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내 얘기 잠시 들어 줄 수 있지?”
“…….”
“어릴 때 읽었던 동화가 있어. 오래된 성에 저주 받아 야수가 된 남자가 살고 있었어. 어느 아름다운 아가씨가 야수의 성에 찾아가지. 아가씨의 아버지가 야수와 약속했기 때문이야.”
처음 듣는 동화였다. 그래서 기적이 일어났고, 사랑에 빠졌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류의 이야기였다.
“너는 더없이 아름다운 아가씨지만, 동시에 동화 속의 야수 같다고도 생각했어. ……그래서였나 봐. 내가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이야기에 너를 끼워 맞추려고 했던 건.”
숲에서 그녀는 물었다. 아가씨와 왕자가 함께하는 동화를 원하냐고. 문틈 새로 조곤조곤 들리는 건 그에 대한 대답이었다. 벨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높이를 따라 주저앉았다.
“사실 야수는 저주를 풀 마음이 별로 없었을 수도 있어. 아가씨가 성으로 찾아오지 않아도, 혹은 며칠 성에서 머무르다가 떠나도 괜찮았을 거야. 야수에게는 그만의 삶이 있었겠지.”
야수만의 삶. 그대로 괜찮은.
“아가씨도 마찬가지야. 야수는 저주가 풀리면 멋진 왕자님이고, 호화로운 성에서 살고 있지. 그러나 굳이 그의 신부가 되지 않아도 괜찮았을 거야. 더군다나 이미 호화로운 성에 살고 있는 아가씨였다면 말이야.”
작은 웃음기가 느껴졌다. 벨라는 제 입꼬리마저 조금 올라가 있단 걸 깨달았다.
“네 말이 맞아, 벨라. 오랫동안 나에게 이 세상은 동화 같았고, 소설 같았어. 주인공은 바로 너였지.”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구나.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겠니.
벨라는 안에서 웃었고, 오필리어는 밖에서 하지 못한 말을 삼켰다.
‘솔직히 말해 아직 이 세계의 주역은 너처럼 느껴져. 너에 의해 표현되고 받아들여지는 세계.’
“그렇지만 이제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으니까. 너에겐 너만의 이야기가 있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거야. 나에게도.”
“…….”
“벨라, 나는 황태자 전하와 황궁으로 떠나 있을 거야. 저주를 풀어야 하거든. 1년 동안.”
예상했던지라 별로 놀랍지 않았다. 오필리어가 없는 여름, 가을, 겨울, 봄. 당황스러울 만큼 낯설었지만, 지나고 나면 짧을 것이다. 여느 1년이 그렇듯이.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벨라. 내가 모르던 이야기라고 해서, 내가 원하지 않던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 내가 돌아오면 그땐, 진짜 너의 이야기를 들려줄래? 통속 소설만 읽던 내가 상상하지 못한 너의 이야기. 고귀한 아가씨이자 매력적인 야수인 너만이 펼칠 수 있는 이야기. 그럼 나는 그때 네 앞에서, 어딜 가든 네 눈엔 그저 실없고 바보 같았을 내 이야기를 털어놓고 웃는 거야.”
오필리어의 목소리는 아주 여리고 몽글몽글했다. 꼭 동화에 나오는, 지푸라기를 물레에 넣어 자아냈다는 금실 같았다.
벨라는 처음으로 그 목소리가 듣기 싫지 않았다.
“이제 네 시녀는 아니지만, 대신 친구라고 해 주지 않을래?”
……네가 아니면 대체 누굴 친구라고 부르겠어.
“네가 정말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자주 편지할게. ……답장, 해 줄 거지?”
익숙한 발소리가 점차 멀어져 갔다. 그 소리를 듣던 벨라는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문을 열어젖혔다.
오필리어가 서 있었을 법한 자리에 갈색 종이 봉투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안쪽엔 그 애가 맛있다고 노래를 불러 대던, 무슨 가로수 길 레몬 크림 파이가 한가득이었다.
손바닥만 한 파이 하나를 꺼내 베어 물었다. 아직 따끈따끈했다. 새콤달콤한 레몬 크림 향기가 입 안 가득 맴돌았다.
파이의 바삭한 겉면들 사이에 카드가 수줍게 숨겨져 있었다.
‘돌아올게.’
벨라는 카드를 다시 집어넣고 하나 더, 또 하나 더 먹어치웠다. 흰 손을 들어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닦아 냈다.
“……맛있어.”
* * *
혼우드의 레오라 가문. 변방 중의 변방.
간신히 ‘저택’이라 불러 줄 만한 규모의 건물은 십여 년 전의 유행으로 치장되었고, 그나마 군데군데 낡아 있었다.
먼 옛날에는 레오라 가문도 꽤 번성했었다. 넓은 봉토와 유능한 가신들을 거느리고, 훨씬 그럴싸한 성도 있었다.
그러나 유수 같은 세월에 권세는 흩어지고 재산은 산산조각 났다. 지금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황제에게 받은 남작 작위와 마지막 남은 저택만큼은 팔지 않은 채 겨우겨우 귀족의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레오라 가문의 저택에 귀한 손님이 왔다. 단란하게 아침을 먹던 레오라 부부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누군가 올 일이 있던가요?”
“글쎄, 우편물이 온 게 아닐까요? 늘 이 시간에 왔으니.”
“제가 나가 볼게요, 에반젤린.”
달칵 열린 문밖에는 뜻밖의 손님이 있었다.
“아버지!”
“우리 딸! 갑자기 무슨 일이니? 백작가 일은 어쩌고…….”
레오라 남작은 멈칫했다. 한참 눈높이가 낮은 딸 뒤로 그림자가 하나 더 드리웠다.
당당하게 큰 키에 기품 있는 모습을 갖춘 사내였다. 인간 같지 않은 아름다움은 무언가를 초월해 있었다.
한 공간에 존재하는 것조차 어색하게 느껴졌던 남작은 우물쭈물 물었다.
“누, 누구…….”
순간 번개 같은 깨달음이 남작의 머리를 스쳤다. 그는 이 젊은이를 본 적 있었다.
아주 옛날, 갓 남작위를 물려받은 그는 황제에게 충성 맹세를 하기 위해 머나먼 수도행을 떠났었다.
드디어 도착한 황궁은 황실의 영광스러움으로 가득했다. 알현실 앞에서 그는 유모의 손에 이끌려 나오는 황태자를 보았다.
그 순수한 은발과 보석 같은 눈동자는 눈앞에 보이는 것과 같았다.
“여보! 오필리어인가요? 또 누가 왔습니까?”
훌쩍 나이를 먹었지만 그 생김새가 틀림없었다. 남작은 사랑하는 아내의 말에 대답하지 못한 채 덜덜 떨었다.
“화, 화화, 황…….”
“앗, 아버지. 제발 진정하시고 일단 숨을 깊게 쉬어 보세요.”
“황? 손님이시면 문간에 세워 두지 말고요.”
황태자는 입을 열어 그에게 가벼운 사과를 던졌다.
“기별도 없이 방문해서 미안하군.”
평생 눈치만 보며 살아온 남작은 알았다. 그 목소리와 말투는 영락없는 지배자의 것이었다. 그 순간에 그의 몸이 기우뚱 뒤로 넘어갔다.
“토머스!”
볕 좋은 어느 봄날, 레오라 남작은 자택 현관에서 기절했다.
* * *
으아아! 이럴 게 뻔하니까 같이 오는 건 망설였던 건데! 이 몸의 아버지가 어디 보통 심약한 사람이던가?
다행히 클레멘츠가 재빠르게 움직인 덕분에 뇌진탕은 면했다. 아버지는 그의 팔에 연인처럼 안겨 있었다.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클레멘츠를 바라보자 그도 당황한 듯 조금 굳어서 받아쳤다.
“왜 그러지?”
왜 그러긴. 당신 때문에 남작님이 기절하셨잖아요.
애당초 클레멘츠 같은 귀하신 분이 왜 이런 누추한 집까지 따라오셨는지 모르겠다.
벨라와의 이야기가 끝나고…… 아니, 사실 열리지 않는 방문 앞에서 나 혼자 주절주절 떠들다 온 거였지만.
“마차가 대기하고 있다.”
복도 끝으로 가니 뜻밖에도 클레멘츠가 기다리고 있었다. 조용히 눈물을 줄줄 흘리다가 황급히 닦았다.
“저기 죄송한데요.”
“……또 뭐지.”
“마지막으로 딱 한 군데 더 들를 곳이 있어서요. 꼭 만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분위기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그는 내뱉듯이 캐물었다.
“누굴?”
왜 저러지? 하지만 이 주제에 있어 나는 누굴 상대로든 당당했다. 전생의 근본으로부터 올라오는 K-유교의 당위성이 나를 수호한다!
“설마 그 서점…….”
“당연히 부모님이시죠. 당연한 걸 물으시네요.”
“…….”
“부모님…… 중요하잖아요. 그쵸?”
왠지 말문이 막힌 것 같은 클레멘츠의 반응이 이해가 안 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기도 가야겠다며 나서지 않나. 급기야는 그 중요하신 부모님을 기절시켜 버리셨다.
“토머스! 괜찮아요?”
아침을 먹다 말고 뛰쳐나오신 어머니 쪽은 상황 판단이 좀 더 빨랐다. 클레멘츠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후 소박하기 짝이 없는 우리 식탁으로 정중히 모셨다.
되는 대로 구입했던 변변찮은 차를 우려 대령했다. 같은 공간에 앉아 같은 차를 마시고 있지만 클레멘츠가 있는 부분만 마치 가위로 잘라 이어 붙인 듯 섞여 들지 않았다. 그에게 익숙해진 나도 이렇듯 어색한데, 부모님이 느낄 괴리감은 얼마나 크겠는가.
‘여기로 올 수 있는 귀한 손님’의 최대치인 모나한 백작 오십 명을 모시는 것보다도 부담스러운 상황.
간신히 정신을 차린 레오라 남작님, 우리 아버지는 여전히 달달 떨고 있었다.
“저어, 황태자 전하. 황공하오나 이렇게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인지…….”
“본론이 늦었군. 귀댁의 영애와 관련한 건일세.”
“오, 오필리어 말씀입니까?”
찰칵, 찰칵. 레오라 내외의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지고 있었다. 곧 죽어도 연관 없을 것 같은 나와 클레멘츠 사이의 연결 고리를 드디어 찾아낸 듯싶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시찰을 나오셨고, 그분은 당연히 혼우드에서 가장 번듯한 모나한 백작가에서 묵으신다.
그리고 우리 가엾은 딸 오필리어는 모나한 백작가에서 일한다!
부부는 사색이 되어 있었다. 만약 황태자에게 무례를 저지른 거라면 그들의 힘으론 딸을 지킬 수 없으니.
“우리 딸이 백작가에서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나, 나쁜 마음을 품을 아이는 아닙니다만…….”
실수요? 어디 실수뿐이겠습니까…….
클레멘츠가 방문한 불과 며칠 새 내가 저질러 버린 일들을 대체 뭐라고 설명한담.
“안심하게, 그런 건 아니니.”
골머리를 앓던 나 대신 클레멘츠가 대답했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레오라 일가는 오히려 더욱 얼어붙었다.
“그럼…….”
“오필리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목소리였다. 이렇게 다정하고 부드러울 수가. 마치 조그만 가시 하나라도 없는지, 상하게 할 만한 모난 구석이 없는지 한참이나 살피고 다듬어 건넨 물건 같았다.
“네, 넷?”
그 목소리로 부른 건 분명 내 이름이었다. 여기에 다른 오필리어는 없었고, 수도에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기니 갈수록 태산이었다. 뭐냐고, 저 눈빛!
사실 익숙하긴 했다. 내가 병아리 상태로 삐삐거리고 있으면 그는 곧잘 저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인데? 징그럽게 다 큰 어른인데?
이쪽으로 쏟아지는 한없이 긍정적이기만 한 감정을 감당할 수 없었다. 윽, 눈부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