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눈을 뜨니 조용하고 평화로운 밤이었다. 등 뒤로 느껴지는 침대는 푹신하고, 공기는 쾌적했다.
무지막지하게 생긴 괴물, 무책임한 마법 책, 지독한 안개라든지 피비린내도 없었다.
다만 한 사람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변했었냐는 듯 그 눈은 또다시 단단하고 차가운 자수정 빛이었다. 빈틈없이 올려 맨 크라바트 덕에 문신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난 긴장감 없이 중얼거렸다. 아…….
“또 이 화상이네…….”
그는 조용했다. 아니, 그의 눈동자 안에서는 자그만 빛이 반짝였다.
“사람은 독하지만 저 눈만큼은 참 예쁘단 말이야.”
“…….”
표정이 이상했다. 찡그린 것도 아니고, 웃는 것도 아니고.
“짜식, 뭐 잘못 먹었냐?”
“……하.”
아무리 로판 남주라지만 할 줄 아는 말이 ‘하.’밖에 없어서야 되겠는가. 안 되겠다. 저게 제정신이 맞는지 날개 싸대기 공격이라도 해 봐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치켜든 날개는 날개가 아니었다. 쫙 벌어진 내 손과 클레멘츠를 번갈아 보았다. 내 얼굴에서 핏기가 빠지는 게 느껴졌다.
“저녁은 아직이다. 덕분에.”
젠장!
“아니 전하, 그게요…….”
“뭐지.”
“서, 설마 제가 병아리일 때 항상 전하께 이런 불손한 생각을 품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와, 이 상황에 이보다 멍청한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아무 생각 없던 사람에게도 한 번쯤 의심해 보시라며 전단지를 들이대는 꼴이었다.
그걸 아는지, 클레멘츠도 차가운 웃음을 머금었다. 나는 미끄러지듯 침대에서 기어 나와 꿇어앉았다.
이게 다 너 때문이긴 하지만!
“목숨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그는 옆에 마련된 의자를 가리켰다. 생각보다 그렇게 화가 나진 않은 걸까? 쭈뼛대며 앉아 있으려니 대뜸 이런 소리가 들렸다.
“사과하지.”
“예?”
“미안하다.”
? ??
나 같은 을의 인생이 그와 같은 슈퍼 갑의 사과를 받다니. 이 순간 손에 녹음기가 없다는 게 한탄스러웠다. 있었다면 그에게 들이밀면서 ‘방금 뭐라고요? 다시 한 번만 말씀 좀…….’이라고 할 텐데.
“너의 의사와 상관없이 저주를 내렸지. 그것이 너를 궁지로 몰았다.”
이렇게 쉽게 인정할 줄이야. 얼떨떨했다.
“너를 구한 건 내 행동에 책임을 진 것뿐이니 빚으로 여길 것 없다.”
“감사합니다……?”
가끔 그는 놀랄 만큼 관대해지는 것 같다. 내가 뭐라고 해야 하는 걸까. 그래요, 님이 좀 너무했어요! 그러니 빨리 이 빌어먹을 저주 좀 풀어요, 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비천한 시녀답게 그저 그가 베풀어 준 사과와 은혜에 감지덕지해야 하나?
“내 동물이 되느니 마수의 밥이 되는 편이 나았느냐?”
그는 미미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발끈했다.
“그럴 리가요! 저는 배블핏츠를 소환해 저주에서 벗어나려고 했어요!”
“이 영령 말인가.”
그는 내가 버리고 온 책을 펴서 보여 주었다. 소환 현장에서 친히 주워 오신 모양이다. 높으신 분께서 쓰레기 무단 투기를 문제 삼으려는 건 아닌지 살짝 움츠러들었다.
다행히 그건 아닌 듯했다. 그는 무슨 외계어처럼 들리는 말을 중얼거렸다. 낮고 오묘한 어조로.
“……απαντήστε.”
자세히 들어 보니 내가 배블핏츠를 소환한답시고 지껄인 주문과 비슷했다.
“네가 원래 외웠어야 하는 주문이다.”
“말도 안 돼요! 그 둘이 어떻게 같은 주문이에요?”
아, 내 뒷목!
“그렇게까지 발음과 억양이 다르다면, 차라리 제국어로 옮겨 적지 않았어야 하잖아요!”
“네 말이 맞다.”
“저자 누구예요? 진짜, 만나기만 해 봐라.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내가 아는 사람이다.”
예?
놀란 나머지 차분해진 머릿속에서 놓치고 있던 정보가 정리되었다.
저 엉터리 책의 저자는 샹그리아 가문 사람. 그리고 클레멘츠의 어머니였던 전 황후 역시 샹그리아 가문이었다.
그렇군……. 얼굴 한번 본 적은 없지만, 사람을 화나게 하는 능력을 보아 두 사람은 친척임이 확실했다.
“마력이 없으면 소환은 성립되지 않는다. 보통 고대어를 모르는 사람은 마력 역시 운용할 줄 모르지.”
“…….”
“아나스타시아는 너 같은 유형의 교집합이 발생할 줄은 몰랐던 거다.”
그런 거였다니.
“자질 있는 마법사라면 도움을 얻을 테고.”
“일반인이라면 제국어로 된 주문을 보고 ‘앗, 이거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라는 느낌에 책을 지르겠죠. 기대에 부풀어 따라 해 봤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요.”
“질러?”
“홧김에 산다는 뜻이에요.”
곱게 자란 황태자께선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만큼 네 목소리가 희귀하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목소리 하나로 소환을 이루다니. 아나스타시아도 직접 보기 전엔 믿으려 하지 않겠지.”
결국 난 두 유형의 독자를 아우르려 한 저자의 전략에 희생당한 셈이었다.
우연히 목소리에 마력 조금 가지고 있었던 죄로.
“아시는 분이니까 뭐라고 좀 해 주시겠어요? 정말 위험했다고요!”
“그래, 절판시켜 버리마.”
예?
“그, 그렇게까지요?”
“사흘이면 수도에서 이 책을 볼 수 없을 거다. 제국 전역에서 사라지는 것도 열흘이면 충분하겠지.”
“그럴…… 필요는 없다고…… 하하. 보여집니다만.”
“네가 위험했잖으냐. 그녀도 그 정돈 감수해야겠지.”
가만 보면 클레멘츠는 참 극단적인 데가 있었다.
“그냥 제국어 표기 부분을 삭제하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 책은 이미 교단의 검열로 반 정도는 난도질당한 상태였다. 내가 마수를 소환한 건 전문가들도 예측 못 한 확률로 일어난 사고였다. 그 탓에 어쨌든 열심히 썼을 책 자체가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왠지 안쓰러웠다.
내 표정을 본 클레멘츠는 다른 이야길 꺼냈다.
“그 남색 안개는 마수의 몸 안에서 묵은 마기다. 목소리 외의 마력에 노출된 적 없는 네가 접하면 사지가 마비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어쩐지 말을 돌리는 것 같은데.
눈을 가늘게 떠 봤지만. 클레멘츠는 반질반질반질반질한 얼굴로 그림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무슨 문제라도?’라는 듯한.
“그럼, 전하께서는…….”
그 짙은 마기에 왜 아무런 영향도 안 받으신 거죠?
마법 그 자체인 뒤싱겐의 피가 혈관에 흘러서?
주문 한마디 없이 땅을 가르고 마수를 무찌르신 것도, 제가 모르는 황족의 능력인가요?
아니면, 아니면…….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도 좋다.”
“그, 혹시, 정말 외람된 말씀인 건 아는데요.”
그는 오들오들 떠는 내 모습만 보고도 질문을 짐작해 냈다.
“나는 인간이다. 대답이 되었으면 좋겠군.”
더 이상의 대답은 없었다.
그는 이 화제를 피하고 싶을 것이다. 황실의 후계자는 교단의 승인이 있어야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악마니 뭐니 하는 건 예민한 주제였다. 잘 모르는 내게 섣불리 할 얘기가 아니었다.
혼란스러웠다. 이런 내용은 소설에 나오지 않았다. 무사히 2부를 읽었더라면 이렇게 답답하진 않을 텐데.
곁눈으로 힐끔 그를 보니 여전히 달빛을 빨아들인 듯 빛이 났다.
분명 인간이지만 어딘가 인간 같지 않은 느낌. 달이 뜨는 밤이면 더 짙게 느껴지는 이질감.
클레멘츠에게는 분명 생각보다 많은 비밀이 있었다. ‘뷰티 앤 더 비스트’의 애독자로서 그 베일을 벗겨 내고 싶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호기심은 여기서 그쳐야 했다.
그는 수도 클랏샤로 돌아가고, 난 여기 남을 것이므로.
그동안 20세 이후의 내 삶의 무대는 당연히 수도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결국 혼우드의 오필리어 레오라가 있을 곳은 여기였다.
저에게 원래의 삶을 되돌려 주세요. 그렇게 부탁할 셈이었다.
“오필리어, 제안할 것이 있다.”
“전하.”
그런데 그의 말이 더 빨랐다.
“정식으로 내 병아리가 되어 주지 않겠나.”
“네? 싫어요!”
클레멘츠가 고운 얼굴로 돌아 버렸단 걸 깜빡했다.
병아리를 향한 그의 어처구니없는 집착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던가!
“아직도 그 말씀이신가요? 전하! 대체 그깟 병아리가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그런 게 없어도 전하께선 완벽한 황태자시잖아요.”
말하다 보니 화가 났다. 암, 나는 화가 날 만도 했다.
“저는 그저 저주를 풀어 주시란 부탁밖에 드릴 말씀이 없어요. 혼우드가 좋지는 않으셨겠지만 안녕히 가시라는 말씀이랑요.”
설령 이 자리에서 그가 다시 마물을 불러내 저주를 건다 해도- 아니, 어쩌면 그런 식의 최악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더 겁 없이 말을 꺼냈다.
“병아리가 좋으시다면 제가 몇 마리 가져다 드릴 테니까요. 네?”
“아니, 너여야만 한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대체 어째서죠? 제 신세를 농락하고 조롱하는 게 목적이신가요?”
“……아니야.”
그의 목소리는 조급했다. 그 목소리에 붙잡혀 얼굴을 보니 왠지 조금쯤 상처 입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 이래, 그럴 리가 없잖아. 이 남자에게 나는 정말로 그냥 병아리 한 마리만큼의 무게밖에 없으니까.
눈치 없게 들썩이려 드는 자의식 과잉 상자를 한 대 걷어찼다. 그 기세로 그의 방을 나가 버리려고 했다.
“명령이니 멈춰라. 레오라 가문의 오필리어.”
아, 이런 식으로 명령하면 내게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까?
울분을 참으며 고개를 돌린 순간, 눈앞에 내밀어진 건 종이 한 장이었다.
“나 역시 아무 대가 없이 그래 달라고 하진 않는다.”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무슨 뜻인가 싶어 다시 고개를 드니 그가 말했다. 달래는 듯도, 부탁하는 듯도 한 목소리는 사람을 착각에 빠뜨렸다.
“영영 병아리로 남으라 할 생각도 없다. 기한은 1년. 그 대가로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종이에 적도록 해라.”
“…….”
“전부 들어줄 테니.”
종이는 황실에서 쓰는 고급품인 듯 두텁고 질감이 좋았다. 그 백지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소원을 마음껏 채워 넣고도 남을 여백이 있었다.
그 누가 황태자에게 이런 제안을 받을 수 있을까. 백지 수표보다도 훨씬 파격적인 값이었다.
혹시, 내가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소녀라 별 대단한 것은 채우지 못할 거라고 자만하는 걸까? 아니면 그런 계약은 없었노라고 나중에 입을 싹 씻을 생각인 걸까?
그러나 그는 나처럼 가난한 귀족의 딸에게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 모를 리 없었다. 소설 속의 클레멘츠는 협상가였고 지배자였으며 나에게는 미친놈이자 인성 파탄자였지만, 사기꾼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