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27)화 (27/218)

27화

“나는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영애.”

“발뺌하시겠단 거군요. 간밤에 당신이 칼을 겨눈 흑표범이 저라고 고백하면, 사실대로 대답하실 겁니까?”

눈빛이 마주쳤다. 벨라는 그가 그때서야 처음으로 자신을 ‘본’ 거라고 느꼈다.

“그대는 저 아이를 그리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왜 다치도록 내버려 두지?”

“당신은 안 그러겠다고 맹세할 수 있나요? 게다가 내기로 오필리어를 걸라니.”

“요구를 걸고 나와 내기를 하려면 그대도 가장 소중한 걸 내놔야 하지 않겠나?”

“그 아이 의사는요?”

“그 부분은 걱정 말고.”

속이 뒤틀렸다. 감히 저와 오필리어에 대해 말을 얹다니. 오필리어를 요구하다니.

그가 뭘 원하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길 테니까. 어릴 때부터 활 솜씨로는 아무도 그녀를 따를 자가 없었다. 백작저에서는 물론이고 사냥꾼이 많은 혼우드 전체에서도.

황태자는 자신의 오만을 후회하게 되리라. 황성에서든 어디든, 곧 자신의 지배하에 놓여 그 모든 걸 후회하며 빌게 되겠지.

한 발, 또 한 발을 쏠 때마다 굳었던 자신감은 흔들려 갔다. 저렇게 잘 쏜다는 말은 어디서도 듣지 못했는데.

하지만 신경 쓸 필요 없었다. 마지막 살을 쏘는 것으로 이길 수 있을 테니. 지금도 오필리어 녀석이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응원하고 있지 않은가.

……가만. 응원이 아닌 걸까?

생각해 보면 그 녀석은 늘 수도 문화를 동경해 왔다.

재단사가 수도에서 찍어 낸 원단 카탈로그를 들고 오면 황홀한 표정으로 들여다보며, 어떤 옷이 네게 어울릴까, 벨라, 하며 귀찮게 굴었다. 뇌가 절도록 빌려다 보는 소설들도 대부분은 수도 사교계가 무대였다. 그뿐인가. 저 황태자와 자신이 잘되길 바란다는 말까지.

오필리어의 의사 부분은 걱정할 것 없다는 말. 혹시, 그 애는 이미 그를 따라가고 싶어 하는 건가?

극도로 조절하고 있던 호흡이 일시에 흐트러졌다. 태양빛 같은 것이 비스듬히 눈을 찔렀다. 아찔하는 순간 벨라는 화살을 놓쳤다.

“그럴 리 없어.”

왜 울고 있는 거야? 누군 울 줄 모르는 줄 알아?

“벨라, 그건 너의 전생 때문이야. 내 말이 어떻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오필리어는 눈가를 비벼 닦았다. 더없이 진지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여태껏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헛소리였다.

“뭐? 하…….”

벨라루시아는 코웃음을 치려다가 붙박인 듯 멈춰 섰다.

잠들 때면 그녀는 아주 오래된 꿈을 꿔 왔다.

꿈속에서 자신은 더럽고 검은 그림자가 되어 일렁거렸다.

‘랜니스.’

‘랜니스.’ 숲속의 ‘목소리’들이 그녀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녀는 지금껏 그것이 제 미들 네임인 ‘레우니스’의 애칭이라고만 생각했다.

꿈속의 그림자는 끝에 언제나 악을 쓰며 갈가리 찢어졌다. 피맺힌 목소리로 어떤 이름을 불렀다. 깨어나서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도 그 이름은 생각나지 않았다.

“아주, 아주 오래된 사람의 생각이 네 안에 들어 있대. 하지만 그 생각은, 그 사람은 네가 아니야. 너는 다른 사람이야.”

왜, 길이 담아 두고 있던 것처럼 말하는 걸까. 왜 지금 이런 말을 자신에게 하는 걸까.

“그래서? 그래서 뭐?”

“벨라.”

“그를 죽이고 싶어 하는 건 내가 아닌 사념의 충동이니까, 그와 혼인하라고?”

커다랗고 둥근 눈은 새벽의 황금을 닮았다. 조용한 속삭임이 울렸다.

“……싫구나.”

“그래, 싫어. 충격 받았니?”

예복을 입고 그자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따뜻하고 달콤한 이야기들을 나눌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벨라는 코웃음을 쳤다.

“하기야 넌 내가 그에게 가면 좋겠지. 내가 가면 너도 따라갈 테고, 넌 항상 수도 귀족을 동경했으니까.”

“……벨라, 아니야. 그런 게!”

“아가씨가 왕자와 결혼하고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를 기대하는 거야? 넌, 연애 소설에 빠져서 세상이 소설 속인 줄 아는구나.”

그동안 무슨 상황에서도 입만은 살아 있던 계집애가 웬일로 말이 없었다. 꼭 충격 받은 것처럼 그 자리에서 미동도 없었다.

죄책감이 명치를 꼭꼭 찔렀는데도 벨라는 이미 열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내가 선택하라고 했으면서, 내 선택을 믿지 않는구나.”

“…….”

“나에 대한 모든 건 속속들이 알면서, 네가 진짜 무슨 생각인지는…….”

“벨라. 벨라. 미안해. 잊어 줘.”

“알려 주지 않아.”

“나는……! 사정이 있었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런 비밀이! 그래서 너와 전하에 대해 오랫동안 착각했어. 이제는 네가 원하는 대로…….”

“이제 와서?”

금빛 눈에서 또 그쳤던 눈물이 흘러내리려 한다. 벨라는 픽 웃었다. 마지막 화살을 쏘는 순간 엄습했던 두려움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만일 오필리어가 원하는 것이, 그 황태자가 줄 수 있는 것들이라면? 그런 것들은 제게 없었다.

저 녀석의 유일한 소원이 제 곁에 있는 것이리라고, 언제까지나 대가 없이 어릴 때처럼 그럴 거라고 생각해선 안 되는 거였다. 바보같이.

벨라는 사냥복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연고와 약초 꾸러미가 잡혔다. 시녀가 다쳤을까 봐 부랴부랴 챙긴 것이었다. 그 아래로 잡히는 차가운 사슬을 끄집어냈다. 십여 세의 여자아이가 하면 맞을 듯한 금팔찌였다.

‘……!’

오필리어의 눈이 커졌다.

서부의 관습으론 어린 시녀가 처음 주인을 모실 때 종속 관계를 보증하는 예물을 바친다. 후일 시녀의 나이가 차면 주인은 그 예물을 팔아 결혼 자금을 마련해 주곤 했다.

“결혼 자금?”

“예, 아가씨. 오필리어도 언젠가는 짝을 찾아야 할 테니 말입니다.”

늙은 집사의 설명에 벨라는 금팔찌를 한동안 노려보다가, 깊고 깊은 상자 속에 감춰 버렸다. 다음 날 들뜬 목소리로 물어보는 아이에겐 잃어버렸노라고 톡 쏘아붙였다.

“잃어버렸다며.”

“그래.”

벨라는 바위 밑의 화살을 주워 올렸다. 거기에 팔찌를 매달아서 활을 당겼다.

“너 같은 시녀는 필요 없어.”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바람조차 불지 않았다.

주인이 무슨 생각인지 안 시녀는 뒤늦게 울며불며 매달렸다. 그러나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가 무거운 소릴 내며 살을 밀어냈다.

오필리어는 금빛으로 반짝인 포물선을 쫓아 다시 숲속으로 내달렸다.

‘못 찾아. 바보.’

아마 오필리어도 머리로는 알고 있을 것이다. 금세 포기하고 훌쩍이면서 숲 밖으로 나오겠지. 그러고 나면 작별이겠지.

벨라루시아의 뺨을 타고 무언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손끝으로 훔쳐 낸 물방울을 낯선 것처럼 쳐다보았다.

“……이런 게 눈에서 나온 적은 처음이야.”

* * *

가슴이 아팠다. 뭐 슬퍼서 어떻다는 얘기가 아니었다. 몸을 한계로 밀어붙여 달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벨라가 팔찌를 쏘아 보낸 방향으로 냅다 내달렸다. 한참 와서야 어리석은 짓이었단 걸 깨달았다. 어디 나뭇가지에 걸렸을 수도 있고 절벽으로 빠졌을 수도 있다.

애당초 찾아오라고 쏜 게 아니었다. 그저 이것으로 주종 관계의 끝이라는 최후통첩이었다.

알면서도 달리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가 그렇게 데었는데도. 벌써 해가 제법 기울었다.

내가 이런 바보라서, 벨라도 더는 참아 줄 수 없나 보다. 이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솔직히 인정했을 때였다.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어딘가로 헤매지도 않고 곧장 내 쪽을 향해 가까워져 왔다.

며칠 전 숲에서 병아리가 되어 길을 잃었을 때 마주쳤던 말과 같았다. 황가의 문장으로 장식된 백마. 타고 있는 사람은 이 나라의 황태자.

“아가씨가 왕자와 결혼하고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를 기대하는 거야?”

벨라가 했던 말이 생각나 명치께가 욱신거렸다.

“몰골이 엉망이군.”

“그렇겠죠.”

당신은 언제나 한 떨기 꽃처럼 아름다울 축복을 받았으니까요.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고 주인에게 버려져 숲을 헤매는 꼴이 될 일이 없겠죠.

“벨라가 제 예물을 버렸어요.”

클레멘츠는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 말에서 내려왔다.

“상관없어요. 그까짓 것은 그냥 물건일 뿐이잖아요? 그게 없어졌다고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어요. 여전히 벨라와 저는…….”

“해야 한다던 이야기는 다 했느냐.”

다 한 건가? 그게 끝인 건가?

“…….”

멍하니 있는 내게 그는 재차 물었다.

“할 일이 있다던 것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 빌어먹을 활쏘기 연습 때문에 아직 저주를 풀어 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는 나를 떠메다가 말 위에 올리곤 자신은 그 뒤에 탔다. 힘이 빠져 있었던지라 나조차 깜짝 놀랄 만큼 가볍게 몸이 들렸다.

“하!”

클레멘츠는 한쪽 팔로 내 몸을 단단히 고정한 뒤 적당히 빠른 속도로 말을 달렸다. 왠지 그가 화가 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하, 만 하루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지요?”

“그래.”

“백작 저택에 도착하면 저를 내려 주시겠어요? 마지막으로 들를 곳이 있어요. 절대로 도망치지 않을게요. 꼭 돌아올게요.”

아직 말미가 있으니 나는 단골 서점으로 가 볼 생각이었다. 서점 주인 시몽 씨는 전에 얘기해 둔 마법 서적을 준비해 뒀을 것이다.

결국 로맨스는 물 건너갔다. 벨라와의 사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이젠 내 몸이라도 간수할 차례였다. 책을 읽고 저주를 풀 방법을 찾을 것이다. 마지막 기회였다.

클레멘츠는 무엇을 할 생각인지 묻지 않았다.

클레멘츠는 나를 백작가 정문에 내려 주었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간신히 똑바로 섰다.

보랏빛 눈이 무겁게 가라앉아 나를 바라보는 것이 무슨 뜻인지, 그가 왜 친히 나를 데려다주었는지 생각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하는 둥 마는 둥 꾸벅 인사하고 바깥으로 달려갔다. 막 출근한 야간 문지기 페로 씨가 눈을 휘둥그렇게 떠 댔다.

“시몽 씨!”

“……오필리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해가 저물어 서점 이곳저곳에 등을 켜고 있던 시몽 씨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 괜찮아? 무슨 일 있었어?”

나는 마치 난리 통에서 도망 나온 피란민처럼 보이나 보다. 그는 나를 소파에 앉히고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려 했다. 난 물수건을 받아 들며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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