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황제의 맏아들이 태어났을 때 내가 일곱 번의 입맞춤으로 축복했단다. 그중 하나는, 한 떨기 꽃처럼 항상 아름다울 것.”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머지 여섯 축복의 내용은 뭘까? 이런 건 원작 소설에 전혀 나오지 않는 얘기였다. 2부에 나올 예정이었을까?
하지만 클레멘츠는 1부의 끝에서 분명 죽었는데. 암만 강력한 마법이라도 그를 연인의 칼로부터 지킬 수는 없었고.
“잘도 나불대는군. 그 아이가 누군 줄 알고 이렇게 신난 거지?”
“그러니까 알아보려고 이러는 거잖아. 이 소녀는 누구지? 첫 만남은 어디서?”
크렘시아는 조바심을 숨기지 못하고 물어 댔다. 그리고 드디어…….
“일말의 성적 긴장감도 없어?”
“하?”
“콜록!”
그러니까……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첫 만남은 침대 위에서긴 했는데요. 긴장감은 모르겠고 목숨의 위기는 있었습니다.
질문 자체에 너무 당황한 나는 기침을 터뜨렸다. 등 부분에 아직 남은 통증 탓인지 한번 시작된 기침이 잘 멎지 않았다. 아, 왜 하필 이 타이밍에 기침이 나선! 오해받으면 어쩌지?
“쉬이, 진정해요, 진정해.”
알겠다. 이 목소리가 어떤 느낌인지.
그건 바로, 장성한 제 조카 근처에 있는 여자는 모두 조카며느리 감으로 보여서 무례한 질문을 마구 던지며 치근덕대는 이모의 느낌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저는 전하와, 콜록.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서로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요.”
“알았어요, 알았어.”
알았다는 말투가 아니었다. 나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설령 세상이 멸망해서 전하와 저 둘만 남는다 해도…….”
“오호호호! 그 정도로? 그렇게나 싫어?”
이상하게도 내가 부정할수록 크렘시아는 더더욱 신나 하는 것 같았다. 대체 왜 이럴까, 고쳐 준 건 고마운데……. 마계는 좀 심심하고 할 일이 없고, 그런가?
“자, 자. 아직 등의 상처가 남았으니 엎드려 볼래?”
그녀가 시키는 대로 베개를 품에 안고 순순히 엎드렸다. 그러자 크렘시아는 ‘상처를 치료하려면 옷을 벗겨야겠지?’라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딱. 맑은 소리가 한 번 날 때마다 내 웃옷이 한 꺼풀씩 벗겨져 옆에 쌓였다. 망토, 재킷. 그 안에는 뒤에 단추가 달린 블라우스였다.
크렘시아는 내 등 정중앙을 길게 훑는 것으로 간단히 블라우스 자락을 벌렸다. 옷으로 감춰져 있던 피부에 찬 공기가 닿으며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러고 보니 여긴 클레멘츠의 침대인데, 너무 편할 대로 쓰는 건가 싶어 그를 흘긋 봤다.
‘음?’
클레멘츠는 급히 제 눈을 가렸다. 고개를 돌리는 그의 뺨은 약간 붉어진 것처럼 보였다.
“크렘시아!”
화가 난 목소리였다. 크렘시아는 콧노래까지 부르다가 대꾸했다.
“왜, 난 아가씨를 치료해 줬을 뿐인데?”
장미 향기가 훅 끼치며 촉촉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등을 뒤덮었다. 그 순간 난 깨달았다.
척 보는 것만으로 온몸을 진단하고 손짓 하나로 내상까지 자유자재로 고칠 능력이 있는, 그깟 피부의 타박상을 보기 위해 옷을 벗겨야 할 이유가 없었다.
크렘시아가 일부러 우리를 골린 거였다. 짓궂은 악마. 새빨개진 뺨을 베갯잇에 눌러 감췄다.
“다 끝났으면 돌아가!”
은쟁반에 옥구슬 수십 개가 굴러가는 듯한 웃음소리가 서서히 멀어져 갔다. 보라색과 장미색 불빛으로 환하던 방 안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는 다소 지친 기색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남겼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걸까? 클레멘츠의 손바닥은 아직 보랏빛으로 명멸하고 있었다. 저 빛 한 점 한 점이 모두 그의 피였다.
“전하, 괜찮으세요?”
나도 모르게 이렇게 물었다.
“크렘시아는 말 많고 짓궂은 영이지. 당혹스럽게 해서 미안하구나.”
그는 무심코 내 쪽을 보려다가 헛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아.
나는 꾸물꾸물 움직여 얇은 이불을 등 위로 끌어 올렸다. 악마 대모님!! 고쳐 준 건 감사한데 이게 무슨 짓이에요?
“데려온 수하는 카시스가 끝이다. 옷을 다시 입을 수 있게 하녀를 불러 주겠다.”
“예? 누, 누구 혼삿길 막을 일 있으세요?”
저 황태자는 지금 자기가 무슨 얘길 하는지 알고 있는 건가? 백작가의 하녀가 여기 와서 이러고 있는 나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하겠어!
“…….”
클레멘츠는 할 말이 없는 듯 입을 다물었다. 조금 뒤 그가 결연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 이불을 사수했다.
“힉, 지, 지금 뭐 하시는 건가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혼자선 다시 못 입지 않겠나.”
황송하게도 황태자 전하께서 단추를 다시 채워주실 모양이었다. 저기, 클레멘츠 전하. 그건 아무래도 정확히 크렘시아가 의도한 상황이라는 생각 안 드십니까?
“에이, 귀하신 분께 이런 사소한 일을 맡길 수야 있나요. 제가 혼자 할 테니 커튼만 좀 쳐 주시겠어요?”
“스스로 입겠다고? 이걸?”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침대의 두꺼운 휘장이 드리워지는 틈을 타서, 가늘어진 눈초리로 그를 째려보았다.
봉건 계급제의 사악한 최종 수혜자 같으니…….
시중들 사람이 곁에 쎄고 쎘으니 조금만 복잡한 옷이라도 혼자는 안 입어 봤겠지. 어휴. 이래서 곱게 자란 도련님들이란!
나는 차근차근 옷을 다시 껴입었다. 블라우스는 우선 단추를 앞쪽으로 채우고 반 바퀴 돌려 소매를 마저 끼웠다. 재킷을 입고, 내 남색 단벌 망토도 걸친 뒤 꼼꼼히 매듭을 지었다.
차르륵. 휘장을 걷으며 완벽히 갖춰 입은 내가 나타나자 클레멘츠는…… 조금 경이로워 하는 것 같았다.
“정말 혼자 입었군.”
“하하, 시녀라면 이 정도는 기본이라고요.”
“흥미롭군.”
나참. 흥미로워할 게 따로 있지. 그러나 난 혼신의 힘을 다해 짜게 식으려는 입꼬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혹시 그가 치료를 빌미로 무리한 요구를 할까 걱정스러웠다. 예를 들면 ‘회복시켜 줬으니 이제 죽을 때까지 내 병아리다’같은…….
하지만 그가 문제 삼은 건 다른 부분이었다.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는 게 무슨 소리지?”
“전하께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그에게는 운명의 배필이,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여자가 있다는 걸.
물론 아직은 아니었지만, 곧. 아주 곧이어야 했는데……. 이젠 확신이 없었다. 과연 그때가 오긴 오는 걸까?
‘벨라…….’
상처 받은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곤 숲속으로 멀어져 가던 흑표범의 모습이 떠올랐다.
“너마저 그 소리야? 오라버니처럼 한심한 소릴 하냐고.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나보고, 숨 막히는 옷을 입고 시집이나 가라고?”
얼마나 실망했을까. 나만큼은 그녀의 말을 들었어야 하는데.
벨라는 정말로 클레멘츠와 함께하길 원하지 않는 걸까? ‘원작’ 과는 이미 거기까지 달라져 버렸나.
클레멘츠는 아직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없이 자신 없는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조만간 운명의 짝을, 만나실 테니까요.”
클레멘츠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네 쪽 말이다.”
“아, 저요. 저는…….”
마음에 둔 사람 따위. 살기 바쁘고 벨라 챙기기 바쁜데 그런 여유가 있었을 리가. 단지 그렇게라도 말해 두지 않으면 크렘시아가 끈질기게 추궁할 것 같았기에 둘러댔을 뿐이다.
나는 피식 웃었다.
“비천한 자들의 일이라 신경 쓰실 바가 못 됩니다.”
“…….”
클레멘츠는 뭔가가 어지간히 불편한 눈치였다.
뭐가 그를 불편하게 할까?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작게는 하찮은 병아리 시녀와 썸 관계로 엮여 버렸다는 것부터, 크게는 모나한 가문의 방종이나…… 흑표범과의 조우 같은.
‘벨라와 다시 이야기해야 해.’
“전하, 드릴 청이 있습니다.”
“……뭐지.”
그의 곁, 창문가에는 방과 어울리지 않는 까마귀 한 마리가 있었다. 까마귀의 목에는 빛으로 된 가는 사슬이 연결되어 있었다. 닉타였다. 까마득하게 위계가 높은 악마인 크렘시아를 피해 모습을 바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제 클레멘츠는 닉타를 통해 다시 나에게 저주를 내릴 것이다. 그럼 나는 또다시 말 못 하는 병아리가 되어 방 안에 갇히고 말겠지.
하지만 벨라와 그런 식으로 헤어져서, 한 집 안에 있으면서도 대화도 못 하는 상태로 시간을 보낼 순 없었다.
클레멘츠가 시찰을 끝내고 수도로 돌아가기 전 모든 걸 해결해야 했다. 벨라의 마음도, 내 저주도.
나는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지금부터 하루만 시간을 주세요. 하루만, 인간으로 있을 수 있게 해 주세요.”
예상외로 그는 딱 잘라 거절하지 않았다. 낮은 목소리로 어쩔 셈이냐고 묻는 그에게, 나는 간절히 호소했다.
“해야만 하는 일이 있고, 꼭 이야기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탁이에요. 전하께도 유익한 일입니다.”
여전히 내 머릿속에선 벨라의 일이 곧 클레멘츠의 일이었다. 설령, 만약에 정말로 이제 둘 사이에 더는 사랑이 없다고 해도…….
마음이 찢어지듯 아팠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벨라가 클레멘츠를 죽이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 * *
모나한 저택의 부지는 저택 뒷면과 측면을 감싸는 넓은 숲이었다.
노랗고 하얀 봄꽃이 꽃망울을 터뜨리며 싱그러운 냄새를 퍼뜨렸다. 부드러운 햇살이 나무 사이사이를 뚫고 내리쬐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내 마음은 초조했다. 신경은 온통 한 사람에게 쏠려 있었다.
긴 머리를 촘촘히 땋아 내리고 붉은색 사냥복을 입은 벨라. 벨라는 모나한 백작과 클레멘츠 사이에 활을 들고 서 있었고, 근처엔 카시스는 물론이고 백작가의 수행원들이 있었다. 터놓고 그녀와 얘기할 수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모나한 백작은 열심히 이 야외 활쏘기를 준비했다. 하지만 어제 저녁 살롱에서 벨라가 나가 버리고, 이후 클레멘츠에게 탈탈 털리자 멘탈이 버티지 못한 것 같았다.
“활쏘기? 으하하…… 그런 짓 다 소용없다. 전하께서 안 오실 텐데 쓸데없는 짓이야. 취소해!”
그렇게 취소되는 듯했지만, 벨라는 당당하게 저택을 벗어나 탁 트인 숲으로 갈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