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고개를 돌리다가 부모님과 눈이 마주쳤다. 부부는 일심동체라, 그분들의 표정은 똑같았다. 경악과 의문, 현실 부정 사이에서 허우적대고 계셨다.
‘오해예요! 으악!’
내가 왜 클레멘츠와 함께 와 버렸을까. 어떻게든 마차에 떨궈 놓고 도망 올 것을.
흔들리는 동공을 찻잔으로 감추려 해 봤다. 질이 좋진 않지만 알맞은 온도로 우려진 찻물이 부드럽게 넘어갔다.
“그대들의 딸은 실로 신께서 내게 내리신 선물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어.”
“푸훅!!”
나는 마시던 차를 뿜었다.
달그락!
아버지는 들어 올리던 찻잔을 놓쳤다.
어머니는 자그마치 황태자 앞에서 차를 뿜어 버린 나와, 손을 덜덜 떨고 있는 아버지, 그에 못지않게 당황한 자신 중 누굴 먼저 추슬러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계셨다.
이게 아닌데.
원래는 다음과 같이 적당히 둘러댈 말을 준비해 왔다.
‘저택에서 잠시 황태자 전하의 시중을 들어 드렸는데, 황궁에서 일해 볼 생각이 없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영광스럽게도! 제가 또 베테랑 시녀잖아요? 세숫물을 딱 좋은 온도로 맞추는 스킬이 마음에 드셨던 걸까요? 아니면 침실에 피워 드린 향이 마음에 드셨을지도 몰라요. 안정 효과가 있도록 조합했거든요. 하지만 전 여기 사람이고 황궁 시녀직이 그렇게 만만하진 않을 테니, 일단 1년 계약직으로 경험을 쌓아 보기로 했어요. 안녕히들 계세요. 불초자식은 일하고 오겠습니다!’
그런데……. 젠장, 미리 상의 좀 하고 올걸. 설마 클레멘츠가 이렇게 급발진을 해 버릴 줄은!
“이런, 나의 오필리어. 괜찮으냐?”
네……? 누구 오필리어요?
그는 곧 황실 문장이 수놓아진 손수건을 꺼내어 내 얼굴을 닦아 주었다. 뭐라고……? 얘가?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지금 누구 혼삿길을 막고 있어!
“그녀는 지금껏 내가 봐 온 어떤 존재보다도 사랑스럽다. 오필리어와 함께 있는 동안 내 정신은 어느 때보다도 유쾌해지지.”
“그, 헉…… 그런…….”
비교적 침착한 편인 어머니마저 ‘그, 그런…….’만을 연발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숨넘어갈 듯한 소리를 내고 계셨다. 슬슬 위험해 보였다.
‘전하, 대체 왜 이러세요? 또 저를 골탕 먹이려고 따라오신 거죠?’
환장 직전에 입 모양으로 내뱉은 말을 그는 분명히 읽어 냈다. 그러곤 얄밉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었다.
잠깐, 저 표정.
내가 병아리 상태로 막말을 내뱉을 때면 곧잘 짓던 웃음 아닌가? 혹시…….
이 자식, 내가 병아리일 때 하는 아무 말을 알아듣나?
상식적으로 말은 안 되지만 이미 상식 밖의 일이 많이 일어난 상황에서는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황족 모독죄로 진작에 목매달지 않은 거지?
딱히 문제 삼을 생각도 없어 보이고…….
그냥 내가 너무 민감하게 생각한 건가?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내 의심은 여전히 유효했다. 앞으로 지켜봐야겠어. 으음!
“아이를 잘 보아 주시니 가문의 영광이옵니다.”
어머니는 드디어 정신을 차리신 듯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저희 신세는 비천하여 감히 과분한 은혜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 것과 같은 색의 눈동자가 절박하게 이쪽을 향했다. 아마도 황태자의 손아귀에서 나를 꺼내 오시려는 모양이었다. 흑흑.
그러나 클레멘츠는 고개를 저었다.
“이 만남을 그저 한때의 것으로 남겨 두고 싶지 않네. 그녀는 나와 함께 황궁으로 갈 것이다.”
“황송하옵…… 예?”
“예?”
“귀여운 딸을 잘 키워 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시해야겠지. 카시스!”
미처 닫히지 않은 문에서 붉은 머리의 번듯한 미남이 들어왔다.
“예. 옮겨놓도록 해라.”
그 뒤를 이어 하인들이 줄줄이 크고 작은 궤짝을 들고 들어왔다. 일부는 뚜껑이 열려 있어 내용물이 보였다. 보석, 금괴, 값비싼 옷감 등의 선물이었다.
“남작님, 이건 어디로 가져갈까요?”
큼지막한 에메랄드 목걸이를 들고 온 하인이 물었다. 간신히 서 있던 아버지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다시 기절해 버렸다.
“토머스!!!”
* * *
결국 부모님께 인사하겠단 효심 가득한 계획은 본전조차 찾지 못했다.
“대체, 왜 그러셨어요! 무슨 생각이셨던 거예요? 두 분이 뭐라고 생각하셨겠어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만.”
이 인간을 어쩌면 좋지? 눈 딱 감고 한 대만 치면 즉결 처형 감이려나?
“그런 식으로 본질을 흐리는 게 나쁘잖아요!”
클레멘츠는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이 자식…… 잘생기면 다인 줄 알아? 말문이 막히면 일단 웃어 놓고 넘어가는 막돼먹은 버릇은 언제 배운 거람!
“그럼, 뭐라고 둘러댈 셈이었지? 나름대로 도와준 거라고 생각한다만.”
그게 도와준 거였냐!
“다 생각이 있었단 말이에요. 계약 황궁 시녀 자격으로 따라간다고 할 거였는데…….”
“아, 그런 방법이 있었나.”
클레멘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는 듯 감탄했다. 그리고 일말의 후회도 느껴지지 않는 투로 덧붙였다.
“미안하게 됐군.”
익……. 이익! 으이이익!
자꾸만 주먹이 쥐어지는 손을 억지로 펴며 고민했다.
나 잘 생각한 게 맞는 걸까. 꼭 이 인간을 따라가야 하나? 왜 벌써부터 고생길이 눈에 훤하지?
“전하, 출발 준비가 다 됐습니다.”
우리가 앉은 마차 밖으로 카시스 듀프레 후작이 나타났다. 그의 붉은 눈과 마주친 나는 조금 움찔했다.
내가 벨라에게 말하는 동안, 클레멘츠는 나의 정체와 계약에 대한 내용을 카시스에게 이야기했다.
그는 클레멘츠의 둘도 없는 충복. 병아리를 황족에 준하여 섬기래도 순종하는 인간이었다. 인간이자 병아리인 소녀의 정체를 숨기라는 명령을 받아들이지 못할 리 없었다.
다만 고통 받는 건 내가 양심이었다. 원인 제공은 다 클레멘츠가 했지만, 어쨌든 그 결과 내가 저지르는 짓들은 카시스가 허겁지겁 수습했다.
나는 심지어 그가 정성들여 작성한 서류들을 찢어발기기까지 했다.
“…….”
그 역시 내 눈을 제대로 못 마주치는 건 마찬가지였다.
“저, 오필리어 님.”
“예……. 후작님.”
“알핀 소년에게 의심 없이 당신을 넘겨준 일, 후회하고 있습니다. 제 실수로 오필리어 님께서 위험에 처했습니다.”
아아, 이 시대의 살아 있는 선량함이여.
카시스가 아니었더라도 나는 어떻게든 위험해졌을 것이다. 백작가엔 내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 투성이였으므로.
“아니, 아니에요. 저야말로 후작님의 서류를 찢은 일, 정말 죄송해요…….”
“…….”
“…….”
“괜찮…… 괜찮습니다.”
안 괜찮구나.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죄책감에 몸부림치려니, 클레멘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출발하지.”
바퀴가 부드럽게 굴렀다. 이렇게 내 빙의 인생의 한 단락이 매듭지어졌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인 채로,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상태로, 어쨌든.
황태자의 마차는 혼우드의 대로를 지나, 수도까지 워프 포탈을 열어 줄 역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 * *
워프 포탈이 열리자 마차 바깥은 신비로운 푸른빛으로 가득했다.
“와아…….”
청마법의 꽃이자, 마탑이 양산한 기술의 정수. 그것이 펼치는 마력의 향연은 아름다웠다.
벨라도 같이 이걸 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리움과 아쉬움을 안고 바라보던 빛은 금세 사라졌다. 이번에는 아름다운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각양각색의 건물이 모인 시가지, 네모반듯하게 닦인 대로, 육각 결정을 본떠 높다랗게 지어진 교회 건물.
혼우드 시내보다 훨씬 컸고, 고층 건물이 빽빽하던 전생의 도시와도 달랐다. 이곳이 클라티아 제국의 수도, 클랏샤였다.
하지만 금강산 구경도 밥 먹고…… 아니, 잠은 잔 다음에 해야 하지 않던가.
마수에 쫓기고, 클레멘츠와 담판을 짓고, 벨라와 부모님과 작별하는 동안 내 몸은 녹초가 되어 있었다.
사람 꼴(?)을 하고 있을 때 즐겨 둬야 하는데! 그러나 몸은 언제나 의지를 배반했다.
[어린 새가 된 인간의 딸.]
누구한텐가 많이 들어 본 소린데.
가까스로 눈을 뜨자 새하얀 공간이었다. 아니, 새까만 공간인가? 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의아해하고 있으니 다시금 목소리가 들렸다.
[에반젤린의 딸 오필리어.]
그녀는 꼭 이 공간 같았다. 온전히 검은 한편 온전히 희었다.
흰 머리와 검은 머리가 반씩 섞였고, 한쪽은 흰 옷이고 한 쪽은 검은 옷이었다. 흰 피부와 검은 입술, 검은 흰자위와 하얀 홍채.
마치, 낮과 밤의 마물들이 하나로 합쳐진 듯한 모습이었다. 여전히 기괴했지만 그럭저럭 아름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가 한 몸으로 합쳐져야만 뒤싱겐의 눈을 피하고, 너의 꿈까지 들어올 수 있었어.]
[그러니까…… 메라와 닉타인 거죠?]
[그래.]
오, 이런 편법이?
낮과 밤의 마물들을 다시 만나자 며칠 묵은 원한이 눈을 떴다. 흥, 뭐 하러 일부러 내 꿈까지 찾아온 거지? 그것도 클레멘츠의 눈을 피해 가며 말이야! 합체까지 해 가면서!
[저주를 풀어 주려고 오신 건가요?]
당당하게 허리에 손까지 얹었다. ……어라? 이제 보니 손이 아니라 날개잖아. 꿈속에서마저 나는 도로 병아리가 되어 있었다. 내 몸 돌려줘요, 흑흑.
[그건 불가능해.]
낮과 밤의 마물 자매는 원래 말을 반 토막씩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던 그들이 합쳐지니 제법 제대로 된 말이 나왔다.
그 내용이 가차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왜죠!]
[너는 뒤싱겐의 저주에, 우리는 그의 명령에 묶인 처지니까.]
[……알고 있어요.]
그랬지. 주도권을 쥔 사람은 클레멘츠였다. 대체 왜 그렇게 병아리에 집착하는지는 몰라도, 당장은 벗어날 수 없었다. 1년 뒤에 풀어 주겠다는 약속이 그나마 내겐 최선이었다.
[그럼 대체 왜 온 건데요!]
만화 영화에서도 합체는 결정적인 순간에만 하지 않습니까. 예?
놀랍게도 흑백 합체 마녀는 우물쭈물했다. 양손의 검은 손톱이 서로 맞부딪쳤다.
혹시 합체하니까 없던 양심이 생기기라도 한 걸까?
[고의로 널 저주하지 않았어.]
[…….]
[모나한의 자손은 밤의 저주를 반겼지만, 너는 그렇지 않지. 저주가 완전히 옭아매지 않도록 흠집을 내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