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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24)화 (24/218)

24화

다음 순간, 한 꺼풀 바깥으로 밀려나 있던 통증이 한꺼번에 엄습했다. 전부터 아려 오던 등줄기가 더 심하게 화끈거렸다.

“악! 으억! 아!!!”

그리고 난 가히 세련되지 못한 비명을 지르며 침대 위에 엎어졌다.

“조금만 참아라. 낫게 해 줄 테니.”

“으어억 허어엉…….”

어떻게 낫게 해 준다는 거지? 이 밤중에 의사라도 부르나? 새살이 솔솔 마데X솔을 바르나?

뭐가 됐든 지금 내가 그의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누구에게 보일 수야 없었다. 누구 혼삿길 막힐 일 있나.

하지만 너무 아파서 인간의 언어를 잃은 나는 연신 ‘흐억 헝’ 같은 소릴 내며 철퍼덕 엎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벨라는 어쩌고 있을까? 숲으로 몸을 잘 피했을까? 클레멘츠를 너무 미워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자괴감, 걱정, 아픔이 뒤섞여 눈물을 줄줄 흘렸다.

“είσαι πνεύμα τριαντάφυλλου, διάβολος που τρώει την καρδιά, ένα χέρι που μπερδεύει τον ομφάλιο λώρο.(너 장미 넝쿨에 깃든 영혼이여. 심장을 먹는 악마여. 탯줄을 엉키게 하는 손이여.)”

감각이 다시 선명해지자 클레멘츠가 고대어 주문을 외는 소리가 들렸다.

저게 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면 좋으련만. 시골 몰락 귀족의 딸은 고대어 같은 고급 교양을 배울 틈은 없었다.

“Είστε ο διευθυντής του Άρης, το όνομα του μωβ, Κρήμσια. γιατί ο κύριος της πανδαιμόνιο σε καλεί, απαντήστε. (화성을 주관하는 핏빛의 이름 크렘시아는, 복마전의 주인의 부름에 응하라.)”

클레멘츠의 상처에서 나오는 빛이 몇 배는 더 강해졌다. 어두운 방 안이 대낮보다도 밝아질 만큼.

그리고 허공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불렀어? 나의 뒤싱겐! 너의 적을 멸하러 왔어. 자아, 전장은 어느 방향이지?”

저건…….

커다란 전사, 혹은 장군.

화려한 장밋빛 전신 갑옷에다 철갑 투구를 눌러쓴 여성. 모습을 전혀 알아볼 수 없었지만 굉장히 호전적이란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목소리와 말투, 커다란 창을 당장이라도 어딘가로 던질 태세인 손까지.

“전쟁이 아니다. 크렘시아, 이쪽을 봐.”

클레멘츠가 소환했으니 마족일 테고, 명확한 형태나 기운찬 목소리를 보아 마물 따위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악마. 그것도 상당히 층위가 높은.

악마, 크렘시아는 제 목과 연결된 클레멘츠의 빛 사슬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가 가리키는 대로 내 쪽을 본 악마는 건틀렛을 낀 손으로 투구의 뚜껑을 벗겼다. 끝이 치켜 올라간 장밋빛 눈이 물끄러미 날 응시했다.

그 순간 엄청난 위압감에 숨이 턱 막혔다. 나를 둘러싼 공기가 난데없이 뜨겁고 밀도를 가진 물질이 되어 버린 듯한 느낌.

“……그러니까 이 비 맞은 병아리 같은 여자아이가 너의 적일까? 나의 뒤싱겐? 죽이면 되니?”

네?!

클레멘츠의 입에서 ‘응’ 비슷한 소리라도 흘러나오면 그 즉시 내 목숨은 아예 없던 것이 될 것만 같았다.

다행히 클레멘츠는 즉시 부정했다.

“죽이란 게 아니다. 살리라는 거야. 부러진 건 붙이고, 어긋난 건 맞추고, 찢어진 건 다시 이어. 지금 당장.”

“아…… 뭐야. 그쪽이구나.”

크렘시아는 흥이 팍 식은 듯 손에 쥐고 있던 창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장미를 형상화한 창날의 육중한 무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긁혔네, 바닥. 틀림없이 긁혔다.’

안쓰러운 을의 삶이여. 아파 죽겠는데도 백작가 하인들이 열심히 때 빼고 광낸 돌바닥에 생채기가 났을 거란 사실이 신경 쓰였다. 그리고…….

펑!

불빛이 번쩍하더니 충격적일 만큼 아름다운 여자가 웃으며 다가왔다.

이것이 인간을 초월한 미적 경지인가? 내 눈은 차라리 폭력적인 수준의 아름다움에 곤혹스러울 지경이었다.

빈틈없는 갑옷과 투구 대신 풍성한 하얀 드레스 차림이었다. 크렘시아의 키는 상당히 컸고, 진분홍색 머리카락은 끝으로 가면 불꽃이 된 듯 끊임없이 일렁였다.

“짜안- 미안. 놀랐지? 마계 서열 5위, 붉은 마공작 크렘시아예요. 장기이자 취미는 생명을 꽃피우기-!”

왠지 ‘생명을 꽃피운다’란 표현이 아주 중의적일 거란 느낌이 든다.

왜, 생명 그 자체인 피를 전장에 흠뻑 뿌려 놓고는 ‘어머! 아름답게 꽃이 피었구나!’라고 천진하게 웃을 듯한, 그런 느낌…….

“물론, 그 자체로 꽃인 생명을 다루는 치유 마법에도 능하니 걱정하지 마. 어디 보자, 우리 병아리 아가씨는…….”

크렘시아는 친절한 태도로 침대에 앉았다. 방금 전 나를 처치해야 할 해충이나 치워야 할 무기물처럼 보던 표정과는 아예 딴판이었다. 거의 동시에 진단명이 그녀의 입으로 튀어나왔다.

“배면부 광범위 타박상. 좌측 늑골 5번에 골절. 소규모 내장 출혈.”

아니, 네?

전생과 이생을 통틀어서 이렇게 많이 다친 적은 없었다. 병아리란 정말 연약한 존재구나.

“우리 아가씨 아주 의젓하네. 너무너무 아플 텐데 가만히 있고.”

의젓한 게 아니라 언니가 너무 무서워서 얼었던 건데요……. 그다음엔 언니가 너무 예뻐서 그랬고.

내가 지르던 기괴한 비명을 고스란히 들은 클레멘츠는 굳이 지적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신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듣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늦지 않아 다행이군.”

귀여운 병아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마물을 불러내 저주를 건 것까진 이해했다.

하지만 그는 나를 구하기 위해 위험한 맹수인 흑표범을 향해 검을 뽑아 들었다. 날 치료하기 위해 척 봐도 엄청 위계가 높아 보이는 악마까지 소환했다.

내가 인간인 걸 알면서도.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을까? 혹시…….

클레멘츠가 날 좋아하나?

‘풉!’

말도 안 된단 건 알고 있었지만, 문장으로 구체화하고 나니 더더욱 우스운 생각이었다. 그런 책 빙의물 같은 일이 일어날 리가 없잖아?

클레멘츠는 병아리를 좋아할 뿐이었다. 내가 저주를 받아 변신한 병아리를. 내가 아니라.

나는 방금 들었던 ‘클레멘츠가 날 좋…….’ 이하의 생각을, 머릿속 ‘자의식 과잉 방지를 위해 절대 열어 보지 마시오.’ 상자에 넣어 봉인했다.

음! 좋아. 이로써 나의 인식은 현실에 더욱 가까워진다.

“그런데 말이에요-.”

오른손 가득 장미색 빛을 끌어올려 내 몸에 불어넣던 악마가 입을 열었다.

그 매혹적인 빛이 흡수되는 동안 통증은 날아가고, 난 훨씬 편하게 숨을 쉴 수 있게 됐다.

“아가씨는 나의 뒤싱겐이랑 무슨 사이일까? 어떻게 저렇게 초조한 기색으로, 숨 쉬듯 자연스러운 고대어조차 틀리고. 한낱 치유 마법 좀 써 달라고 나 같은 대악마를 소환한 걸까? 으응?”

여러 개의 반지를 낀 길고 우아한 손이 내 뺨을 톡톡 건드렸다. 크렘시아의 목소리에선 순수한 호기심과 장난기가 느껴졌다. 용기를 내어 마주 보자 크렘시아는 생긋 웃었다.

그녀와 같은 고위 마족이라면 손가락 두 개만으로도 나를 짜부라뜨릴 수 있을 텐데. 그렇게 강하면서도 인간이 할 만한 오해를 똑같이 하는구나.

마침 머릿속으로 그 주제에 대해 정리를 마친 나는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저는 전하의 애완동물이에요.”

크렘시아는 놀란 듯 장밋빛 눈을 치켜뜨고 날 쳐다보다가 클레멘츠를 돌아보았다.

“그런 취향이…….”

“망할. 아니야!”

“흐흥-.”

아무래도 내 변호가 필요한 시점 같다.

후……. 비록 클레멘츠가 실제로 병아리 페티시 변태 새끼긴 하지만……. 날 치료하려고 노력해 주었으니 체면 정돈 차려 줘야겠지.

“생각하시는 그런 내용은 아니에요. 황태자 전하께선 제가 아는 사람 가운데…… 제일…… 건전하시고…… 에, 자애롭고, 바람직한 취향을 가지신…… 분이랍니다.”

“오필리어.”

“예?”

“넌 웬만하면 무슨 말이건 억지로 하지 마라.”

앗, 이런. 전혀 도움이 안 됐나 보다.

크렘시아는 내 말을 듣다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가벼운 두통이 온 것처럼 관자놀이를 짚기도 했다.

“재미있는 목소리구나, 아가씨.”

“예?”

“쉿. 말하지 마.”

“흡.”

하얗고 매끄러운 손이 내 입을 가렸다. 반대쪽 손은 내 턱을 살짝 잡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악마의 눈이 내 목에 와서 멎었다.

“호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내 목에 찍혀 있었던 동그란 인장을 발견했다. 여섯 잎의 꽃 형태가 들어간 그 인장은 내 목소리에 깃든 미약한 마력과 관계가 있었다.

“그랬군. 그랬어.”

“웁우읍.(뭐, 뭐가요?)”

그래 봤자 병아리 눈물만큼 미약한 마력일 뿐이니 마계 서열 5위의 대악마에게 의미가 있지는 않을 텐데.

나는 여태껏 이 마력으로 레몬 크림 파이 하나 값도 벌어 본 적 없었다. 혹시 뭔가 쓸데가 있는 걸까? 알려 주면 좋으련만!

알려 줘요! 알려 줘! 그러나 크렘시아는 내 기대감 어린 시선에도 그저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래서, 정말로 무슨 사인데? 아무 사이 아니야?”

“네가 기대할 만한 관계는 전혀 아니다, 크렘시아. 쓸데없는 호기심 거두고 치료나 마저 하지.”

그녀는 만만한 악마가 아니었다. 싸늘할 만큼 단호한 클레멘츠에게 한 차례 입술을 비죽거린 후 다시 내게로 주의를 돌렸다.

“그는 복마전의 주인으로 악마들을 부릴 권리가 있지만, 나는 나의 뒤싱겐의 대모로서 가만있을 수 없어. 이 크렘시아가 보기엔, 둘이 잘 어울리거든.”

대모?

클레멘츠에게 악마 대모가 있다는 이야기는 전혀 들어 본 적 없었다. 그러고 보니 크렘시아는 그를 ‘나의’ 뒤싱겐이라고 불렀다.

너무 흥미로운 이야기라 멋대로 나와 클레멘츠를 엮고 있는 뒷말을 거의 놓치기까지 했다.

“아가씨, 나의 뒤싱겐, 보기 좋지 않아? 잘생겼잖아.”

크렘시아는 대답하라는 듯 입을 가린 손을 풀었다.

“네, 잘생겼어요.”

왠지 클레멘츠가 한숨을 쉰 것 같지만, 우린 이미 저쪽에 별 관심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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