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그는 나를 내버려 두고 일어섰다. 여유로운 태도였다. 저 앞의 흉측한 마수와 이미 그의 신발코를 적신 남색 안개 따위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다음 순간, 거대한 기운이 그를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은빛 섬광이 날카롭게 공간을 갈랐다. 그와 마수 사이의 땅은 지진이 난 것처럼 갈라졌다. 주변을 메우던 남색 기체는 그 검은 구덩이로 순식간에 빨려들어 갔다.
그는 피를 내어 마족을 소환할 줄 안다. 고대어를 통해 간단한 술법을 발동할 줄 안다.
하지만 지금 그는 피 한 방울 나지 않았고, 고대어는 물론 주문 비슷한 것 하나 읊지 않았다.
저런 게 어떻게 가능하지?
“소환이 잘못된 이유는 네가 고대어를 모르기 때문이다. 고대어는 지금보다 발음 체계가 복잡하지.”
“…….”
“너는 정확히 읽었어도, 알고 보면 엉뚱한 주문을 외웠을 확률이 크다는 거다.”
이 상황에선 전혀 와 닿지 않는 설명이었다. 나는 멍하니 내뱉었다.
“그럼 책을 쓴 사람도 책임이 있지 않나요?”
그는 붉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바람을 타고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순간적으로 토기가 치밀었다. 진하디 진한 꿀을 숨 쉴 틈 없이 목구멍으로 밀어 넣으면 느껴질 만한 종류였다.
그는 보검 트레노스를 뽑지도 않았고,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손을 들었다.
그러자, 마수의 위에 은색으로 빛나는 가루가 빈틈없이 뿌려졌다. 언뜻 황홀했던 광경도 잠시, 마수는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소름 끼치는 괴성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사라졌다. 마수도, 마법진도, 갈라진 땅이나 남색 기체나 마수의 검붉은 피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방금 있었던 일을 증명하는 건 오로지 대기를 가득 채운 피 냄새뿐이었다.
그 속에서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눈 색깔만 빼고 평소와 같은 외모였다. 목소리도 똑같았다.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내 직감은 그를 같은 ‘사람’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클레멘츠 레스타 뒤싱겐은 사람이 아니야.
무력하게 떨리는 몸으로 깨달았다. 저게 어떻게 사람이겠어.
흐트러진 옷 틈새로 언뜻 일전에 봤던 붉은 문신이 보였다. 희부연 달빛과 밤공기와 피 내음은 처음부터 그를 더 생생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피를 흡수해야만 소환이 끝나는 마법진이더군.”
터무니없지만, 그가 나에게 변명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함부로 다치지 말라는 거다.”
“왜요? 제, 제가 전하의 애완동물이라서요? 허락 없이는 다칠 수도, 죽을 수도 없다는 건가요?”
대답 없이 날 쳐다보는 눈동자는 숲에서보다도 더 물렀다.
포도주로 가득 적셔져서, 내가 발을 딛기만 해도 쑥 꺼져 버리는 땅 같았다. 멀미가 났다.
“미안하다.”
이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내게 한 말이라기엔 감정의 농도가 터무니없이 짙었다. 내가 너무 힘들어서 잘못 들었거나.
“내 잘못이다.”
아니면 졸음에 취해 있는 거겠지.
“뭘 잘못했다는 건데요. 이…….”
뭐가 됐든 난 그 즈음에서 정신을 놔 버렸다.
쓰러지면서 ‘이 악마.’라고 했는지, ‘이 화상아.’라고 했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 * *
살롱 이후, 백작의 집무실. 셀레우시스 모나한은 자신의 비리가 황태자의 입을 거쳐 하나씩 나올 때마다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카시스 후작의 자료는 완전했고, 조금도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전하, 제발…… 모나한 가의 명예만큼은 보전하게 해 주십시오. 제발…….”
“그대의 처우가 어찌 될지는 차차 결정될 것이다.”
애원도 통하지 않자 이번엔 카시스에게 매달리며 빌었다. 클레멘츠는 이 모든 것이 짜증스럽고 권태로웠다.
허락도 없이 집무실에 들어온 시종 소년이 울며 하는 말을 듣기 전에는.
“병아리님이…… 지금 뒤뜰에……!”
“뭐?”
카시스가 황당해하며 물었다.
분명 그가 직접 오필리어를 방에 데려다 뒀을 터인데.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클레멘츠는 생각도 하기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허름한 뒤뜰에 나타난 산짐승이 제 작은 병아리를 위협하고 있는 걸 봤을 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그에게도 자기 자신 외에 지켜야 할 것들이 있었다. 한 줌밖에 남지 않은 외가의 식솔들, 유모인 로메오 글로리나, 카시스 듀프레.
하지만 그것은 정치적인 공세로부터였지 물리적인 목숨의 위협 따위로부터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통째로 벼려 낸 칼날이 된 것처럼 느꼈다. 아무리 제게 황가의 검과 금지된 술법이 있더라도, 저쪽은 발톱과 이빨을 가진 맹수였다. 그리고 조그만 새의 목숨은 경각에 달해 있었다.
[벨라……. 제발, 부탁이야. 도망쳐.]
그런데 그의 병아리는 분명 산짐승을 향해 ‘벨라’라고 불렀다. 흑표범의 눈알은 익숙한 푸른빛이었다. 또한 자세히 살펴보니 익숙한 저주의 낙인이었다. 닉타인가.
그러고 보면 백작 영애는 기이하도록 많은 마력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거기에 이런 비밀이 있을 줄이야.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클레멘츠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는 병아리를 지키기 위해 연달아 고대어를 읊었다. 치유 마법을 써 줄 악마를 소환할 때는 몇 가지 문법을 틀리기까지 해 가며.
“어떻게 저렇게 초조한 기색으로, 숨 쉬듯 자연스러운 고대어조차 틀리고.”
물론 크렘시아라면 모든 주문을 엉터리로 외우더라도 소환자가 클레멘츠라면 부름에 응할 터였다.
“한낱 치유 마법 좀 써 달라고 나 같은 대악마를 소환한 걸까?”
어쨌든 크렘시아의 지적은 옳았다.
치유에 능하면서 소환 효율도 좋고, 심지어 입까지 다물 줄 아는 다른 악마들의 이름을 클레멘츠는 줄줄이 댈 수 있었다. 이제 와서야.
“저는 전하의 애완동물이에요!”
다행히 그 부분에 대해 당사자는 별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허락 없이는 다칠 수도, 죽을 수도 없다는 건가요?”
달달 떨면서도 할 말을 뱉어 내던 소녀는 그의 품에서 잠들어 있었다. 가라앉지 않은 마력의 은빛 섬광이 번뜩거렸다.
클레멘츠는 완전히 생소한 것을 대하듯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곤란했다. 그의 병아리가 사실 오필리어 레오라란 걸 안 순간부터, 그의 감정은 곤란함으로 시작해 곤란함으로 끝났다.
선을 넘어 들어와 버린 이를 쳐낼 수도 없었다. 백작 영애의 시녀이자 레오라 남작가의 딸. 아기 새를 대할 때와 똑같이 살갑게 대할 수도 없었다.
더욱 곤란하게도 오필리어 레오라는 잘도 위험에 처했다. 무기 하나 없는 몸으로 울면서 숲속을 헤매고 있는 걸 찾았을 땐 분노까지 치밀었다.
왜 너는 그리도 약하고 자유로워서 나를 불안하게 하는가.
왜 벨라루시아 모나한은, 너를 그리도 소중히 여기면서 다치도록 내버려 두는가.
“당신은 안 그러겠다고 맹세할 수 있나요?”
분노가 마지막으로 향한 대상은 그 물음에 확답할 수 없는 자신이었다.
오필리어는 딱히 기척을 죽이지도 않고 따라나서는 그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 정도로 경황이 없었다.
유리로 된 벽 너머로 서점 안 풍경이 비쳤다. 제법 곱상한 서점 주인이 쩔쩔매며 그녀를 챙기고 들었다. 클레멘츠는 그자가 어떤 눈으로 오필리어를 보고 있는지 바로 깨달았다.
“저에겐 이미 미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미래를 약속한 사람.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는 게 무슨 소리지?”
“비천한 자들의 일이라 신경 쓰실 바가 못 됩니다.”
그가 신경 쓸 바 아닌 일.
기억 한 귀퉁이에 밀어 넣어 뒀던 말들이 거슬렸다.
둘은 겉보기에도 서로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는 한 쌍처럼 보였다.
아니, 저 한량처럼 생긴 놈에게 그녀가 약간 과분하기는 했지만.
한미한 가문 출신 시녀와 변방의 작은 서점 주인. 그런 소박한 연애담은 흘려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오필리어가 도망치듯 문을 나선 다음에도 그 남자에 대한 불쾌함을 떨쳐 낼 수 없었다.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일개 시녀를 친히 제 말에 태워 데려왔으며, 써서는 안 되는 힘을 벌써 몇 번이나 쓰고 있는가.
비단 마력 소모 문제가 아니더라도 황가의 능력을 사용하는 건 그에게 백해무익했다. 하물며 뒤싱겐의 것이 아닌 능력이랴.
오필리어 레오라를 선 안에 들인 대가는 말도 안 될 만큼 컸다. 분명, 그녀가 불러일으키는 금빛 파란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클레멘츠는 인정해야 했다. 노랗고 작은 병아리이든, 노랗고 작은 소녀든, 이 존재와 관련되면 자신은 쉽게 이성을 잃었다.
그라는 공들인 세계에 생긴 흠집은 더 이상 스스로의 눈에만 보일 만큼 작지 않았다. 결국 균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모든 것을 무너뜨릴 것이다.
그러기 전에 오필리어 레오라를 여기 내버려 두고 수도로 떠나라. 그러지 못하겠거든 네 손으로 이 싹을 잘라라.
흰 손이 가느다란 목을 쉽게도 감싸 쥐었다. 쉬운 건 단지 거기까지.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손가락은 여섯 꽃잎 문장의 조그만 요철을 살짝 매만지고 떨어졌다.
오필리어는 정해진 형식으로 돌아가던 그의 삶에 주어진 예외였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고, 일상에 보드랍게 스며드는 변주였으며, 그의 해석을 요구하지 않은 채 ‘그저 있는 것’이었다.
그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숨을 쉬어 본 사람이 공기를 포기할 수 없듯, 그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뭘 잘못했다는 건데요, 이 악마.”
수도에서 감히 황태자를 악마라 칭하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전혀 화가 나지 않는 자신에게 놀라느라, 대답은 너무 늦어 버렸다.
“내 탓에 네가 위험한 일에 뛰어든 게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