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그가 오필리어 레오라라는 존재를 용납할 수 없듯, 그 시녀에게도 이 상황이 부당할 것이다.
그쯤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선 안으로 넘어온 그의 병아리를 위해서 그 정도야, 얼마든 관대하게 넘길 수 있었다. 클레멘츠는 모른 척 웃으며 그 소리를 넘기기로 했다.
당돌하다가 말아 버린 그 소녀는, 제 울음소리의 뜻이 들린다는 걸 알아 버리면 그 즉시 입을 다물어 버릴 테니. 혹은 솜털이 보송보송한 모습으로 어색하나마 궁정식 존대를 주워섬길지도 모른다. 별로 그런 걸 듣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이 손 안에 이 작은 체온을 오래오래 가두어 두리라. 클레멘츠는 조심스럽게 감싼 손을 좀 더 끌어당기며 눈을 감았다.
* * *
“오필리어.”
햇살이 비쳐 들고 있었다. 하얀 침구 위에서 눈부신 얼굴이 아침보다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잘 잤느냐.”
흐트러진 머리칼과 다소 풀어진 옷차림, 아직 잠기운이 남아 있는 눈조차도 전문가들의 매운 손길로 이루어 낸 화보 같았다. 그러나 저 겉모습에 마냥 현혹되기엔 이젠 당한 게 너무 크고 씁쓸했다.
“삐약.(오냐, 넌 잘 잤느냐? 이 호로 잡놈아.)”
클레멘츠 놈은 뭐가 좋은지 웃음을 터뜨렸다. 아, 혈압 오른다. 이제 내 눈에 그는 그저 사사건건 나의 원대한 계획을 방해하는 원수, 악의 가득하고 이기적인 병아리 페티쉬맨……으로 보일 뿐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 걸까? 그는 어쨌건 주인공인데. 암만 이 자식이 지금 엇나가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그의 어깨엔 이 세계의 운명이 걸려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연의 끈으로 벨라와 묶여 있겠지.
그러니 참자. 벨라를 생각하자. 이 순간의 기분에 지배되지 말자. 둘의 사랑을 위해 버티고 버텨 온 8년의 세월을 생각하자…….
그는 내게 손을 뻗었다.
“하루를 시작할 시간이군. 이리 올라오거라.”
“뺙뀨!!!!(못 참아! 꺼져!!)”
뻐억.
……뻐억?
나는 내 날개를 쳐다보았다.
몸속의 거부감을 끌어모아 있는 힘을 다해 쳐낸 나머지 날개가 뻐근하게 저렸다. 보험도 안 되는 세계관에서 너무 몸을 막 썼나?
심상찮은 소리를 들은 클레멘츠는 즉시 걱정하며 날 굽어보았다.
“이런. 아무리 내가 싫어도 너무 세게 치진 말거라. 네 날개가 아직 여리잖으냐.”
“삑, 삐익…….(치, 친절한 척하지 마, 다 너 때문이잖아.)”
새삼 인간일 때와 병아리일 때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극명히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병아리가 그렇게 좋을까? 그리고 인간은 그렇게 싫을까?
아니, 그라고 해서 모든 인간을 싫어하는 건 아닐 것이다.
애독자로서 잘 알고 있지 않나. 클라티아 제국의 황태자로서 바로 서기 위해 그는 오랜 기간 고독한 싸움을 해 왔다. 황비의 친정인 페리윙클가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는 2황자와 달리, 클레멘츠는 일찍이 어머니인 황후가 죽어 의지할 곳이 없다시피 했다.
제 편이 적은 황궁에서 완벽한 황위 후계자로 자리 잡기까지, 모르긴 몰라도 엄청 힘들었을 것이다.
흥, 그렇다고 해도 내게 저지른 잘못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난 엄격한 일자로 부리를 다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음?
나를 살피려고 쭉 뻗은 그의 목에 뭔가 붉고 얼룩덜룩한 게 보였다.
매끄러운 게 상처나 흉터 같지는 않고. 정교한 무늬를 그리며 목덜미를 지나 어깨 쪽으로 길게 이어졌다. 나머지는 옷에 덮여 보이지 않았다.
저게 뭐지?
그러고 보면 그는 항상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채웠고, 목을 드러내지 않는 옷을 입었다는 묘사가 있었다. 그 탐스러운 목덜미가 꽁꽁 감춰져 있어서 더욱 먹고 싶다고, 벨라는 자주 독백했었지.
그렇구나. 클레멘츠 이 녀석……. 문신을 가리려고 항상 그런 옷을 입었던 거구나!
21세기 현대 사회에서도 공적인 일을 하려면 문신을 감추는데, 전근대 제국의 황태자가 오죽했겠어? 늘 완벽해야 하는 압박에 대한 일탈로 어느 날 대뜸 몸에다 그림을 그리긴 했는데, 누구에게도 보일 수는 없었던 거겠지.
독자님들! 제가 클레멘츠의 숨겨져 있던 설정을 제일 먼저 알아냈어요! 세상에! 글쎄 어깨 쪽에 대문짝만 한 문신이 있지 뭐예요!
언젠가 벨라가 저걸 보게 되면 어떤 반응을 할까? 궁금해. 너무 궁금…….
음, 뭐지? 이 못마땅함은?
아, 이건 그거였다.
대한민국 3대 마요. 참치마요, 치킨마요, 언니 그 남자 만나지 마요.
여전히 ‘뷰티 앤 더 비스트’도 너무 좋고 벨라도 좋았지만, 클레멘츠 놈을 볼 때마다 내 속에서 무언가 짜게 식어 버리는 느낌. 이 회의감, 이 탈력감!
이건…… 말로만 듣던 탈덕인가?
남주 인성이 실망스러워서 하차합니다. 그런데 이미 빙의를 해 버려서 하차를 할 수가 없네요. 이게 뭔가요? 소비자 보호원에 고발할 거예요. 흑흑!
굳이 얘가 남주여야만 하는 걸까?
원작 소설의 제목은 ‘뷰티 앤 더 비스트’. 전통적으로 야수는 남성, 미녀는 여성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벨라가 곧 미녀이고, 또한 야수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굳이 저놈과 잘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다른 좋은 남주인공 감이 있을 거야. 예를 들면 카시스라든가.
“전하, 카시스입니다.”
“들어와라.”
앗. 양반은 못 되는구나.
문이 열리기 전, 클레멘츠는 목깃을 끌어 올려 드러났던 붉은 문신을 가렸다. 아주 익숙해 보이는 동작이었다.
카시스는 오늘도 클레멘츠가 봐야 할 서류를 한 묶음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다른 한 손엔…….
“병아리 아침 식사도 가져왔습니다.”
……!!
역시!
마음속으로 클레멘츠 손절 각을 재고 있던 나는 대뜸 그에게로 포로롱 날아갔다.
우리 카시스 듀프레 후작 각하! 밥도 잘하지, 잘생겼지, 똑똑하지, 가문도 훌륭하지. 무엇보다 어디 사는 누구와는 다르게 인품도 좋다.
이 정도면 벨라와 이어 줘도 손색없지 않을까? 그는 배려심이 넘치니까 벨라의 마음고생도 덜겠지.
“아하핫. 그렇게 좋으냐? 천천히 먹어야지.”
“삑! 뺘!(그래, 좋구나! 호호!)”
카시스는 팔짝 뛰어오르는 날 쓰다듬으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귀리 볶음을 내어 주었다. 기쁜 마음으로 두세 번 쪼아 먹고 있자니 뒤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카시스.”
“전…… 전하?”
“불경하군. 나의 병아리다. 앞으로 나와 함께 살 테니 내 가족이나 다름없다.”
뭐지? 대체 이번엔 또 무슨 참신한 헛소리를 하려고…….
진심으로 기분 상한 듯한 클레멘츠의 눈빛이 카시스와 부딪쳤다. 너, 병아리가 그렇게 중하던? 능력으로도 충성심으로도 비길 자가 없는 카시스에게마저 쓴소리를 할 만큼?
“전하의 가족이시면 황족이로군요. 알겠습니다. 병아리님께 지체에 알맞은 대우를.”
엥?
헛소리마저도 이심전심으로 통하다니. 참으로 환장의 콤비가 아닐 수 없었다.
“이름은 오필리어다. 잊지 말도록.”
“좋은 이름입니다. 오필리어 님.”
……조금 전까지 카시스를 벨라의 새 남자 친구 감으로 고려했던 내 안목을 규탄한다!
대체 왜 말릴 생각을 안 하는 거지? 카시스가 아무리 착하고 잘나 봤자 그가 목숨처럼 떠받드는 주군이 클레멘츠인 이상 클레멘츠와 똑같은 놈이었다. 즉 얘네는 가망이 없다.
어떻게 하면 이 광기의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영영 클레멘츠의 애완조로 사는 수밖에 없었다. 황금 새장과 카시스 표 특제 식사. 물론 안락하기야 하겠지만 누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동물의 삶을 바랄까.
클레멘츠는 내가 사람이란 걸 알고도 거두려는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그럼 더 독하게 나가 볼까? 도저히 나와 같은 천장을 지고는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하게 해 주지.
“그럼 아침 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때마침 좋은 기회가 있군.
나는 악마 같은 웃음을 지으며 포롱포롱 날아 책상 위로 올라갔다. 내가 서류 쪽으로 접근하자 카시스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하하, 어떠냐.
“병, 아, 아니, 오필리어 님. 이쪽은 먹을 게 없습니다. 저쪽으로 가서 노시죠.”
“카시스, 오필리어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 주어라.”
“……큭, 예…….”
후훗. 안쓰러운 후작이여, 어리석은 황태자여. 네가 베푼 관용에 대해 곧 처절히 후회하게 될지니.
나라를 무너뜨리기로 작정한 제게 매달려 정신 못 차리는 왕을 보며 피폐한 웃음을 터뜨리는 경국지색의 미녀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나에겐 흉계를 말하는 고운 입술 대신 단단한 부리와 튼튼한 발이 있었다.
찌익, 찍. 비단을 찢으면 포사가 웃었듯이, 서류 찢어지는 소리가 내 귀엔 그리도 달콤하게 들렸다.
카시스는 충격에 휩싸여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동안 나는 신내림을 받은 듯 움직였다. 잉크병을 걷어차고, 서류 더미를 엎어 놓고, 북북 찢어 놓은 종이 속에서 발장구를 쳤다.
으하하, 흩날려라 서류앵! 야, 카시스, 백업은 해 뒀냐?
어느새 책상 위에는 한때 멀끔한 서류였던 것들과, 한때 멀쩡한 필기구였던 것들이 곤죽이 되어 한데 뒤섞였다.
“그, 그만…….”
이윽고 듀프레 후작이 벌떡 일어났다. 애꿎은 의자가 나동그라졌다.
“전하, 제발 부탁입니다. 오필리어 님을 멈춰 주세요!”
이제 보니 카시스의 눈 밑엔 거뭇거뭇한 그늘이 있었다. 어쩌면 이건 그가 지난밤을 꼬박 새워서 작성한 건지도 몰랐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그 심연 역시 깊은 곳에서 나를 들여다본다고 했던가. 어떻게든 광기의 병아리 지킴이들을 몰아내려던 나는 일말의 죄책감마저 흐려진 상태였다.
이 정도면 날 포기하겠지? 제발 날 좀 버려. 병아리 좀 잃어 봐라, 클레멘츠.
승리를 예감하며 클레멘츠를 돌아봤지만…….
나는 충격에 그대로 멈춰 섰다.
클레멘츠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앞에서 엉망이 되는 책상과 마구 파괴되는 서류 따위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는 것처럼.
꼭…… ‘그래, 어디까지 하나 보자.’ 혹은 ‘재밌네.’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