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
나는 물었다.
“네가 필요하다.”
그가 대답했다. 그 말에는, 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심장이 덜컹거리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제가요? 왜…….”
떨리던 목소리가 멎었다. 아, 그건가.
반려동물을 들이는 건 중요한 문제다. ‘바로 이 아이가 내 아이!’라는 직감이 들었다면 그 아이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다 똑같아 보여도, ‘걔보단 옆에 있는 얘가 더 튼튼하고 순해 보이지 않아?’라고 물어도, 한번 꽂힌 개체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거다.
아마 클레멘츠에게 내 병아리 모습이 그런 느낌이 아니었나 싶다.
“제가 거래에 응하지 않으면요?”
“내가 추가로 건 밤의 저주는 풀어 주겠다. 나머지는 애초에 네가 알아서 할 일이었지.”
결국 거부할 경우 낮에는 계속 병아리로 살게 된단 얘기였다. 그 저주를 언제 풀 수 있을지 기약도 없이. 난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관대한 황족으로서 선량한 백성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실 생각은 전혀…… 없으신 건가요?”
“조건 없이 그냥 풀어 주면 네가 날 따라오겠느냐?”
야비해! 비열해! 치사해!!
결국 저주로 발을 동동 구르는 내 약점을 붙잡고 흔드는 셈이었다. 차마 면전에 대고 욕할 수도 없어 주먹만 쥐고 파들거리고 있으려니, 그가 나를 데려다가 책상에 살살 앉혔다.
“그러니 너를 붙잡은 값 정돈 직접 요구할 수 있게 해 주겠단 거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보는데.”
클레멘츠는 깃펜에 직접 잉크를 찍어 종이 위에 적어 내렸다.
“첫 번째는 이게 어떤가. 약속한 1년이 끝나면, 나는 반드시 네게 걸린 모든 저주를 영구히 풀어 준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백작가에서도 몇 년간 노력했지만 벨라의 저주를 풀지 못했다.
자칭 마법사나 주술사라는 사람들이 다녀갔다. 상당수는 벨라가 직접 쫓아내긴 했지만, 개중에 진짜가 몇 명이나 있었을까.
나도 절박한 나머지 소환술을 시도해 봤지만 거의 엉터리였다. 그런데 1년 만에 깔끔하게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조건이라.
그는 내게 깃펜을 건네주었다. 나는 반신반의하는 상태로 그 밑을 채워 넣었다.
[1년 동안 레오라 남작 가문에 월 20만 크로나를 지급할 것.]
[필요하거나 내가 원할 경우, 언제든 인간 형태로 있을 수 있게 해 줄 것.]
[비록 병아리로 지내겠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도록 최대한 자유를 보장할 것.]
[최선을 다해 내 건강과 안전과 명예를 지켜 줄 것.]
20만 크로나는 내 시녀 봉급 외에도, 집에서 이 돈 저 돈 털어 달마다 겨우 모으는 금액의 10배였다.
계약 기간 동안 그 돈을 받으면 당장 집안의 재정 위기를 극복하고 한동안은 맘 편히 살 수 있을 터였다!
슬쩍 눈치를 보니 클레멘츠에겐 이 정도야 껌 값인 듯했다. 저 무덤덤한 반응이라니……. 0을 하나 더 붙일걸 그랬나? 그럴 공간이 있나?
글자 사이를 뚫어져라 보다가 그만두었다. 돈 버는 일엔 젬병인 부모님이었다. 갑자기 그런 큰돈이 주어진다고 마냥 좋은 일만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딱 엑스트라의 분수에도 맞고. 1년간 병아리 하는 것도 뭐…… 이를테면, 고액 알바인 셈 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이건 고액 꿀 알바인 것이다. 하는 거라곤 특식을 쪼아 먹고 졸거나 애교를 떠는 것뿐인. 그것도 번쩍거리는 황궁에서 미남 얼굴 감상을 실컷 할 수 있는 꿀 알바.
비록 1년 동안의 인권을 맞교환해야 하는 조건이었지만……. 나는 쓰디쓴 입맛을 다지며 부모님을 생각했다. 어머니 아버지, 제가 돈 벌어 올게요!
“다 적은 건가?”
클레멘츠는 하단에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선언과 서명을 했다.
“출발은 내일이다. 챙길 것들이 있으면 미리 챙겨 놓아야겠지.”
“아…….”
그가 완성된 계약서를 가져가자 그제야 떠나게 됐다는 실감이 들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비록 1년 기한이긴 하지만, 혼우드를 완전히 떠나 있는다고? 빙의한 뒤로 단 하루도 떠난 적 없는 동네를.
내가 읽은 소설과는 이제 다른 세상이었다. 벨라는 떠나지 않고 남는다. 그녀에겐 이제 오필리어라는 시녀가 없다.
우리는 같이 떠날 수 없었다. 8년간 그려 왔던 청사진은 완전히 틀렸다.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숲에서 나를 향해 말하던 벨라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예물 팔찌를 화살에 매달던 때의 굳은 입매도.
“왜 그러지?”
“전하, 좀 더 시간을 주실 수 있으신가요? 이야기할 사람이 있어요.”
“또, 벨라루시아 모나한인가?”
“……네.”
어떻게 안 걸까? 클레멘츠는 조금 차가워진 투로 말했다.
“황궁으로 떠날 동의를 얻는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만.”
“네? 그게 아니에요. 물론 그 얘기도 해야겠지만…… 아직 둘이서 할 말이 남아 있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끝일 리 없었다. 벨라는 그날 그렇게 갔지만, 찾아가면 내 사과를 들어줄 것이다. 어쩌면 늦었다며 화를 낼 지도 모른다.
8년을 함께해 왔으니, 1년 정도 떨어져 있는다고 나를 잊지도 않을 것이다. 분명 벨라는 나 같은 시녀는 이제 필요 없다고 했지만.
……시녀가 아닌, 오필리어 레오라마저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곤 한 적이 없다.
* * *
어김없었다.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커다란 눈에 물기가 떠올랐다. 시시각각 미세한 표정을 담으며 생동하는 얼굴이 한껏 가라앉았다.
대체 그놈의 벨라루시아 레우니스 모나한이 뭐길래.
“벨라루시아 아가씨는…… 감정에 서투르지만 누구보다도 순수하고 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에요.”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잊지 않고 변호하는가 하면, 저를 해할 생각인 줄도 모르고 손바닥에 올라타 방방 뛰기나 하고. 그깟 화살 한 발을 찾으러 온 숲을 누볐다.
제 주인에게 찰싹 붙다 못해 한데 묶이다시피 한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상한 직감이 들었다.
그가 숲속에서 그 작은 병아리를 마주치던 순간은, 벨라루시아 모나한이라는 존재가 전제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그런 종류의 터무니없는 직감이었다.
인간 자체는 참신했다. 충만한 마력과 필요 이상의 과격함. 보기 드문 활 실력이며 밤이면 흑표로 변하는 저주까지.
혹, 병아리가 먼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그쪽을 흥미로워하는 데 조금은 시간을 보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오필리어를 온전히 그의 선 안으로 들이기 위해 떼어 놔야 할 사람일 뿐이었다.
알핀이라는 시종은 굳이 추궁하지 않아도 바들바들 떨면서 죄를 고백했다.
클레멘츠는 차갑게 분노했다. 시종에게 내렸던 상을 도로 몰수하고 가벼운 형벌을 내렸으니, 다음은 그 주인의 죄였다.
모나한 백작이 감히 제 병아리를 죽이려 했다. 그 사실을 듣자 반사적으로, 속속들이, 모나한을 멸문시킬 계획이 떠올랐다.
오래된 귀족 가문치고 실각당하고도 남을 만큼의 죄를 쌓지 않은 곳은 없었다. 특히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영주가 앉아 있는 경우엔 더 쉬웠다.
식솔은 뿔뿔이 흩어지리라. 영주와 그 식구는 남의 종이 되며 저택은 헐값에 팔리리라.
……그러나.
저토록 이 집 영애를 생각하는 오필리어가 그런 결말을 반길 리 없었다.
그래서 계획은 조금 수정되었다. 약간의 시일이 걸리겠으나, 셀레우시스 아메시트 모나한만큼은 철저히 파멸하리라.
아무런 희망도 남기지 않고 잔인하게 부술 것이다. 그치와 같이 욕망을 알기 쉬운 부류도 없었으니,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어려운 건 다시, 그의 눈앞에 있는 소녀였다. 그는 선뜻 예전 주인을 만나고 오라고 할 수 없었다.
만일 둘의 대화가 잘 풀린다면. 그래서 그가 줄 수 있는 모든 이점에도, 오필리어가 다시 여기에 남기를 택한다면?
클레멘츠는 그에게 필요하다고 느꼈다면 얻고야 마는 이였다. 자신을 매력적인 협상 상대로 만들었으며, 가진 것들을 미련 없이 털어 던졌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다. 만일 벨라루시아 모나한이 잡는다면, 오필리어는 남을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 불안을 남겼다. 불안은 찰나의 욕망을 피워 냈다.
너희는 이미 끝났다고. 백작 영애는 너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예물을 버리고 떠난 걸 네 눈으로 보지 않았냐고.
그렇게 말해 버리면 그녀는 금세 기가 꺾여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건 꼭, 보드라운 솜털을 가진 병아리를 눌러 다치게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저 아이를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왜 다치도록 내버려 두지?”
“당신은 안 그러겠다고 맹세할 수 있나요?”
벨라루시아 모나한이 한 말들 중, 오로지 그 한마디만이 오랫동안 귓전에 웅웅거렸다.
‘그리고 그런 얕은 수작은 의외로 통하지 않겠지.’
오필리어 레오라는 그의 말에 휘둘려 자신의 답을 잃어버릴 사람이 아니었다.
옆에 붙잡아 두어도 벗어나고, 도망치고, 또 벗어나던 모습이 떠올랐다.
숲에 버려진 예물을 고집스레 찾아다녔다. 포기해야만 하는 시점에조차 끝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건 물건일 뿐’이니, 아직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다고.
그런 굳은 의지를 붙잡아 둔 건 그가 아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계약, 그녀가 스스로 동의하여 채운 사슬뿐이었다.
이러니 내가 가진 어떤 새장으로 너를 가둘 수 있을까.
그는 체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오필리어 레오라가 심부름을 갔다가 사라진 날. 벨라루시아는 흑표범으로 변하자마자 혼우드의 숲으로 뛰쳐나갔다.
마을이고 저택이고 아무리 수색해도 없었으니, 남은 건 숲이겠지.
‘숲에는 아가리가 많아.’
그녀와 같은 표범의 것일 수도 있었고, 어쩌면 곰, 어쩌면 늑대. 하나같이 자그마해 빠진 레오라보다 몇 갑절은 큰 것들이었다.
그중에 어떤 아가리라도 오필리어를 물었으면, 내가 그 아가리를 찢어 줄 거야. 어떤 발톱이라도 그 애를 할퀴었으면 내가 그 발톱을 죄다 뽑아 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