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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21)화 (21/218)

21화

“하하, 전하께서 저택에 머무르시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군요.”

“그렇군.”

“이 모나한, 전하께서 오신 영광을 기리고 부족하나마 조금이라도 더 대접하고자, 명일 야외 활쏘기 연습에 전하를 초대하고자 합니다.”

“활쏘기라?”

머리만 쏙 디밀고 백작과 클레멘츠를 번갈아 보았다. 클레멘츠는 구미가 조금 당긴 눈치였다.

혼우드의 드넓은 숲. 탁 트인 야외 공간에서 하는 활쏘기 연습은 황궁에서 화려한 생활에 익숙해진 그라도 마음이 끌릴 것이다.

더구나 활쏘기는 벨라가 아주 잘했다. 활을 잡고 있을 때면 벨라는 자유롭고 상쾌해 보였다.

이번만큼은 백작이 머리를 잘 썼다 싶었다. 수도의 아가씨들은 좀처럼 보여 줄 수 없는 모습일 테니.

“그렇습니다. 부족한 제 동생도 함께 참여코자 합니다만……. 흠흠. 부끄럽지만 벨라루시아 녀석도 활솜씨가 있습니다.”

“그렇군.”

“제가 볼 때는 결코 그 정돈 아니지만, 활을 쏘는 벨라의 모습을 본 혼우드 사람들은 저 애에게 ‘숲의 요정’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더이다. 허허허! 저 선머슴 같은 녀석이 요정이라니!”

“그렇군.”

백작은 우스워 죽겠다는 듯 껄껄댔지만 아무도 그처럼 웃고 있지 않았다. 억지로 미소를 띠고 있거나,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표정을 짓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몰래 시계를 꺼내 보는 이도 눈에 들어왔다. 클레멘츠의 경우 완전한 무표정이었다.

“심지어 어떤 음유시인은 그 숲의 요정을 칭송하는 노래도 지었더이다. 한번 들어 보시지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악사가 하프를 연주했다. 디링, 딩- 하는 소리가 침묵 속에 울려 퍼졌다.

벨라는 혼우드에서만큼은 공주와 다름없었다. 아름다운 외모는 사람들의 선망을 더했다. 그렇지만 실제로 낯 뜨거운 별명이나 찬가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 건 아주 오래전에나 유행하던 풍습이었다.

더구나, 숲의 요정이라니.

벨라의 매혹적인 비밀을 사랑하는 내가 듣기엔 더없이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비밀을 평생 동안 억압하던 오라비가 그런 이름을 붙이다니. 꼭 그녀의 치부를 적당히 눈가림하는 것 같지 않은가.

바늘을 꼭 쥔 채 듣고 있던 벨라의 얼굴이 무섭도록 차가워졌다. 붉은 입술이 떨어지며 강한 목소리를 냈다.

“황태자 전하.”

조용하던 아가씨가 낸 목소리는 깜짝 놀랄 만큼 딱딱했다.

“저를 보지 마십시오. 이 자리에서, 이런 모습으로 이렇게 말해지는 저를 보지 마십시오. 단 한순간이라도.”

“뭐? 벨라! 그게 무슨 소리냐? 전하께서 너를 봐 주시면…….”

벨라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제가 못 참고 당신의 두 눈을 파 버리기 전에 말입니다!”

“너! 너…… 이! 전, 전하.”

부리를 쩍 벌리고 있던 난 클레멘츠의 손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삐익!(벨라!)”

벨라는 자신을 허황된 포장지로 둘둘 말아 팔아 치우려는 오라비의 모욕을 참을 수 없었던 거다. 그녀는 순순히 팔리러 나온 물건이 아니었다. 마침내 자신의 감정을 느끼고, 목소리를 낼 줄 알게 되었다.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당장 눈을 깔지 않으면 뽑아 버린다는 소리를 황태자에게 하다니. 그놈의 대마녀 원혼 때문이겠지, 젠장! 황실 모독죄가 넉넉히 적용되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삐!(어서!) 삐약!(이건 아니야. 빨리 사과드려!)”

그녀의 새파란 벽안은 클레멘츠를 노려보았고, 백작은 벨라를 노려보았다. 벨라는 내 말을 들었을 리 없었고 내 쪽을 봐 주지도 않았다.

나는 벨라를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금세 클레멘츠의 손아귀에 다시 갇혀 버렸다.

이 와중에 눈치 없는 악사가 첫 소절을 시작하고 있었다.

디링, 디링, 딩.

“아아- 태고의 숲-.”

벨라는 악사의 하프를 빼앗아 던져 버렸다. 텅-. 난폭한 충돌에 울림통이 한차례 진동했다.

그 순간 자리에 있던 모두가 얼어붙었다. 단 두 사람을 빼고.

“이게 무슨 짓이지? 모나한.”

이번에 클레멘츠가 일컬은 모나한은 백작이 아니었다. 그는 명백히 벨라를 질책하고 있었다. 그러나 벨라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설마 제 오라비가 늘어놓은 헛소리를 믿으십니까?”

“벨라루시아 레우니스 모나한!! 너, 네가 이러고도 내 동생이더냐!”

“믿지 않으셨길 바랍니다. 그가 당신을 이 자리에 불러들여 고한 모든 것이 거짓이니까요. 혹 황족을 능멸한 죄를 물으시려거든 그에게 하십시오.”

백작은 당장이라도 화려한 천을 두른 토마토가 되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벨라는 그저 냉혹한 얼굴로 비웃듯 궁정식 절을 하고는 홀을 나가 버렸다.

“너이, 이이익……!”

백작이 전형적인 삼류 악당처럼 ‘이익’ ‘이이익’거리는 소리, 하프를 빼앗긴 악사가 불가항력적으로 딸꾹질을 하는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발생했다.

거기에 병아리 소리를 하나 추가한다.

“삐익.(클레멘츠.) 삐비비. 뺙. (제발 벨라를 용서해 줘. 틀린 말 한 거 하나 없잖아.)”

커프스로 잠긴 그의 소맷단을 부리로 끌어당기며 빌었다. 알아들을 수야 없겠지만. 이렇게라도 그의 주의를 돌려놓고 싶었다.

“삑삐비.(봤지?) 뺘아.(벨라가 쿨한 성격이다 보니 가끔 과격하게 말할 때도 있어.) 삐-뱍.(절대 본심은 아냐!)”

기껏 여주가 남주 죽이는 걸 막아 놨더니. 이번엔 여주의 처형 각이 선다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만일 벨라를 죽음에서 구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애완 조류가 되어 클레멘츠에게 아양이나 떨면서 살아도 괜찮았다.

클레멘츠는 가만히 나를 쓰다듬으며 일어났다.

“전하……, 전하……! 전하, 용서하소서! 제 동생이 다 부끄러워서 저러는 겁니다.”

모나한 백작은 벨라가 만약 들었다면 하프를 주워 들어 뚝배기를 깰 만한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 지경이 되고도!

“부끄러워서? 백작,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백작의 속 보이는 장단에 적당히 맞춰 주던 클레멘츠마저 이제는 그를 비웃었다.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눈뜬장님이로군. 과연 영주로서 혼우드를 맡을 자질이 있는지조차 의심될 정도다.”

“전하-!”

모나한 백작은 바닥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정말 부끄럽고 추잡한 몰골이었다. 모여들어 있던 악사들과 사용인들은 서로 눈치를 교환하더니 숨을 죽이고 우수수 나가 버렸다.

“……재밌군.”

바짓가랑이라도 잡을 기세인 백작을 보며 클레멘츠는 중얼거렸다.

하기야 재미있겠지. 번듯한 수도에서 태어나서 어디 이런 엉망진창 환장 쇼를 구경이나 했겠는가.

절대 긍정적인 뉘앙스의 ‘재미’가 아닌 것쯤은 백작도 눈치챘다. 그는 사색이 되어 싹싹 빌었다. 모나한 가에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곤란하군. 오필리어가 피곤해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빨리 쉴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예? 저요?

클레멘츠가 무시하고 지나치려 하자 백작은 정말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매달렸다.

“정무……! 영지 정무에 관련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황태자께선 서부 영지를 시찰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정무라.”

지긋지긋해 보이던 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러도록 하지. 카시스.”

“예, 전하.”

“모나한 영지에 관한 자료를 백작의 집무실로 가져오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

여기 도착한 첫날. 카시스 듀프레는 이미 모나한 백작의 비리에 대해 캐내고 있었다.

“보고하라.”

“영지 관리는 수도로 올라온 내용과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징세에 있어서 법망에 걸리지 않을 정도의 착복이 의심됩니다. 확실한 건 아직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합니다.”

카시스의 유능함이라면 그동안 이미 증거를 충분히 수집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백작은 클레멘츠가 응해 주자 반색했지만, 사실은 자기 꾀에 걸려 자빠질 예정이었다. 조만간 집무실에서 영혼까지 탈탈 털리겠지.

즉시 방으로 향하려던 카시스는 갑자기 머뭇거렸다. 자로 잰 듯 이성적이던 눈빛은 날 보며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전하. 오필리어 님을 우선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게 좋겠습니다.”

말은 제대로 해야지. 나의 흉악한 마수로부터 자료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는 거잖아.

내가 그날 서류를 망쳐 버린 게 카시스에겐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은 듯싶었다.

“삑비…….(이제 안 찢을 건데…….)”

클레멘츠는 잠시 생각하더니 카시스의 손바닥 위에 나를 소중히 내려놓았다.

“서둘러라.”

* * *

“오필리어 님, 방에 도착하면 얌전히 계셔야 합니다. 밖으로 나서시면 안 되고, 특히 종이를 찢으시면 안 됩니다.”

얘는 내가 기회만 있으면 사고 치는 병아리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맞네. 그동안 내 행실을 생각하면 아주 합당한 추론이었다.

“삐이익…….(하지만 그건 다 이유가 있었어.) 삐익…….(이젠 깽판 놓을 기력도 다 빠졌다고.)”

카시스는 날 쓰다듬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제 모나한 백작가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 보고서가 황궁으로 들어가 벌금을 물거나 영지가 박탈되는 걸까? 아니면 단지 약점을 잡아 백작에게 주제를 일깨울 셈인 걸까?

벨라는 어떻게 되지? 클레멘츠도, 백작도 그 아이를 벌하지 않아야 하는데…….

고민에 끙끙 앓다가 카시스의 단단한 손과 안정적인 보폭에 몸을 맡기고 있자니, 빠르게 노곤노곤해졌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쉬이, 병아리님.”

알핀? 뭐야, 왜 또 너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백작의 시종 알핀의 말랑한 손바닥 위였다. 꺼져 가는 저녁 하늘 빛이 세상을 물들였다. 밀짚 색 머리칼을 가진 알핀의 얼굴은 그늘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듀프레 후작님께서 급한 일이 있으신 것 같기에, 제가 대신 방으로 모셔다 드리겠다고 했어요.”

그렇구나. 그런데 여긴 클레멘츠의 방이 아니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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