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여기는 숲으로 둘러싸인, 비좁고 인적이 드문 뒤뜰이었다. 하인들이 숨어서 농땡이를 피우거나 쓰레기를 태워 버릴 때나 잠깐씩 드나들었다.
어쩐지 무슨 시나리오가 떠오르려고 하는데…….
“미물이 죄를 지으면 죽음으로 갚아야 하는 법. 그 건방진 병아리를 발견하거든 몰래 죽이거라.”
한낱 미물에게 복수심을 불태우며 암살을 지시하던 백작. 그의 명령을 들었던 건 앞에 있는 이 아이, 알핀이었다.
카시스도 하필 알핀이 나를 해칠 거라곤 생각 못 했을 것이다. 만찬 때 날 위해 돌을 데워 준 것도, 저장실에 숨어 있던 날 찾아낸 것도, 병아리 돌보는 법을 전수한 것도 모두 이 소년이었으니.
게다가 한낱 병아리를 죽이라고 지시하는 처참한 인품의 백작이 있으리라곤, 그처럼 착한 사람이 어떻게 상상이나 했을까.
“삑. 삐.(야, 잠깐…….)”
비록 원작에는 언급조차 되지 않지만, 알핀도 나처럼 어릴 때부터 백작가에서 일했다. 가끔은 집에서 챙겨 줬다며 감자나 치즈 같은 간식거리를 건네주기도 하는, 그런 정겨운 소년이었는데.
얘한테 암살당한다고? 너무 어처구니없는 끝이라 현실감마저도 없었다. 소용은 없겠지만, 나는 알핀을 설득하려고 해 봤다.
알핀, 물론 지금은 모르겠지만 나는 오필리어야. 너도 이게 잘못되었단 건 알고 있겠지. 후회할 짓 하지 마.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을 ‘삐약삐약 삐삐 삐약삐약 삐삐’ 소리를 멍하니 듣던 알핀은 눈물을 터뜨리더니 금방 오열 단계에 돌입했다.
“병아리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삑삐약. 뱍.(야, 좀 진정하고…….)”
아니, 이게 뭐지. 내가 왜 날 죽이려는 애를 위로하고 있는 거야?
“내가, 내가 얘를 따뜻하게 해 주고 창고에서 꺼내 주었는데. 기껏 살려 놨는데.”
그러니까 말이야! 그런데 슬슬 날 풀어 주고 백작님께 대충 변명하러 가든지, 클레멘츠에게 일러바치든지, 아니면 진짜 죽이든지 해야 하지 않겠니? 여기서 시간을 끌수록 너만 불리해질 텐데…….
내 걱정이 통한 건지 알핀은 이내 눈물을 쓱쓱 훔쳤다.
“그래, 덜 자란 닭을 잡는다고 생각하자. 닭도 오리도 많이 잡아 봤잖아. 집에 계신 어머니와 동생들을 생각해야 해.”
어? 아니 잠깐잠깐.
한없이 무뎌 보이던 알핀이 설마 마지막 선택지를 고를 줄은 몰랐다. 당황해서 얼어붙은 날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켁, 숨 막혀.
어? 이렇게 죽는 거야? 와, 환장하겠네? 이렇게? 여기서? 얘한테?
“흐흑, 미안해…….”
그렇게 사과해 봤자 안 괜찮다고 이놈아!
다가올 고통을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는데, 순간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핀.”
파드득 놀란 알핀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나는 재채기 섞인 울음소리와 눈물을 터뜨리며 그녀를 보았다.
벨라였다.
* * *
부러 낡아 빠져 보이도록 꾸민 홀. 창고를 뒤져 갖다 놓은 고물들. 어중이떠중이 악사들. 이 모든 게 오라비의 같잖은 소꿉장난이었다.
벨라루시아는 국조를 새기라고 강요받은 수틀과 오래된 방석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 같은 공간에 그녀가 원하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러나 벨라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참는 것뿐이었다.
오라비의 한심한 소리도. 황태자를 향한 충동도. 또 이 공간 전체의 궁색함, 안 맞는 틀에 대고 눌려 버린 듯한 답답함.
“레이디 모나한, 무엇을 수놓으실 겁니까?”
“……아다만티스입니다.”
마치 끈 달린 인형이 된 것만 같았다. 벨라루시아는 비웃음도 짓지 못했다. 이 굴욕감, 이 곤혹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건 모두 태평하게 병아리를 쓰다듬고 있는 저 남자로부터 기인했다. 멍청한 오라비가, 멍청한 방법을 동원해서, 그가 자신을 보도록 만들려고 하기 때문에.
클레멘츠 레스타 뒤싱겐.
잠잠히 떠다니던 살의가 들끓었다. 당신 때문에 나는, 당신에게만큼은 결코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 되었다.
만일 오필리어 레오라가 있었다면. 그애라면 이 곤혹에서 저를 구하기 위해 무엇이든 했으리라.
불충한 시녀, 대체 어딜 간 게지?
어디가 그렇게 급하고 즐거워서, 그리도 사랑한다던 제 주인을 버려두었단 말이야?
“벨라, 네가 원한다면 너는 무엇이든 이룰 수 있어. 네게 좋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아도 좋아. 네겐 선택할 권리가 있어.”
정작 오필리어는 없는데, 그 나긋하고 거슬리는 목소리는 버젓이 머릿속을 울렸다.
벨라루시아는 벌떡 일어났다. 악기를 빼앗아 던지고 황태자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아- 그래, 이렇게 하니 조금은 속 시원하구나. 조금은 쓸모 있구나, 너도.
후련한 발걸음으로 방을 향하던 벨라의 눈에, 창밖의 풍경이 비쳤다.
하인들이 주로 드나드는 작은 뒤뜰.
하인인 알핀이 거기 있는 것까진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대차게 우는 동작이었고, 손바닥에 든 것은…….
‘저건.’
벨라루시아는 해할 작정과 흉계와 음습한 감정에 대해서만큼은 귀신처럼 잘 알아차렸다.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 벨라는 뒤뜰을 향해 걸었다. 다음 순간에는, 뛰고 있었다.
자신이 황태자를 향해 쏘아붙일 때, 저 건방진 병아리도 자신을 향해 삐약거렸던가. 어찌 됐건 간에 거슬리는 병아리였다. 뒤싱겐 황태자에게 중요한 존재란 것 외에도, 미물 주제에 감히 제 시녀를 닮았잖은가.
암만 마음에 안 든다 해도 오필리어 레오라는 온전히 제게 속했다. 그 바보스러운 웃음과 재잘대는 목소리를 오만 곳에 흩뿌리다가도 결국은 제 옆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병아리는 아니었다. 보란 듯이 여리고 사랑스러운 상태로 한없이 돌아다녔다.
벨라는 오필리어를 닮은 것이 자신 이외의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싫었다.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오필리어를 떠올리게 되는 것도, 지독스러울 만큼 거슬렸다. 저 하늘에 걸린 태양이라도 쑥 뽑아다가 발톱으로 바수어 버리고 제 방에 감추어 둘 수 있다면. 영원한 밤이 온다 하더라도 그러면 좋을 텐데.
“이름이 오필리어라고 했던가.”
“그 아이 이름을, 기억하시는군요.”
당연히 황태자가 그 아이 이름을 기억하는 건 상상 이상으로 불쾌했다. 그것이- 그 남자를 손톱 한 쪽, 머리칼 한 올 남기지 않고 가지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오필리어의 이름 한 글자조차 누군가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은 감정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저 병아리는 나의 것. 당연히 그 목숨을 거두는 손도 내 것이어야만 해. 그건 변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알핀.”
어느덧 하늘은 핏빛으로 붉었다. 온누리를 압도하는 저 찬연한 광휘는 눈 깜짝할 새 온전한 어둠으로 뒤바뀔 것이다. 지금 여기 있으면 모습이 변하기 전에 안전하게 방으로 돌아갈 길이 없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 저택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비밀을 알았다. 그토록 자주 숲속을 드나든다는 걸 모를 뿐이지. 누구 덕택에.
“아, 아, 아가씨! 저, 그러니까 이건…….”
벨라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안쓰럽고 모자란 놈. 병아리를 처리하란 게 오라비의 멍청한 명령 중 하나란 거야 불 보듯 뻔했다.
“병아리 이리 내.”
“하, 하지만 아가씨…….”
“어서.”
소년은 쭈뼛대며 노오란 털 뭉치를 내밀었다. 벨라는 그 삑빅대는 가녀린 것에 눈을 고정하며 말했다.
“가서 오라버니께 전해라. 이 병아리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가만 놔두지 않으면, ‘괴물’로 변해서 밤중에 황태자 전하의 심장을 뽑아 먹고 말겠다고.”
“아, 아가씨……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어서 돌아가!”
그녀의 호통에 소년은 후다닥 달아났다.
자, 그러면.
벨라는 이제야 온전히 제 손에 맡겨진 병아리를 내려다보았다. 부드럽고 약한 것. 클레멘츠 레스타가 원하는 것. 오필리어를 닮은 것.
“삐약…… 삐! 삐!”
석류처럼 붉던 노을빛이 순식간에 어둠의 아가리로 삼켜졌다. 동시에 그녀는 검은 구름에 휘감겼다.
* * *
“삐약…… 삐! 삐!(벨라, 나야! 못 알아보겠어?)”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드디어 벨라와 단둘이 마주 보게 되었는데, 말이 안 통하다니!
“그대는 이 아이를 죽일 생각이었지 않나.”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아직도 날 죽일 생각일까?
그렇다면 알핀이 돌아갔더라도 난 여기서 죽게 되는 거다. 그것도, 8년을 금이야 옥이야 돌봐 온 벨라에게. 어떻게 벨라가 그럴 수 있는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가 병아리로 변할 때처럼, 검은 머리의 아름다운 소녀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칠흑처럼 새까만 기운이 그녀를 빈틈없이 감싸는 바람에 나는 손바닥 위에서 튕겨져 날아갔다.
“뀩!(악!)”
풀조차 듬성듬성한 맨땅이라 등줄기가 얼얼했다. 그리고 내 앞에는…….
크고 날렵한 체구. 깊은 밤의 가장 순수한 어둠으로 이루어진 듯한 가죽. 가장 조용하고 우아하게 움직이는 짐승. 나의 흑표범, 벨라가 푸른 눈을 떴다.
아무리 인적이 드물다 해도 이곳 역시 저택 안이었다. 벨라는 어서 뜰 바깥의 숲으로 몸을 피해야 했다.
그러나 흑표범 벨라는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왠지 모를 공포감에 도망치려고 해 봤지만.
‘컥!’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땅에 부딪치면서 어디 한 군데 부러진 모양이었다.
벨라는 저항하지 못하는 내 몸 위에 그 넓고 두툼한 발을 슬쩍 올렸다. 콩닥, 콩닥, 콩닥, 콩닥- 조그만 심장의 울림이 벨라의 발바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힘주어 누르면 나는 그대로 세상을 하직하고 말겠지.
“삐, 삐이-.(베, 벨라…….)”
날개를 파닥이며 몸을 비틀자 벨라는 발가락 사이를 벌려 나를 더 견고하게 옥죄었지만.
“…….”
한참 동안이나 힘을 주지 못했다.
가슴속에 한 줄기 희망이 솟아났다. 역시! 벨라는 함부로 생명을 해칠 만한 사람으로 자라지 않았어.
말만 살벌하게 하지, 이제 옛날 옛적의 대마녀랑은 다른 사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