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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23)화 (23/218)

23화

“삐빅뺙! 삑삐빅!(벨라, 날 놓아줘! 너는 이런 사람 아니잖아!)”

그러자 벨라는 화들짝 놀랐다.

[뭐라고? 잠깐, 너-.]

심지어 지금 뭔가 말을 한 것 같은데, 잠깐만. 어라?

[어…?]

[무슨…….]

[……에? 벨라?]

[…….]

한차례 혼돈과 침묵이 우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대체 어떤 원리로 말이 통하는 걸까? 같은 마물에 의해 저주를 받아서? 아니면 혹시 나도 마수와 관련이 있어서?

그 답보다도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벨라와 말이 통한다는 거였다.

[벨라, 나 오필리어야!]

[레오라,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네가 왜 병아리가 되어 있는 거야?]

[잠깐, 헉, 벨라, 나 너무 숨이 찬데 발 좀 치워 주면 안 될까?]

화들짝. 벨라가 움찔거리며 즉시 발을 물렸다.

나는 최대한 요약적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저주를 받은 일, 클레멘츠에게 주워진 일,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하다가 또 저주를 받은 것까지.

벨라는 우르르 쏟아진 내 말을 이해하려는 듯 한동안이나 침묵했다.

[그래서…… 그래서 그따위 쪽지를 남기고 사라진 거였어? 내가 그날 얼마나 너를, 너를 찾으러 내가 어디까지……!]

[미, 미안…… 콜록!]

[…….]

[콜록! 콜록콜록!]

나는 그 자리에서 몇 차례 삐빅거리며 기침을 쏟아 냈다. 몸이 달달 떨리고 등줄기로부터 통증이 전해졌다.

[이, 이, 이 바보! 그러니까 왜 저주 같은 것에 걸린 거야!]

[케, 케헥.]

[죽지 마! 죽기만 해 봐, 바보야!]

[나 안 죽어…….]

벨라는 안절부절못하면서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내 방에 약초가 있어. 그걸 가져올게. 주인이 돌보게 만드는 성가신 시녀야.]

[아냐, 가지 마. 별로 아프지 않아. 지금 그 모습으로 저택의 어딜 활보한다는 거야? 숲으로 피해, 벨라.]

[상관없어! 그 황태자 놈도 죽여 버리겠어. 감히 누구를 이렇게 만들고…….]

뭐?!

벨라가 하는 말은, 외부에는 그저 맹수의 으스스한 포효로 들릴 것이다. 나는 내려앉은 심장을 추스르며, 벨라에게 속삭이듯이 애원했다.

[안 돼, 안 돼! 벨라, 제발 그런 소리 하지 마. 쿨럭, 절대 안 돼! 그리고 빨리 숲으로 가!]

[……왜?]

아름다운 푸른 눈이 번갯불처럼 번뜩였다. 벨라는 기이하게 들뜬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너는 늘 나에게 하고 싶은 건 다 하라고 말했잖아. 지금껏 내가 살아오면서 바란 유일한 것은 그를 죽이는 거야, 오필리어.]

듣자마자 가슴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벨라의 어조는 확신에 차 있었고, 눈빛 또한 그러했다.

8년 동안 그렇게나 들인 내 노력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나? 클레멘츠를 향한 벨라의 살의는 막을 수 없고, 나는 단지 그 시기를 앞당겼을 뿐인가?

평소였다면 좀 더 여유롭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부드럽게 대응할 방법을. 덜컥 겁이 나서 희망을 내던져 버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저주를 받았고, 죽음의 위협에 여러 차례 시달렸고, 두렵고 아팠다.

[그것만은…… 안 돼. 벨라, 다시 생각해 봐. 그는 너에게 아주 좋은 사람일 거야. 나는 확신해.]

[……하?]

[우리 벨라루시아 아가씨, 그를…… 조금도 사랑할 마음은 들지 않아?]

클레멘츠에게 실망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내 마음대로 남주를 갈아치울 수 있다는 뜻일까? 두 사람의 만남 없이, 사랑 없이 이 세계가 성립할 수 있는 걸까?

나는 벨라의 운명에 클레멘츠가 개입되지 않은 뒷이야기 같은 건 모른다. 이대로 내가 알던 이야기와 벌어져 버린 채, 낯설어진 세계에 남는 것이 겁났다.

클레멘츠가 날 저주했다 해서 그가 죽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벨라의 의견을 무시하고 그녀에게 애원했다. 벨라의 두 눈이 가늘게 뜨였다. 크르르릉, 하는 목울림이 났다.

[너마저 그 소리야?]

[…….]

[오라버니처럼 한심한 소릴 하냐고.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나보고, 숨 막히는 옷을 입고 시집이나 가라고?]

[그런 말이 아냐. 벨라, 그 사람은 달라. 클레멘츠는…….]

[클레멘츠?]

폭풍 직전의 고요처럼, 벨라가 잠시 침묵했다.

[내가……! 방금 전까지 그 작자 때문에 무슨 모욕을 당했는지……!]

그때였다.

고요함, 그 자체이던 뒤뜰에 인기척이 생겼다. 대체 왜 이제야 발견했는지 의아할 만큼, 그 사람은 어둠 속에서 은색으로 빛나며 서 있었다. 달빛을 온전히 그 몸으로 빨아들이는 것처럼.

“오필리어.”

클레멘츠였다. 그의 얼굴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날 선 모습으로 굳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트레노스. ‘통곡’이란 이름을 가진 황가의 명검은 길고 늘씬한 자태를 뽐냈다.

원작에서, 그는 황태자가 소지하도록 되어 있는 그 검을 몇 차롄가 뽑아 들었다. 그럴 때면 벨라는 항상 그의 품에 안겨 있거나, 그의 뒤에 안전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지금, 클레멘츠는 검날을 정확히 벨라를 향해 겨누며 다가왔다.

[양반은 못 되는군, 황태자.]

벨라는 으르렁거리며 나를 감싸고 반원을 그렸다.

“거기서 비켜라.”

소설 속에 묘사되어 온, 그리고 지금껏 보아 온 클레멘츠는 늘 여유로웠다.

‘자비로운 강자의 여유, 곧 완벽한 황태자의 태도에 화룡점정인 것.’

책은 그렇게 표현했다.

그러나 지금은 멀리서도 그의 온몸을 조이고 있는 긴장을 느낄 수 있었다. 호흡 하나, 작은 동작 하나조차 팽팽히 당겨져 있었다.

“산짐승.”

심지어는 목소리마저도.

나는 한없는 슬픔을 느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클레멘츠가 벨라에게 진심으로 칼을 겨누다니! 비키라고, 산짐승이라고 하다니.

심지어, 아름답고 기묘한 긴장감으로 가득해야 할 흑표범 벨라와의 첫 조우 때에.

원작의 클레멘츠는 대치 상태의 흑표범에게도 칼을 뽑기는커녕 가벼운 위협 한번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벨라가 이를 드러내면 드러내는 대로, 달려들면 달려드는 대로 자신을 내어 줄 듯 굴었다.

이 역시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제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당신이야말로 꺼져요! 감히 어딜 얼씬거려?]

[벨라…….]

클레멘츠에겐 벨라의 앙칼진 말이 무시무시한 울부짖음으로 들릴 것이다. 벨라는 어쩌면 분노에 차서, 자신이 위험한 것마저 잊었나 보다.

[제발, 부탁이야. 도망쳐.]

힘이 빠진 내 속삭임은 마치 꺼져 갈 듯이 여리게 들렸다. 그 말에 크게 돌아보는 벨라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저 이 둘이 다치지 않고 이 상황이 끝나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다행히 클레멘츠가 예리한 트레노스를 휘두르기 전, 벨라는 날렵한 몸을 움직여 뒤뜰을 빠져나갔다. 넓디넓은 혼우드의 숲속으로.

다행인 걸까? 이것이?

클레멘츠는 내 곁에 꿇어앉았다. 고통에 신음하는 날 보는 그는 초조해 보였다. 곧이어 손에 들고 있던 트레노스의 날을 세워, 자신의 손바닥을 찔렀다.

‘……!’

척 봐도 상처가 깊었다. 단검으로 칼집을 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제 손바닥 위에 오각 별을 그려냈다.

“δένομαι κοντά στα φτερά μου.(나의 날개를 나에게 동여매노니.)”

이내 손으로 원을 그리며 내 주변에 핏방울을 떨어뜨렸다. 언젠가 들었던 낮은 음성이 울리고, 그의 손바닥은 명멸하는 빛으로 불탔다.

뚝, 뚝. 잔디 위에 떨어지자마자 핏방울은 밝은 보라색으로 빛나며 나를 감싸 안았다.

“επιστρέφουμε. μένουμε ήρεμοι. χαλαρώνουμε.(돌아가리라, 침착하리라, 평온하리라.)”

무거운 눈꺼풀을 한 차례 깜빡이자 시야가 뒤섞였다.

눈을 떴을 때는 뭔가 둔해진 느낌이었다. 마치 온몸의 감각이 두터운 벨벳 천에 한 꺼풀 감싸인 것처럼 느껴졌다.

“삐-이히-익?”

이럴 수가. 내가 슬로모션으로 말하고 있잖아.

클레멘츠가 건 술법 때문인가? 덕분에 통증도 한결 약하게 느껴졌다. 간신히 주변을 둘러보고서야 내가 클레멘츠의 침대에 누워 있다는 걸 깨달았다.

클레멘츠는 침대 옆에 선 채 계속해서 주문을 외었다. 조금은 익숙한 울림의 고대어가 귓전에서 몽롱하게 기어 다녔다.

허공에서 검은 포대 자루를 휘날리는 깡마른 마물이 튀어나왔다. 그때처럼, 클레멘츠의 손바닥과 연결된 빛의 사슬에 묶인 채로.

“뒤-싱겐……?”

남의 말도 버퍼링 걸린 것처럼 들리잖아.

클레멘츠는 나를 가리키며 닉타에게 뭔가 지시했고, 닉타는 둥둥 떠서 나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인간의 딸-. 죽고- 있어?”

뭐? 이건 또 무슨 새로운 종류의 시비인가.

눈에 안간힘을 주며 마물을 흘겨보았지만, 내 착각일까? 닉타의 얼굴은 이목구비조차 제대로 구분되지 않았지만 왠지 걱정하는 듯 보였다.

혹시 저건 사실 ‘많이 아파?’라든지 ‘다쳤어?’라는 뜻일까? 하기야 낮과 밤의 마물들은 말을 좀 특이하게 했었지.

나무토막처럼 뻣뻣한 검은 손이 나를 향했다. 검은 구름이 뿜어져 나와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음 순간 난 인간으로 되돌아왔다.

“모습이……!”

여전히 둔하게만 느껴지는 손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혀끝을 통해 전해지는 목소리. 가느다란 손가락. 내 것이다. 드디어 그렇게 바라던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거다.

반가움에 반사적으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하- 작게 터뜨린 웃음은 이내 기침으로 이어졌다. 느려진 감각과 인식이 흔들리는 몸을 따라잡지 못하는 바람에 머릿속이 온통 휘저어진 듯 혼란스러웠다. 비릿한 느낌이 입 안에 가득했다.

“……필리어. 오필리어!”

보랏빛이다.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황홀한 보라색 빛보다 좀 더 짙고 투명한.

나는 좀 더 눈을 똑바로 뜨고 나서야 그것이 클레멘츠의 눈이란 걸 알았다. 그는 불만스러운 말투로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다시 고대어를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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