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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26)화 (26/218)

26화

이미 준비는 다 되어 있으니 몸만 떠나면 되는 것이다. 수행원 몇 명과 단출하게 출발하려는 벨라를 나도 따라나섰다.

‘…….’

우리는 복잡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탁 트인 숲으로 가면 둘이서만 해야 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갑자기 클레멘츠가 따라가겠다고 나섰고, 그가 오니 당연히 백작도 침통한 몰골로 어기적어기적 기어 나왔다.

‘와, 이렇게 우르르 다 따라 나오면 어쩌란 말이야?’

결국 예정되었던 규모 그대로의 행사였다. 클레멘츠와 카시스, 모나한 남매를 위해 네 개의 과녁이 준비되었다.

“나는 안 쏠란다…….”

천막 아래 빌빌대며 앉아 있는 백작이 힘없이 손짓했다. 과녁 하나가 치워졌다. 카시스는 활을 당겨 자신의 과녁을 명중시키기 시작했다. 수행원 몇이 모여들어 감탄했다.

벨라와 둘이 왔다면 나도 활을 쏴볼 수 있었겠지만, 무려 황태자가 참여한 이상 시녀 따위가 차지할 과녁은 없었다. 기껏해야 과녁 근처에 떨어진 화살들을 주워 오는 역할이었다.

그때 벨라가 갑자기 클레멘츠에게 다가갔다.

‘……!’

뭔가 둘이서 진지한 얘기를 하는 듯했다. 귀를 기울여 봐도 내가 서 있는 곳에선 내용을 들을 수 없었다.

중간에 한번 흘끗, 벨라가 나를 돌아보았다. 클레멘츠도 이쪽을 응시하더니 다시 둘이서 대화를 나눴다.

뭔데 저러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려니 이내 그들 주변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와아!”

클레멘츠와 벨라가 나란히 섰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한 단어가 귀에 박혔다.

‘내기.’

뭘 걸었는진 모르지만 황태자와 혼우드의 아가씨가 실력을 겨룬다.

레이디 퍼스트. 먼저 벨라의 순서였다. 그녀는 우아한 자세로 현을 당기더니 잠시 뒤 쏘았다.

텅.

검은 깃이 달린 화살은 과녁의 정중앙에 박혔다. 나지막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이어서 클레멘츠가 쏘자 역시나 보라색 깃 화살이 정확히 중간에 박혔다.

그 뒤로도, 어느 쪽이든 쏘는 족족 명중이었다. 적당히 윗분들을 띄워 주기 위해 반응하던 수행원들도 이젠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숨을 죽였다. 막상막하. 흔한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그럼. 우리 애들이 누군데!’

나까지 덩달아 자부심에 어깨가 펴졌다. 원작에조차 나오지 않는 두 사람의 활쏘기 시합이라니. 게다가 이 출중한 실력! 이래야 내 주인공들답지!

‘……이제 둘 중 한 명은 주인공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기분이 쭉쭉 가라앉았다. 클레멘츠가 내게 허락한 시간은 꼭 만 하루였다. 그 안에 벨라와 이야기를 하고 내 저주의 실마리를 풀 수 있을까?

어느덧 벨라가 마지막 화살을 매기고 있었다. 지난 점수들은 완벽하게 동점. 이번 한 발로 승자가 가려질 것이다.

‘이겨라 벨라! 뭘 걸었는진 모르지만 네가 이기렴!’

그런데 벨라는 조준한 상태로 한참이나 머뭇거렸다. 왜 저럴까 의문을 갖는 순간, 화살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큰 궤적을 그리며 과녁을 지나쳐, 아예 나무 사이 숲속으로 쏙 사라져 버렸다.

“어!”

벨라가 이렇게까지 빗맞힌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여태껏 보여 주던 깔끔한 솜씨와는 딴판이었다.

내기는 벨라의 패배였다. 상심하지 말라는 뜻으로 벨라를 한번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활을 들고 혼이 나간 듯이 서 있었다.

“제가 가서 가져올게요!”

성실한 시녀답게 손을 들며 외쳤다. 벨라를 이기게 해 줄 순 없어도 화살 정도는 가져와 줄 수 있었다. 나는 즉시 숲을 향하여 뛰어갔다.

“화살아아-.”

터벅터벅.

“화살아 어딨니이이?”

이런 일은 스피드가 생명인데. 화살이 떨어질 방향을 잘못 예측했을까? 말을 타고 올걸 그랬나?

이렇게 된 이상 저 수두룩한 나뭇가지를 꺾어 하나 만들어 가야 하나 싶었을 때.

‘찾았다!’

둥그런 회색 바위 옆에 떨어진 화살이 보였다. 그걸 잡으려고 손을 뻗는데, 뭔가 내 어깨를 잡아챘다.

“악……!!!”

“나야.”

나오기 직전이던 비명보다 그녀의 목소리가 더 빨랐다. 벨라였다.

정신없이 뛰어온 듯 검은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고, 늘 창백하던 뺨이 곱게 물들었다. 나는 당황해서 눈을 끔뻑거렸다.

“벨라? 내가 너무 오래 안 돌아갔나?”

“그래. 끝까지 도움이 안 되는…….”

평소처럼 불평을 늘어놓으려던 그녀는 내 팔을 붙잡고 이리저리 돌렸다.

“다쳤던 곳은?”

“괜찮아. 이제 멀쩡해!”

“…….”

“너는? 어제 그렇게 돼서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누가 할 소리를 해! 오필리어 레오라!”

벨라가 내 손을 어찌나 꽉 잡았는지 손자국이 남을 정도였다.

“이 모습은 뭐야. 그놈이 저주를 풀어 줬어?”

“……딱 하루 동안. 내가 시간을 벌었어.”

“그러면 그렇지.”

벨라는 괴로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해서든 없애 버릴 거야.”

“꼭…… 그래야만…….”

내가 입을 벌리자마자 사나운 벽안이 빛을 발했다. 그녀를 이렇게까지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해아만 하는 질문이었다.

“벨라, 전하를 해쳐야만 하는 이유가 뭐야?”

“그걸 말이라고 해? 내가 원하기 때문이야.”

“원한다면, 왜?”

“너, 그를 감싸고 싶은 거지?”

무섭게 내뱉었지만 그녀도 조금은 생각해 보는 눈치였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그가 미웠어. 황태자는…… 어릴 때부터 내가 잡아야만 한다고 못이 박히도록 들어 온 사람 같았어.”

“‘좋은 신랑감’ 말이야?”

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몰라. 네가 오기 전부터 나는 항상, 항상 화가 나 있었던 것 같아. 넓은 저택이 감옥처럼 느껴졌어. 내 뜻대로 할 수 있을 때라곤 숲으로 뛰쳐나갔을 때뿐이었어.”

아, 벨라. 내가 어떻게 모르겠어.

작은 몸으로 숨을 죽이고 창밖의 넓은 세상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았을 것이다. 나와 만나기 전까지 그녀에게 ‘뜻대로 해도 좋다’라고 말해 준 사람은 없었다.

“별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살았어. 멍청한 얼굴을 하고 멍청한 소리나 해 대면서. 수를 놓으라면 놓았고 분을 칠하라면 칠했어.”

“…….”

“내가 참아야 했고 포기해야 했던 그 모든 것이 결국은 그 한 사람을 위한 거였어.”

단 한 사람, 그녀의 남편이 될 사람을 위해서.

“어제 살롱에서도 봤지? 그에게 잘 보여야 한다고 내가 얼마나 모욕을 당했는지 몰라.”

벨라는 말하다가 확신을 얻은 것 같았다.

“너는 내게 뜻대로 하랬지. 그런 그를 내가 해할 마음을 먹는 건 당연한 거야. 두고 봐. 내가 이 손으로 그를…….”

하얗고 예쁜 손을 내려다보는 벨라의 눈빛은 기이했다.

“그리고 나는 자유로워지고 말 테니까.”

“……벨라.”

벨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녀의 분노가 무엇인지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말해야 했다. 오히려 그녀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을까, 감히 말해도 될까 싶어 치워 뒀던 진실을.

“어린 너를 가둬 놓고, 꾸짖고, 억압하고. 성장한 너에게 안 어울리는 역할을 떠맡기고, 널 팔아넘길 물건처럼 대한 건.”

“…….”

“너의 오라버니인 백작님과 네가 어릴 적에 돌아가신 부모님이셔. 황태자 전하는 아니야.”

한동안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 소리와 새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벨라의 파란 눈엔 불티가 자글거렸고, 또 물기로 젖어 촉촉했다.

“그럴 리 없어.”

* * *

벨라루시아는 중얼거렸다. 그럴 리 없다고.

“말을 잘 들어야지, 벨라. 우리 가문에 보탬이 되려면.”

“그래- 모든 것은 모나한 가의 영광을 위하여!”

모나한은.

희미한 와중에도 좋은 기억 하나 없는 부모의 이름이었다. 막무가내로 큰 소리만 칠 줄 아는 오라비의 이름이었다. 무참히 갇혀 지내야만 했던 집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녀 자신의 이름이기도 했다. 어떻게 핏줄이 자기 자신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가.

이 살의를 돌려야 하는 대상이, 이방에서 도달한 낯설고 아름다운 남자가 아니라…….

언제까지고 제 위에, 부수거나 뒤집을 수 없는 천장처럼 버티고 있었던 오라비라고?

“그럴 리 없다고.”

벨라는 제 목소리가 떨리고 있단 걸 알았다. 눈앞의 시녀는 슬픈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가족을 부정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야.”

“입 좀 다물어 봐, 제발. 오필리어. 너는…… 너는 몰라, 나는 그자를 처음 본 순간 내가 어땠는지. 온몸의 세포가 소리를 질렀어. 태어나서 그렇게 맹렬한 감정은 느껴 본 일이 없단 말이야.”

“그건 혹시…….”

“아니야! 그건 사랑 따위가 아니야. 네가 알려 줬잖아.”

바보 같은 시녀는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

‘왜 우는 거야, 이 바보야.’

품위 없게 소매로 쓱쓱 닦아 버리는 몸짓마저 속이 터졌다.

황태자 클레멘츠를 본 날에 결심했었다. 그를 가져서 이 손으로 파괴하고 말리라고. 필요하다면 황궁이든, 마계든, 그를 따라가리라.

오늘 낮에는 시녀와 이야기를 하려 했으나, 웬일로 비싼 체하던 그 남자까지 우르르 따라 나와 버렸다. 나름대로 기회였다. 그녀의 손에는 활이 있었고, 높은 사람들은 내기를 좋아했다.

“일전에 저를 궁성으로 데려가 달라고 말씀드렸지요. 생각해 보셨나이까?”

“거절한다. 그대에겐 클랏샤보다 혼우드가 훨씬 어울리는 것 같군.”

쉽게 허락하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이렇게 하는 건 어떤가요? 활을 쏩시다. 제 점수가 더 높으면, 절 데려가시는 겁니다.”

그제야 그는 보랏빛 눈을 들어 그녀를 응시했다.

“그대가 지면?”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대가가 필요하다면, 뭐든 지불하겠다고요.”

“그대의 시녀라도 내게 보낼 수 있겠나?”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오필리어 쪽을 돌아보았다. 분명 사람이 되어서도 어딘가 샛노란 병아리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소녀.

“양심도 없지, 어떻게 당신이 오필리어를 요구할 수 있죠? 이미 그 애한테 저주를 걸어 내게서 뺏어 가 놓고!”

발끈해서 소리를 죽이고 외쳤지만 황태자는 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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