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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32)화 (32/218)

32화

[랜니스, 동남쪽의 연못 덤불에는 없어.]

[랜니스, 북쪽의 인동 정원에도 없어.]

[서쪽의 안개 숲에도.]

[랜니스, 못 찾았어.]

[랜니스.]

숲속에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들까지 총동원되었다.

[살아 있는 인간도, 시체도. 금발의 인간 계집애 시체는 숲속에 없어.]

[흩어진 것도, 온전한 것도 없어. 오늘은 숲속에서 인간이 죽지 않았어, 랜니스.]

죽지는 않았어. 그 말에 그녀는 한숨을 돌렸다. 어디 또 엉뚱한 데 박혀 있는 건가?

[그 겁 없는 녀석이 또 숲으로 들어올지 몰라. 너희도 명심해. 앞으로 금발의 조그만 인간 여자애는 절대 죽이면 안 돼.]

[알았어, 랜니스.]

[랜니스의 말이야. 금발의 조그만 인간 계집애는….]

[죽이지 말래.]

‘목소리’가 수런수런 퍼져 나갔다.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 채 여전히 마수들 사이에 군림하던 여자는 소리쳤다.

[죽였다간 나한테 죽게 될 줄 알아!]

그랬는데, 지금 저건.

형태는 분명히 마수. ‘목소리’를 가진 그녀의 친구들 중에 하나였다. 그런 주제에 감히 오필리어를 위협하고 있었다.

아무리 저 바보가 요행히 외운 주문 탓에 끌려 나왔다곤 해도, 해칠 생각만큼은 절대 안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분명히 명령했잖아!’

저 규율 없는 마수는 조심성 없게 갈고리 발톱을 뻗어 오필리어의 머리칼을 만졌다.

‘발톱! 어디 저런 날카로운 걸 들이미는 거야!’

[금색 머리채…….]

공터와 숲의 경계에 숨어 지켜보는 흑표범의 앞발에는 작은 금 사슬이 걸려 있었다.

시녀가 저택에 돌아왔단 얘기는 들었지만, 넋 나간 표정으로 또 홀랑 백작가 대문을 나섰대서.

또 실종돼서 사람들을 곤란하게 하면 안 되니까 한번 찾아본 것뿐이었다. 팔찌도 엄연한 금품이니까 아까워서 찾은 것, 그뿐이었다.

[몸집도…… 작아. 랜니스가 먹지 말랬지만…….]

[……지만?]

흑표범은 일어섰다. 아무리 봐도 저건 헛된 생각을 품었다. 아가리를 찢고 발톱을 뽑아 버려야 해. 두툼한 어깨를 긴장시키며 달려 나갈 태세를 취했다.

달려 나가서…….

‘어라?’

어떻게 하지?

저 아가리는 흑표범인 저를 레오라와 한 번에 삼킬 만큼 컸다. 발톱은 제 것으로 아무리 할퀴고 뭉개 보았자 흠집도 안 날 듯했다.

그동안 마수들은 흑표범이 그녀라는 이유로, ‘랜니스’라는 이유만으로 조건 없이 복종했다. 그 복종이 이뤄지지 않을 때는 어떻게 벌해야 하는가? 그녀가 변한 모습은 평범한 흑표범이었다. 날쌔고 용감하고 발톱이 매서울 뿐인.

‘이럴 때가 아닌데. 뭐라도 해야 해. 가서 소리라도 지르면 제가 잘못한 줄 알겠지.’

그러나 소리를 지른 건 오필리어가 먼저였다.

“꺄아아아악-!!”

어느 때보다도 길고 높게 울리는 비명에 흑표범은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꼭 이럴 때 저 목소리를!’

오필리어의 목소리는 들을 때마다 미미한 불쾌감을 가져왔다. 꼭, 노곤노곤 잠들고 있을 때 자꾸만 일어나라고 콕콕 건드리는 손길 같달까. 소리가 크고 높아지자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골이 울리던 걸 추스르며 일어나니…….

‘……!’

문제의 마수는 그 목소리에 흑표범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은 모양이었다. 삶을 이어 오며 쌓아 온 마수의 정기, 마기가 가슴에 달린 입으로 매섭도록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흉측하고 오래 묵은 만큼 마기의 양은 웬만한 마수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저거, 왜 못 움직이고 있는 거야?!’

쓰러진 오필리어는 삼킬 듯 끼쳐 오는 남색 구름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죽고 싶은 거야?!’

저 바보, 저 바보. 저 바보!

흑표범은 우선 소녀를 구출할 생각을 했다. 일단 끌어내자. 등에 태우고 달리면 저 마기로부터 살려 낼 수 있겠지. 그다음 저 더럽게 말 안 듣는 일탈 마수와 어떻게든 끝장을 보자. 어떻게든.

흑표범은 뛰쳐나갔다. 숲을 벗어나 공터로. 그러나 그 뜀박질은 소녀에게 닿기 한참 전 멈춰 서고 말았다.

‘황태자?’

왜 하필 저자가 지금 나타나지? 그러고 보면 오필리어를 백작가까지 데려다준 것도 바로 저 남자랬다. 떨떠름함과 의아함도 잠시였다.

‘……!’

그자가 보여 준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힘이었다.

‘인간이 아니야.’

처음 든 생각은 그랬다.

‘그리고 마물도 아니야. 마수는 더더욱이 아니야.’

그렇지 않고서야, 마수가 지르는 저 끔찍한 비명을 아랑곳 않고 녹여 버릴 순 없을 테니.

시야 전체가 은빛으로 수놓아졌다. 터무니없는 거대함을 앞에 둔 느낌이었다. 너무도 압도적인 힘 앞에 흑표범은 무릎을 꿇었다.

거부할 수 없는 생리적인 반응이었다. 허리 굵은 참나무 뒤편에 앞다리를 모으고 주저앉았다.

서부의 숲 전체를 제집처럼 누비던 튼튼한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그와 동시에 한 가지 생각이 뚜렷해졌다.

저자가 오필리어를 구했다. 거역할 수 없는 힘을 펼쳐 내 그 아이를 죽음의 손아귀에서 건져 냈다. 자신이 아닌, 저 남자가.

만일 황태자가 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제 빠른 다리로 오필리어를 마기에서 구해 낼 수는 있었다. 하지만 다음은?

‘랜니스’의 명을 무시한 마물을 어떻게 벌했어야 하나? 아무 힘도 없는 조그만 바보를 감히 삼키려 한 아가리를?

답은 아득한 어둠 속에 있었다.

“아주, 아주 오래된 사람의 생각이 네 안에 들어 있대.”

“……랜니스!”

오필리어가 말한, 아주아주 오래된 사람. 그는 마수들이 부르는 ‘랜니스’일 테고. 또한 그녀의 꿈속에 나오는 더러운 그림자였을 것이다.

당시의 ‘랜니스’에겐 힘이 있었으리라. 마수들을 굴종시키고, 수백 년이 지난 뒤까지 그들의 기억에 남을 힘이.

그렇다면, 벨라루시아 레우니스 모나한은?

상념에 빠져 있는 동안 황태자는 바보 녀석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흑표범은 모아 둔 앞발 사이로 머리를 파묻었다.

오랫동안 그녀에게 숲과 어둠이란 자유 그 자체였다. 저택에서와 달리 자신을 반기는 ‘목소리’들이 너무도 소중했다.

그래서였다. 어째서 그들이 자신을 알고 제 명령을 따르는지, 왜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 생각은, 그 사람은 네가 아니야. 너는 다른 사람이야.’

그 바보가 옳았다. 그녀는 흑표범 벨라였다.

[……바보.]

그르렁대는 맹수의 소리는 어딘지 슬펐다. 까마득한 예전의 무섭고 소름 끼치는 존재는 분명 자신의 안에 있었다. 그 집념, 그 원통함, 그 잔인함까지.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토끼 한 마리 죽이지 못했다. 여리고 약한 것을 보면 봄날 아지랑이 같은 금빛이 떠올라 이를 세우지 못했다.

뒤싱겐의 성을 가진 그 남자를 해치고 싶었다. 내면 깊숙한 곳의 충동이었다.

‘하지만 말렸잖아. 오필리어가.’

언제나 네 뜻대로 하라던 바보가 그렇게 간절히 말린 일이었다. 제정신으로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고작 작은 짐승이나 집에 방문한 사내 정도 해칠 수 없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벨라는 심지어 오필리어를 먹으려던 마수에게마저 무엇도 할 수 없었다.

힘이 없어서? 혹은, 친구 삼아 온 ‘목소리’들과 같은 종족이라서 망설이기라도 했나?

뭐든 상관없었다. 남는 건 냉정한 진실이었다. 자신은 맹수도 마수도, 온전한 인간도 아니었다. 그리고 오필리어 레오라 하나 지키지 못할 만큼 무력했다.

어떻게 방으로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벨라루시아는 밝은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주저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벨라, 일어났어? 나 오필리어야.”

그 아이였다. 어젯밤 무사했구나. 그 남자가 아직 저주를 덮어씌우지 않은 건가?

문으로 다가서던 벨라루시아는 멈칫했다.

그녀는 자신을 알았다. 막상 이 문을 열고, 그 아이를 마주하면.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신기할 정도로 날카롭게 갈아 쏟아 내고 말 것이다.

벌써 목구멍까지 올라온 것들이 한가득이었다. 이 바보야 넌 대체 어디까지 바보일 생각이야,

혹은…….

제정신이야?

안 그래도 황태자를 좋아하는데 이제 그가 너를 구해 주기까지 했구나.

암만 저 애가 미운 말도 곱게 듣는 재주가 있다 해도, 여기서까지 모질게 말하면 또 울지 모른다. 그건 싫었다. 그러면서도 너무도 화가 났다.

……화가 난 건가?

“미안해. 시장에 간다고 하니까 다들 나한테 뭐 하나씩 부탁해 가지고. 걱정했어, 벨라?”

“걱정? 별일이네. 아니, 나는 화났어.”

그동안, 오필리어의 걱정했었냔 물음에 그녀는 전부 ‘화난 거다’라고 답했다.

그게 아니었다. 자신은 언제나 저 녀석을 걱정하고 있었을 뿐이다. 벨라루시아는 충격에 우뚝 멈춰 섰다.

그럼, 걱정이면? 어떻게 하면 되지? 오필리어처럼 말해야 해. 걱정했다고 할 때 쟤가 어떻게 말하더라?

“떠나기 전에 너와 할 이야기가 있어.”

떠난다고?

뭔가 우물거리려던 입이 일자로 다물렸다. 벨라는 멍청하게 활쏘기로 황태자에게 내기를 건 것을 기억했다. 멍청하게 져 버린 것도.

다만 그것이 너의 의사라면, 오필리어.

그냥 나와 같이 이 혼우드에 머무르자. 욕심만 많고 멍청한 오라비가 지배하는 시골에. 네가 좋아하는 반짝이는 드레스나 귀족들의 다회나 미남들도 영영 없을 곳에서. 괴팍한 나의 비위나 맞추면서 평생 살아 줄래? 이따금씩 음침한 숲속으로 흉악하게 생긴 내 친구 마수들을 구경하러 나가자. 물론 나는 황태자 같은 힘은 없어서 그들이 딴마음을 먹어도 널 수월히 지켜 줄 수는 없어.

성대가 사라진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벨라, 안에 있는 거 알아. 문 좀…….”

문을 두드리던 손이 멈추었다. 벨라는 깜짝 놀라 소리가 나던 부근으로 손을 뻗었다. 이내 스르륵, 문을 기대고 미끄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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