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어, 어떻게?
중요한 서류 아니었어? 외지에 와서도 아침마다 일해야 할 만큼 일중독자 아니었냐고!
“오필리어.”
그의 입에서 떨어지는 내 이름은 달콤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의미심장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꼭, 그 이름으로 병아리의 모습 뒤에 숨은 백작가의 시녀를 지시하듯이.
“나와 한번 해 보자는 거냐?”
“큑.”
쪼, 쫄지 말자. 이미 저주를 두 배로 받아 버렸는데 더 나빠질 상황이 뭐가 있겠어?
“삐!(그래요! 해 보자는 거다!)”
그래서 난 도리어 앙칼진 몸짓으로 통통한 양 허리에 날개 끝을 얹고, 그의 시선을 도발적으로 맞받아쳤다.
“나의 오필리어가 신경이 날카롭구나. 너마저 그 서슬에 고생할 필요는 없겠지. 당분간 업무는 미뤄 두겠다. 나가 보거라, 카시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카시스는 뭔가 그렁그렁 넘칠 듯한 눈을 빛내더니 군말 없이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뭐야, 미안하게…….
“대충 무슨 생각인지는 알겠군. 하지만 그런다고 내가 널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나는 클레멘츠의 손을 피해 뒷걸음질 쳤다. 그의 자수정 빛 눈 속에 자리하는 감정. 그것은 꼭…….
‘흥미?’
왠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삐이…….(미친놈…….)
“고작 이 정도 앙탈에 굴복할 거였다면, 애당초 너에게 저주를 내리지도 않았겠지.”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어쩌면 로판 최초로, 남주인공과 기 싸움을 벌이는 병아리가 되어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 올라가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실수인 척 발톱으로 이마의 피부를 살짝 뚫어 놔도 그는 하하 웃을 뿐이었다.
“전하, 아침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사용인들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난 이게 기회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클레멘츠라도 완벽한 황태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이상 평판을 중요하게 생각하겠지. 그런 그라면 백작가의 하인들 앞에서 고작 미물이 자신을 업신여기는 꼴을 두고 보진 않을 것이다. 아무리 아낀다고 해도.
“병아리님께서 드실 것도 가져왔습니다.”
“잘했군.”
바로 이때였다. 황태자가 식사를 받는 테이블 위에 오만하게 앉아 있던 나는, 눈에 익은 하인이 더없이 공손하게 내 앞에 내려놓은 모이 그릇을 즉시 힘껏 차 버렸다.
뎅그랑.
수없는 귀리 낟알이 화려한 다중의 포물선을 그렸다. 그중 몇 알은 클레멘츠의 음식 속에 떨어지기도 했고, 그의 머리카락과 옷에도 떨어졌다. 물론 몇 알은 그의 얼굴을 때렸다.
“…….”
“…….”
얼음물을 끼얹은 듯 싸한 분위기. 바로 이게 내가 원하던 것이다.
백작 오십 명을 모셔 놓은 것보다 귀한 황태자의 앞에서 이런 돌발 상황이 발생함에, 나의 직장 동료이기도 한 하인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죄송해요, 라스민 씨. 죄송합니다, 요리사님, 농부 아주머니 아저씨.
이게 다 네놈 때문이잖냐, 클레멘츠. 자, 이제 나를 쫓아낼 마음이 들었겠지?
“내 병아리는 성격이 활달하지. 그리 굳어 있을 것 없다.”
아닌가 보다.
이, 이래도 화 안 낼 거야? 이래도? 이래도?
나는 클레멘츠의 물 잔을 일부러 그를 향해 뒤엎고, 그의 흰 빵을 빼앗아 뜯어 먹으며 가능한 여기저기에 빵 부스러기를 흘렸다.
모든 것을 지켜보던 하인들은 낯빛이 하얘지다 못해 파랗게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클레멘츠는 처음처럼 잔잔한 미소를 띤 낯 그대로였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이 녀석 웃는 얼굴로 곱게 돌아 버렸구나.
“천천히 먹어라, 오필리어.”
그 목소리가 꼭 꿀에 떨어뜨린 듯 다정했다. 중간부터 클레멘츠는 아예 식사를 포기하고 나를 위해 빵 안쪽의 부드러운 부분을 조그맣게 떼어 주었다.
더 이상 어떻게 괴롭혀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나 역시 중간부터 아예 포기하고 그가 떼어 주는 빵 부스러기나 주워 먹고 있었다. 한숨이나 폭폭 내쉬며. 그렇게 식사가 끝났다.
무척 할 말 많아 보이던 사용인들이 나가서 뭐라고 말할지는 익히 짐작이 되었다.
황태자 전하가 병아리를 얼마나 끔찍이 아끼시는지에 대해서겠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패악을 부려도 다정하게만 대하신다고. 내일이면 저택 내에, 일주일 뒤면 혼우드 시내에까지 좍 퍼지리라.
젠장!
* * *
클레멘츠가 생각보다 훨씬 미친놈이었단 문제를 둘째 치고도 해결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였다. 그 문제들이 지금 같은 방 안에 사이좋게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황태자 전하! 와 주셔서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모릅니다. 사실 수도에는 이보다 더 세련되고 화려한 살롱이 많이 있겠지요. 하지만 전하께 반드시 혼우드의 살롱을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어떻게든 제 동생에게 클레멘츠를 붙여 놓으려는 모나한 백작 셀레우시스가 촉새처럼 떠들었다.
백작가 별관의 어느 작은 홀은 혼우드 전통 방식 레이스와 오래된 태피스트리, 어딘가에서 빌려 온 듯한 장식 천으로 한껏 고풍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이 집에서 8년 일한 내가 장담하는데 여기는 원래 이런 모습이 아니다. 그냥 평범한, 볕 잘 드는 홀이다.
“저희 모나한 저택에서는 매주, 이 ‘청동의 홀’에 유랑 시인들을 불러 모은답니다. 하하하, 어찌 전하께 감히 자랑을 하겠습니까만, 이 지역의 예술가들이 기댈 것은 모나한 가문의 지원뿐이니까요.”
“그렇군.”
“그들의 노래는 상상할 수 없이 오래된 전설을 읊고 있지요. 그중에선 뒤싱겐 황가의 선조를 찬양하는 시가도 심심찮게 발견된답니다.”
“그렇군.”
“오로지 전통과 고대 마법이 제국에서 제일 잘 보존되어 있는 이 혼우드에서만 가능한 살롱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런가.”
청동의 홀? 여긴 그런 이름은 없다. 그냥 ‘별관 2층 홀’ 혹은 ‘천장 동그란 거기’다. 매주? 지금 처음 듣는다.
현악과 피리로 고풍스러운 곡이 연주되었다. 그러나 삶에 찌들어 있는 악사들의 표정은 결코 백작에게 넉넉한 지원을 받은 것 같진 않았다.
그야말로 모나한 백작이 급조해 낸 살롱에서, 가장 주목받는 위치에 보란 듯이 앉아 있는 사람은 벨라였다.
그녀가 앉아 있는 의자는 백작가의 유물로 족히 20년은 창고에 얌전히 박혀 썩어 가던 것이었다. 앞에 있는 이젤 위엔 커다란 미완성 자수 작품이 놓여 있었다. 벨라는 단아한 드레스를 입고 손엔 바늘을 쥔 채 굳은 표정으로 수틀을 노려보고 있었다.
“제 동생 벨라는 매주 여기서 음악을 들으며 수를 놓는답니다. 아하하하. 그런 고리타분한 짓을 하면 수도의 아가씨들과 비교되니 그만두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듣질 않지 뭡니까.”
벨라가 제일 싫어하는 게 수 놓는 거다.
수틀에 놓아진 자수는 정말 벨라가 놓던 게 맞았다. 정말 싫어하지만 얄궂게도 시키면 꾸역꾸역 해내긴 했으니까.
벨라야말로 내가 가진 문제들의 시작이고 끝이었다. 벨라만 행복하다면, 그럼 된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최고 불행해 보인다. 허영에 지독하게 물든 오라비 탓에.
백작은 클레멘츠에게 벨라를 좀 주목하고 칭찬해 달라고 구걸하고 있었다.
“밑그림에서부터 대담한 기상이 느껴집니다. 레이디 모나한, 무엇을 수놓으실 겁니까?”
순순히 백작이 원하는 말을 내어 놓는 저 착한 사람, 카시스 듀프레다.
“……아다만티스입니다.”
“황실의 문장에도 들어가 있는 국조로군요. 그 옛날 초대 황제의 곁에 있었던 아다만티스 역시 혼우드에서 맹활약을 펼쳤다고 하니, 모나한가와도 연관이 있는 도안이겠습니다.”
사람이 듣고 싶은 말을 대신 해 주는 카시스의 저 완벽한 화술을 보라. 다만 저 말을 듣고 싶은 쪽은 벨라가 아닌 모나한 백작이었다.
벨라루시아의 오라비 셀레우시스는 카시스의 말에 싱글벙글 웃었다가, 단답으로도 거의 대답하지 않고 굳어 있는 벨라를 보고 표정을 구기길 반복했다.
“사랑하는 내 동생, 좀 더 활달하게 굴어 보렴. 봐라. 황태자 전하께서도 오셨지 않니?”
아마 백작은 카시스보다도 클레멘츠가 벨라에게 말을 걸기를 바랐을 것이다. 클레멘츠는 뭘 하고 있냐고? 앉아서 나를 쓰다듬고 있다.
내가 앉아 있는 쿠션은 모나한가에 대를 이어 내려온 옷감으로 지어 바친 것이었다. 가주의 예복을 짓는 데나 쓰이는 천을 깔고 앉아 있자니 자괴감이 몰려왔다. 이게 다 뭐 하자는 짓거리일까…….
살롱 이곳저곳에 다과를 나르는 하녀들과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악사들이 날 두고 수군거렸다.
“저기, 저 병아리예요. 황태자 전하의 옆에!”
“전하께서 5백만 크로나를 주고 저 병아리 하나를 사셨다지요. 무척 귀한 품종이래요.”
“나라 하나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하셨대요.”
“이름은 오필리어 마리아 에스텔라시온 뒤싱겐 3세라죠?”
아니야. 아니에요. 다 틀렸어요.
소문이 퍼질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진짜로 온갖 헛소문은 다 퍼져 있잖아. 하아….
그 와중에 귀도 좋은 클레멘츠가 내 쪽으로 얼굴을 숙이며 속삭였다.
“저 이름 괜찮은 것 같군. 어떠냐?”
“뺙(하지 마라.) 뺙뺙.(진짜 한 대 때리기 전에.)”
내 차가운 거부의 눈빛을 읽은 클레멘츠는 다시 바르게 앉았다. 입가에 걸린 미묘한 웃음이 굉장히 거슬렸다.
대체 이 난장판을 어떻게 하면 좋지?
“황태자 전하.”
벨라를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걸 포기한 백작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모나한 백작.”
클레멘츠의 눈이 닿지 않는 틈을 타, 백작은 나를 노려보았다. 힉, 설마 저 양반 아직도 날 죽이려고 벼르고 있는 건 아니겠지?
타 지역 귀족들을 만나고 올 때마다 무슨 자작이며 어디의 무슨 백작이 모나한가를 무시했으니 죽여 버리겠다고, 매번 분통을 터뜨리던 백작님이었다.
물론 그 귀족 나리들에게 실제로 암살자를 보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제 능력으로 충분히 죽일 수 있는 병아리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나는 슬쩍 클레멘츠의 손안으로 숨었다.
조금 당황한 듯 그의 손이 움찔거렸지만, 이내 손가락을 좀 더 오므려 내가 편히 들어가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