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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8)화 (18/218)

18화

보랏빛 눈동자는 가만히 나를 마주 보았다. 그는 천천히, 조용히 웃었다. 달빛처럼 교교하고 아찔하게 아름다운 모습. 제국민들이 말로만 듣고 꿈에 그려 오던 완벽한 황태자의 자태 그 자체였다.

이번만큼은 나도 ‘그런 미소는 벨라한테나 지으라고!’ 같은 생각 대신 기쁘게 웃었다.

벨라 외의 사람에게 마냥 차갑고 계산적일 줄만 알았던 그가 사실은 나 같은 약한 사람의 입장도 헤아려 주는 사람이라고.

틀림없이 성군이 될 거고 분명 좋은 남주도 될 거라고.

그의 사랑을 위해서 앞으로도 기꺼이 헌신할 거라고.

내 부탁을 들어줄 줄로만 생각하고 믿었다. 바보같이.

“어이, 닉타.”

닉타? 나에게 저주를 건 쪽은 낮의 마물인 메라라며?

클레멘츠는 그 온화하게 미소 띤 얼굴 그대로 나를 가리켰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잠, 잠깐만요 전하…….”

“밤에도 병아리로 만들어.”

예? 잘못 들었습니다?

마물들조차 뜻밖인 듯 나와 클레멘츠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서로 눈을 마주했다.

“뒤싱겐의 말이야.”

“뒤, 뒤싱겐의 말이면 우린 어쩔 수 없어.”

저기, 방금 말 더듬은 거 맞지? 어쩐지 둘 다 내 눈을 피하는 것 같은데?

“잠깐, 이건 좀 아니잖아요? 전하. 농담이시죠? 제발…… 닉타. 밤의 마물님. 잠깐만요, 잠깐.”

잠까아아안!

매정한 밤의 마물! 닉타는 지체 없이 일어나 갈고리 같은 검은 손톱으로 날 가리켰다. 그 손끝에서 검은 구름이 쏟아졌다.

숲에서 하얀빛을 맞았을 때만큼 무력하게, 나는 검은 구름에 감싸였다.

기억나는 것은 한 가지였다. 이제는 아득하고 머나먼 전생, 핸드폰 액정으로 봤던 댓글 한 줄의 기억.

[저만 남주 좀 쎄한가요?]

‘뷰티 앤 더 비스트’가 연재되는 동안 꾸준히 제기되어 온 의견. ‘남주가 왠지 쎄하다.’ 내지는 ‘석연찮다’.

그 말을 귀담아 들을 것을.

나는 어땠던가? 그런 댓글을 볼 때마다 부랴부랴 클레멘츠를 실드 치기 바빴다.

이딴 놈을 위해서!

물론 클레멘츠가 벨라 외의 사람에게는 지극히 계산적이고 냉정하다는 거야 알았지만. 그런 데다가 이제는 남의 집 귀한 딸에게 고의로 저주를 씌우는 또라이일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왜 이렇게 됐지?’

하!! 왜 이렇게 됐는지가 중요할까? 어쨌든 지금 그는 뭐가 잘못된 건지 심지어 벨라를 사랑하지도 않았다.

즉, 지극히 계산적이고 야박한 놈일 뿐만 아니라 멀쩡한 사람에게 동물의 탈을 씌우는 싸(사)이코 자식이란 얘기였다. 겉모습만 아름다운 쓰레기란 말이다!

클레멘츠 레스타 뒤싱겐, 이 악마도 울고 갈 천하의 못돼 처먹은 망나니!

분노를 금할 길 없었다. 제 목숨을 살리기 위해 헌신한 내 8년을 이렇게 갚다니!

“오필리어.”

“삐약!(내 이름 부르지 마!) 삐! 삐!(이 사악한 놈아!)”

내게 내미는 손가락을 날개로 팍 쳤다. 그래 봤자 따갑지도 않은지 그는 간단히 나를 집어 올렸다.

“삐약.(좋은 말로 할 때 내 몸에서 손 떼라.)”

그가 픽 웃었다. 저 자식……. 분명 내가 욕한 걸 알고 있을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기분이 좋아 보일 리 없었다.

병아리가 그렇게 좋으면 근처 농장에서 한 마리 잡아 올 일이지. 생때같은 남의 집 딸 인생을 망치고 앉았다. 참나!

마물을 돌려보내는 건 소환보다 훨씬 간단했다. 짧은 고대어를 읊조리자 밤과 낮의 마물은 허공으로 사라지고, 빛으로 된 사슬과 손바닥에 피를 낸 흔적 전부 언제 그랬냐는 듯 없어졌다. 그리고…….

“잘 자거라, 오필리어. 이젠 아무 걱정 말고.”

무슨 소리야. 명경지수 같던 내 마음속에 지금 막 네놈 때문에 백팔 번뇌가 일어났잖냐! 진짜 환장하게 하네.

내 이름을 잘도 부른다는 게 가장 열 뻗치는 지점이었다. 여태껏 그리 아끼면서도 이름 하나 지어 주지 않고 ‘병아리’, ‘병아리!’ 하고 염불을 외던 주제에.

그는 다시 나를 두 손 안에 소중히 가두고 침대에 누웠다.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해 봤지만, 아무리 애써도 그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다. 두 날개와 다리로 손가락을 밀어 틈을 내려고 애쓰는 내게 클레멘츠가 속삭였다.

“혹시라도 빠져나갈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거야.”

“삐흐힉……!!!!”

이 미친 병아리 오타쿠 변태 새끼!! 맹세코 너의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다 쪼아 먹어 버릴 거야!

* * *

‘잠들었군.’

밤새도록 손안에서 꾸물댈 기세이던 병아리가 마침내 잠잠해졌다. 클레멘츠는 손을 조금 풀고 병아리의 마구 헝클어진 솜털을 가다듬었다.

비스듬히 들어온 달빛이 침대 위를 비추었다. 그는 보랏빛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했다. 왜 이렇게까지 하게 되었더라?

생각은 과거로, 이 병아리와 조우하기보다도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완벽한 황태자. 아다만티스의 축복을 받은 뒤싱겐 황가의 더할 나위 없는 후계자.

그는 그런 사람이 되기로 ‘정해져’ 있었다. 그의 의지로 어떤 이가 되고 싶었느냐와 상관없이. 또, 그 뒤의 미래가 어떠하냐와도 상관없이.

“전하, 불쌍하신 나의 전하. 꼭 완벽한 황태자가 되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래야만 저들이…….”

“이 어리석은 것. 클레멘츠, 네놈이 뭘 하고 싶고 뭘 원하는지는 하등 상관없다. 네가 어떤 이름으로 태어났는지 모르느냐? 누구의 아들로 태어났는지?”

“폐하, 저는.”

“대체 얼마나 더 짐을 실망시켜야만 직성이 풀리겠느냐! 나가거라!”

그래서 그는 기대에 답하는 법을 배웠다. 모름지기 황태자라면 어때야 한다는, 그 모든 기대에 부응했다. 생각보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 태도는 빈껍데기뿐이었다.

행동엔 절도가 있되, 그 안에 대의가 없다. 모든 예의범절을 몸에 배게 하였으되, 그 안에는 온정이 없다. 그는 다만 클레멘츠 레스타 뒤싱겐이라고 이름 붙여진 인형을 연기할 뿐이었다.

어려서부터 온정을 가지고 그를 대하던 유모나 카시스 듀프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별다른 이유가 있을까. 그들 때문에라도 더더욱 완벽한 존재가 되었어야 하는데.

마치 잘 다듬어진 기계 장치가 움직이는 것과 같았다. 어떤 외부 자극이 입력되면, 클라티아 제국 황태자로서 마땅한 값을 출력한다.

모든 사람에게 그림 같은 모습만을 보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는 초인이 아닌 인간이었다. 오로지 한정된 수의 사람에게만 그린 듯이 완벽한 황태자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철저한 계산에 따라 제가 굳이 역할을 수행할 필요 없는 이들을 쳐내 버렸다.

그 모든 것- 흠잡을 데 없는 태도, 가장된 여유로움은 실은 포식자의 여유 같은 것이 아니었다. 모두 살고자 치는 몸부림이고 발악이었다. 이해득실과 법도, 규율과 관습으로 그어진 칼 같은 선이 바로 그의 목숨 줄이었다.

그런데, 이 병아리는.

유독 귀엽고 온순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다가오는데 도망가지도 않고 까만 눈을 빛내며 서 있었다. 유독 보드랍고 노랗다고도 생각했다.

“삐, 삐…….”

그리고 그 조그만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 잘 뛰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던 심장이 그의 안에서 쿵 내려앉았다.

“……뭐야, 이 귀여운 건.”

클레멘츠의 행동을 규정하던 그동안의 법칙에 따르면, 이 병아리는 그에게 하등 쓸모도 없고 도움도 되지 않는 존재였다. 그러니 깊은 숲속에 혼자 있다 산짐승에게 잡아먹히건 말건 신경 쓰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왜, 손안의 작은 생명이 그토록 따스하고 경이로웠는지. 왜, 그 감각에 지금껏 목말라 있었다고 느꼈는지. 클레멘츠는 몰랐다. 병아리를 그대로 주워 온 것은 순수한 충동이었다.

그런데.

낮의 마물 닉타는 이 소녀를 그와 닮은 모습으로 바꿨다고 했던가. 정말 그랬다.

비단 짧게 굽슬거리는 밝은 금발이 병아리의 털빛과 같아서만은 아니었다.

그럼 무엇이 같은가?

클레멘츠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고 오필리어 레오라를 관찰했다.

울음을 터뜨리면서도 침착하게 행동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허둥대는 눈동자만 봐도 살아 보고자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천둥만큼 또렷하게 들리는 듯했다.

저 엉큼한 당돌함 때문인가?

가늘고 음조가 높은 목소리?

아니면, 어딘지 동글동글한 생김새?

혹은, 작은 몸집에 대비되는 큰 몸동작 때문인가.

그는 답을 발견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대체 어디를 보고 인간이 병아리와 닮았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한번 공통점을 찾아보던 그의 눈은, 더는 오필리어를 그의 사랑스러운 병아리와 무관하게 여길 수 없었다. 벨라루시아의 시녀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생명 줄 같은 그의 선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기껏 세워 둔 담장 안으로 폴짝 뛰어 들어온 것이다.

그는 낭패감에 치를 떨었다. 여태껏 지켜 내지 못한 적이 없는 견고한 울타리, 클레멘츠 레스타 뒤싱겐이라는 공들인 조각품 그 자체에.

저 여자가 흠집을 냈다.

그가 쌓아 올린 성은 완벽함을 잃는 순간 무너지는 종류였다. 애당초 안개의 숲속에서 작은 새를 주워 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다시 시간을 되돌린대도 그럴 수 없음을, 병아리를 보고, 듣고, 만지는 순간 느껴진 충만감의 강렬함을 알면서도 클레멘츠는 그렇게 생각해 보았다.

너처럼 작고 작은 것이 날 무너뜨리다니. 감히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나. 작은 새이려면 새인 그대로, 인간이려면 인간인 그대로 있지 그랬나.

병아리를 포기할 수도, 시녀를 죽일 수도 없었던 클레멘츠는 밤의 마물에게 저주를 명했다. 이토록 사적인 이유로 피에 깃든 힘을 쓰게 될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했을까.

“삐약!(내 이름 부르지 마!) 삐! 삐!(이 사악한 놈아!)”

그 결과로 뭔가 다른 게 들리게 된 것도 뜻밖이었다. 그 자신의 명에 의해 씌워진 저주의 인과가, 오필리어와의 사이에 말의 끈을 묶어 놓은 모양이었다.

“삐약.(좋은 말로 할 때 내 몸에서 손 떼라.)”

벌벌 떨며 깍듯한 존대를 갖추던 바로 그 목소리로 저런 불손한 언행이라니. 헛웃음이라 생각했던 것이 만면에 퍼졌다. 그래, 저 솔직한 말을 들으니 그는 즐거운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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