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28)화 (28/218)

28화

“부탁드렸던 책은요?”

이런 상황에서 한사코 책을 찾으니, 시몽 씨의 잘생긴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렇지만 이내 카운터 뒤에서 검은 표지의 책 한 권을 가져다주었다.

[적마법과 흑마법의 소환술, 아나스타시아 디 샹그리아 지음.]

“당장 구할 수 있는 책 중에선 그게 가장 정석에 가깝다더라.”

그럴 것이다. 샹그리아 가문은 지금은 몰락했지만 그 어떤 이들보다도 소환에 능통했다. 그런 샹그리아가 사람이 쓴 소환술 책이라면 적어도 엉터리는 아닐 것이다.

서둘러 책을 펴 보니 개론에 가까운 원리 설명이 있었다.

[이 책에서는 소환진을 그리는 방법과 대표적인 50여 가지 영적 존재들을 소개한다. 먼저 소환에 필수적인 것은 마력이다.

도구에 깃들이든, 제물을 준비하든, 의식이 성립하기 위한 마력이 없다면 방법이 정확해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차르륵 책장을 넘기니 각 마법진에 대한 설명과 그림이 펼쳐졌다.

뒷부분의 악마 소환진들은 거의 다 찢겨 나가 있었다. 시미크 교단의 검열 때문인 듯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악마를 소환하려는 게 아니었으니까. 내 저주를 풀 수 있을 만큼 강한 존재이기만 하면 되었다.

페이지를 넘어가다 보니 메라와 닉타의 소환진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주인은 뒤싱겐 황가의 후계자, 즉 클레멘츠였다.

“흥, 인간의 딸은 우리에게 명령 못 해.”

“뒤싱겐의 말이라면 모를까.”

기껏 소환해 봤자 저주를 풀어 달라 명령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일까.

내 눈은 악마나 마물이 아닌 존재 중에서 적당한 후보를 골라냈다.

[배블핏츠. 늪이나 계곡을 기어 다니는 자연령으로 저주와 변신에 능통하다.]

이거다!

[오랫동안 자연광을 받은 물에서 태어난 배블핏츠는 맑은 마력과 보기보다 강한 힘을 가졌다. 때에 따라서는 인간에게 깃든 저주의 속박을 풀어 주기도 한다.]

친절하게도 저자는 고대어로 된 소환 주문의 발음을 현대 제국어로 표기해 주었다. 정말로 이거면 될 것 같았다.

“감사해요, 시몽 씨.”

“벌써 가려고? 지금 따뜻한 차를 끓이고 있는데. 한 잔 마시고 가면…….”

“괜찮습니다. 마음만으로도 감사해요. 그럼!”

서둘러 서점 문을 나섰다. 안쪽에서 시몽 씨가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지금은 돌아가서 사정을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혼우드 시내에서는 눈 감고도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건물과 골목과 울타리를 지나쳐 공터로 나가고도 한참을 더 걸었다. 사람의 흔적이 저 멀리 지평선과 가까워질 때까지.

‘여기라면 되겠지?’

수풀로 둘러싸인 땅바닥에서 한참 동안 돌멩이를 주워 모았다.

[야외에서 마법진을 그릴 도구가 적당치 않다면, 돌을 줄지어 놓고 나뭇가지를 꺾어 그리는 방법도 추천한다.

바위나 돌을 옮기거나 쌓아 두는 건 인간의 가장 오래된 기원 의식이다. 태초로부터 반복되어 온 소망의 행위는 그 자체로 이미 마법의 도구가 되어 준다.

마찬가지로,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쓰는 몸짓에는 지식과 의지를 실현코자 하는 인간의 오래된 힘이 들어 있으며 이는 마법의 근본이기도 하다.]

아나스타시아 디 샹그리아라는 사람을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 책에 그려진 소환진을 그대로 확대해서 돌로 그리고, 섬세한 부분은 꺾은 나뭇가지로 그려 보충했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마력은 전적으로 내 목소리에 의지했다. 부디, 부디 주문을 성립시킬 만한 마력이 나와 주기를!

이제는 소환 서적에 제국어 발음으로 쓰여 있는 주문을 외울 차례였다. 여기까지 달려오면서 입 속으로 몇 번 달싹여 봤지만 되뇌면 되뇔수록 혀가 꼬이는 기분이었다.

“카스파시아 레 에르포사이…….”

기회는 한 번뿐이란 생각으로, 가능한 목소리를 크게 내서 또박또박 책을 읽었다. 다행히도 틀린 부분은 없는 것 같았지만.

“…….”

클레멘츠가 소환을 할 때는 빛이 타오르고 바람이 불고 난리던데 잠잠하기 짝이 없었다.

충분한 마력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더니. 그 말대로구나.

그러면 그렇지. 마법은 고사하고 고대어조차 아는 게 없는 나였다. 처음부터 소환 같은 거창한 게 먹힐 리 없는데.

상황이 절박하다 보니 이런 무리수까지 뒀다. 결국 시간 낭비였을 뿐이다.

툭. 나뭇가지와 책을 대충 떨궈 놓고 돌아섰다. 이제 어쩌지? 집으로 돌아가나? 어떻게라도 해 달라고 부모님께 매달리나?

아버지를 기절시키는 한이 있어도 이젠 고려해야 할 선택지였다.

아니면…….

숲속까지 나를 찾아왔던 클레멘츠의 눈빛이 그제야 생각났다.

저택 정문에 내려 줄 때도. 흠 없는 보석처럼 늘 차갑고 단단하던 그의 눈은 뭔가, 평소보다 물러져 있었다.

그 시선은 내게 오래 머물렀다. 마치 나를 염려하는 듯이. 이제는 내 입장을 조금은 헤아려 줄 것처럼.

그러니 그에게 말하자. 가족들이 내게 의지하는 보잘것없는 집안의 딸로서, 병아리로 있기 힘들다고. 그동안 힘들었다고.

나를 인간으로 되돌려 달라고. 여전히 내겐 할일이 있고, 이야기할 사람이 있다고.

“넌, 연애 소설에 빠져서 세상이 소설 속인 줄 아는구나.”

벨라의 말이 옳았다. 그녀와 같은 것을 보고 같은 땅을 디디고도 나는 다른 세상에 살았다.

이곳은 분명한 현실이었는데.

한 아이에게 일어난 변화가 미래에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들고, 누군가의 인생을 평생 억누르기만 하는 가족이 있고.

아무리 머리를 쓰고 애를 써도 사소한 저주 하나 뜻대로 벗어날 수 없는.

예측할 수도 주무를 수도 없는 엄격한 현실이었다.

백작가로 가려고 몇 걸음이나 옮겼을까. 발밑의 땅에서 별안간 쿠궁, 하는 진동이 울렸다.

‘음?’

진동의 근원은 분명 뒤쪽, 소환진을 그렸던 곳이었다.

아, 혹시 마법이 발동하려면 원래 조금 시간이 걸리나? 클레멘츠 같은 넘사벽 소환사를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되는 거였어!

예측을 뒷받침하듯 뒤에선 뭔가의 울음소리 역시 들려왔다.

“크르르르륵-.”

소환이 통했단 생각에 반색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책에 저런 울음소리 얘기도 있던가?

“배블핏츠?”

“크르르르르르…….”

소환진엔 어느샌가 은은한 적색 광이 일렁였다. 그 위로 솟아 있는 거대한 형상은 눈을 씻고 봐도 빛과 물에서 태어난 자연령 따위가 아니었다.

‘허미. 저게 뭐야.’

원숭이의 얼굴에 바다표범의 송곳니. 사자의 앞발. 쥐의 꼬리. 그리고 뭐라 표현하기 힘든, 덫처럼 생긴 이빨이 소용돌이 모양을 이루며 가슴에 박혀 있었다.

마수였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나는 이곳이 내가 어찌해 볼 수 없는 현실이란 점을 마음 깊이 자각한 뒤였다.

“아, 씨…….”

아나스타시아 디 샹그리아 씨! 마력이 충분하지 않으면 아무 일 없을 거라면서요! 이게 대체 뭔데요! 예?

멱살을 쥐고 짤짤 흔들고 싶지만 그 사람은 여기에 없었다. 일단 튀자.

지금쯤 야간 순찰대가 주변을 돌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알려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백작의 사병을 동원해 잡아야 한다.

순찰대가 현재 어느 위치에 있을까. 지끈대는 이마를 붙잡으며 달려 나가려는데…….

“으르르릉?”

마수는 별로 날 쫓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원래 있던 그 자리에서 기괴할 만큼 긴 앞다리를 들어 나를 가리켰다.

“그르르릉…….”

“……나?”

정확히는, 내 머리 쪽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마수는 천천히 몸을 숙이더니 앞발을 뻗쳤다.

“히이!”

다행히도 소환진 바깥으로 발을 떼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몸길이가 길어 충분히 멀리까지 나올 수 있었다.

기겁해서 뒷걸음질 쳤지만, 커다란 갈고리 같은 발톱에 내 금발 끄트머리가 걸렸다.

“아르르르르…….”

그다음엔 제 앞발을 가지고 내 크기를 가늠해 보는 듯했다. 아무리 봐도 몇 입 거리인지 각을 재는 모습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뒤로 돌아 달렸다.

“진정해. 나는 맛이 없어어어!”

“크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악!!!”

도망치는 것이 분노를 자극한 듯 마수는 크게 울었다. 나 역시 지지 않고 비명을 질러 댔다.

걸음아 날 살려라 움직이는데 느닷없이, 갑자기 다리의 힘이 풀렸다.

“……어?”

그대로,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픽 하고 쓰러졌다.

가까스로 고개를 들고 보니 마수는 뭔가에 움츠러든 것마냥 몸을 떨었다. 가슴에 달린 입이 열리고 거기서 남색 기체가 쏟아져 나왔다. 기체는 땅바닥을 기며 무서운 속도로 흘러오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가 갑자기 쓰러진 이유는 저 기체 때문이며, 저 뭉게뭉게 남색 구름이 나를 덮으면 모르긴 몰라도 아주 엿 될 거라는 직감이 뇌리를 때렸다.

불행히도 여전히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좀 착하게 살걸.”

조금만 내 생각에서 벗어났으면 벨라의 감정이 더 일찍 보였을 텐데.

심부름이 끝나면 바로 돌아갈걸.

집사님이 일 시키려고 찾을 때 뒤뜰에 숨어서 간식 먹지 말걸.

부모님한테 좀 살갑게 굴걸. 저쪽 세상의 남동생이 아무리 재수 없어도 그렇게 틱틱대지는 말걸.

발치에까지 도달한 남색 기체를 마지막으로 눈을 질끈 감으려던 순간…….

뚜벅.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오지 마세요. 저 앞이 안 보여요? 빨리 도망치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 주세요. 제발!’

“오지……!”

읍.

다가온 사람은 몸을 낮춰 대뜸 내 코와 입을 가렸다. 달빛을 홀로 머금은 듯한 손. 어느덧 익숙해진 향기가 났다.

“숨을 참아.”

목소리는 귓가에서 낮게 울렸다. 그의 팔이 나를 끌어당겨 일으켰고, 그의 조금 뒤쪽에 세워 두려 했지만 나는 흘러내리듯 주저앉았다. 내 팔을 붙잡아 앉힌 클레멘츠가 말했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군.”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은…… 평소와 달랐다.

색깔. 언제나 클레멘츠의 눈에 비견되는 것은 자수정 혹은 붓꽃이었다. 지금은 꼭 잘 숙성된 포도주처럼 붉은 기운이 강했다. 그 눈을 마주한 나는 크렘시아를 처음 봤을 때처럼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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