!”

“누구든 한번 보면 분명히 반하겠어요!”

“오늘의 오필리어 님이 저희 인생의 역작이에요!”

인생의 역작? 그럴 리가 있나. 비록 거울 속 병아리가 특출 나게 귀엽긴 했지만.

이렇게 솜씨가 좋은데, 그동안 어떤 사람이든지 이들의 손을 거치면 호박이 수박 되는 수준을 넘어선 환골탈태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칭찬을 해 주다니! 상대가 병아리든 뭐든 립 서비스까지 잊지 않는 진정한 프로 정신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나름 남작가의 영애로 8년을 살면서도 매일 아침 혼자서 머리를 빗고 옷을 갈아입었다. 이런 정성 들인 대접? 넘칠 만큼의 칭찬? 경험한 적 없다.

최상위 서비스에 면역 없는 내 몸은 결국 흐물흐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삐이익……(아이 참, 그 정돈 아닐 건데…….)”

부끄러움에 몸이 배배 꼬였다. 그 즉시 유렌과 카렌은 자지러지는 듯한 환성을 터뜨렸다.

“아아! 귀여워!!”

“매일매일 이렇게 꾸며 드릴게요, 오필리어 님! 갓 따 온 꽃잎을 두르고, 금가루로 화장하고, 빌로드 깔개 위만 걸으세요!”

“삑삐.(그, 그건 좀…….)”

점잖게 있던 글로리나 부인도 한 소리 했다.

“유렌, 카렌. 소란스럽구나. 오필리어 님께 예의를 지키렴.”

집사장 글로리나와 두 메이드들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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