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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7)화 (17/218)

17화

‘……?’

수려한 은빛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 안에 한 꺼풀 덧입고 있던 재킷 자락도 들춰졌다.

“여기 있군.”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하빌 뿌리. 황실에서 자라 각종 독초와 약초를 알고 있는 클레멘츠가 그 냄새를 맡은 거였다.

‘망할, 대체 후각이 얼마나 예민한 거야?’

“환각제라……. 세상 순진한 듯한 얼굴을 하곤 이런 걸 숨겨 두었군.”

이내 그의 단검 끝에 내 유일한 믿을 구석이었던 주머니가 끌려 나왔다.

“안 그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두근, 심장이 어색하게 뛰었다.

“간밤 나는 이상할 만큼 깊은 잠을 잤지. 내 병아리가 없어졌는데 문도 창문도 다 닫혀 있었다. 밖으로 통할 만한 구석이 없었지.”

두근. 그의 눈빛이 이번엔 사나운 보랏빛 불꽃으로 바뀌었다. 이건 내 생명이 울리는 경보였다.

하빌 뿌리를 가진 백작가 시녀가 있다, 그건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백작가 시녀가 황태자의 침대에 들어왔다, 그것도 있을 만하다.

하지만 하빌 뿌리를 가진 백작가의 시녀가 황태자의 침대에 들어왔다는 건. 그것도 전날 밤 그에게 약을 쓴 정황까지 있다는 건?

즉결로 사살해도 할 말이 없었다. 마침 단검을 든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온몸이 심장이 되어 쿵쾅대는 것 같았다. 나는 비명처럼 외쳤다.

“제가 그 병아리예요!”

“뭐?”

“제가 당신의 병아리라고요, 전하. 제발 칼을 거두어 주세요.”

“이건 또 무슨 헛소리지?”

챙그랑. 단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이제 정말로 화가 난 것 같았다.

“저까짓 칼날이 없으면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할 것 같으냐.”

당연히 그가 날 죽이는 건 맨손으로도 쉬웠다.

어떡하지? 어떡하면 증명할 수 있지?

그의 손이 뻗어 오기 전에, 떨리는 입술 사이로 속삭였다.

“뭐야, 이 귀여운 건.”

“……뭐?”

“이겨 내라. 네가 내게 속한 것이라면, 강해야 한다.”

“…….”

“나쁜 여자다, 병아리. 저이에게 정을 주지 마라.”

나는 그 뒤로도 한참, 그가 병아리 상태의 나에게 했던 말이나 행동들을 녹음기처럼 되풀이해 들려주었다.

그의 표정은 점차로 사색이 되었다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끝으로 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윽고 그가 나를 놓아주었다. 붉은 자국이 찍힌 손목은 저릿했고 한참 동안이나 손을 뜻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클레멘츠는…… 무척 허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병아리에게 꽤 진심이었던 것 같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 상황은 내가 그에게 사과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그가 나에게 사과해야 하는 건가?

답은 바로 나왔다. 이곳은 신분제 사회였고 나는 고귀하신 황태자 앞의 미천한 시녀였다. 아직도 바르르 떨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워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전하께서 사실을 아시게 되면 상심하실 거란 걸 알았지만,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는 나를 거의 쳐다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그러나 내용은 감개무량했다.

“네게 무슨 잘못이 있었겠나.”

“…….”

아, 왜 또 이러지?

간신히 그쳤던 눈물이 또다시 툭, 툭 떨어졌다. 살았다는 안도감, 온 힘을 다한 뒤 오는 탈력감, 그렇게 애썼어도 모든 걸 망쳐 버린 것 같은 허탈감 등이 뒤섞였다. 아직도 진정하지 못한 심장의 울림에 온몸이 함께 떨렸다.

모든 걸 망쳐? 아니다. 이제 하나는 제대로 됐다. 클레멘츠가 더 이상은 내게 관심을 갖지 않게 됐다는 것.

“……전하, 벨라루시아 아가씨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감정에 서투르지만 누구보다도 순수하고 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에요.”

그러니 제발, 이제는 그녀를 사랑해 주세요.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껏 했던 고생이 아까울 이유가 뭐겠는가.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쓱 훔쳐 냈다.

“정말 실례가 많았습니다. 감히 못 보일 꼴을 많이 보여 드렸어요. 관대하신 전하께서 부디 잊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잠깐.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얌전히 물러나려던 나는 엉거주춤 다시 주저앉았다.

“그 모습은, 저주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진 대로 벨라의 심부름을 갔고, 약초를 캐다가 숲에서 마물을 만나 봉변을 당한 것이라고 사실대로 설명했다.

단 하나, 하빌 뿌리가 왜 필요했는지에 대해선 함구했다. 그 이야길 하기 위해선 벨라의 비밀을 꺼내 와야 하고, 흑표범으로 변하는 벨라의 정체는 앞으로 그가 겪을 벨라와의 관계에서 가장 매혹적인 스포일러이니.

“……그렇게 된 거랍니다.”

“…….”

혼우드는 마법의 땅. 마계와 한끗 경계인 깊은 숲속에선 마물과 악마가 나타나 저주를 거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비록 고대에 비하면 그 빈도는 매우 적지만, 이곳이 여전히 혼우드인 이상 완전히 터무니없는 얘기일 순 없었다.

그도, 나도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앉아 있었다. 클레멘츠의 굳은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속이 타는 한편 다른 걱정들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밤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날이 밝기 전에 벨라도 만나고 서점에도 들렀다 올 수 있을까?

이윽고 클레멘츠가 일어서서 침대 밑에 떨어져 있던 단검을 집어 들었다. 나도 얼떨결에 그의 옆에 같이 섰다.

그는 칼끝을 세워 제 손바닥에 피를 냈다.

‘아이고, 아프겠다!’

뭘 하시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왠지 가만히 있어야 할 분위기였다.

칼을 쥔 손을 가로로 긋자 투둑, 핏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의 입술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묘한 어조였다.

“Εγώ, απόγονος του μεγάλου βασιλιά……. (나, 위대한 현왕의 후손은…….)”

고대어로 된 주문을 낮은 소리로 외며, 칼 손잡이는 계속 움직여 손바닥 위에 오각 별을 그렸다. 상처와 피는 곧 밝은 보라색 빛을 뿜었다.

아! 이건! 그거였다!

시도 때도 없이 마물이 출몰하던 땅인 클라티아가 번영한 제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 바로 전설적인 대마법사였던 초대 황제가 모든 악마와 마물들을 굴복시켜 자신의 피로 봉인했기 때문이었다.

“뒤싱겐의 이름이 지상의 왕좌에 좌정하는 한, 마의 종족은 마계를 벗어나지 못하리라.”

“뒤싱겐의 주인이 곧 복마전의 주인이니. 마계에 속한 존재는 그의 명령을 따를지어다.”

이름하야 혈박, 즉 피의 속박은 초대 황제의 언령에 의해 황가의 피를 타고 대대손손 이어졌다.

언령대로 뒤싱겐 황가의 후손이 유구히 클라티아를 다스렸기에, 마족은 더 이상 혼우드의 숲으로 지어진 경계를 넘어오지 못했다.

초기의 황제들은 자신의 피를 매개로 곧잘 악마를 소환해 뜻을 이루었다고 한다. 하지만 근래엔 거의 그런 일이 없었다.

그것은 클레멘츠의 할아버지인 제17대 황제 대에 시미크 교를 국교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적마법과 흑마법을 탄압하는 시미크교는 당연히 악마 또한 배척했다. 교단은 악마를 봉인해 인간이 살 만한 세상을 만든 초대 황제를 성인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악마 소환자라는 그의 다른 일면을 후대 황제들이 계승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이유로 최근의 황제들은 혈박을 통한 소환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소설 속에도 설명만 되고 넘어가는 설정인데, 이걸 실제로 볼 수 있을 줄이야!

“σας ζητώ να δείξετε τον εαυτό σας. (명하노니 너희는 모습을 드러내라.)”

혹자는 거의 스무 대를 지나오면서 현왕의 피가 옅어져 소환술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거라고도 하던데. 클레멘츠를 보니 그렇지도 않은 듯했다.

피에서 뿜어지는 빛이 더 강해지며, 창문이 다 닫힌 실내에서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νύχτα και μέρα, που είναι όλοι οι δούλοι μου(밤과 낮이여, 나의 노예 된 자들이여)!”

강한 어조로 주문을 끝맺자마자 우리의 앞에는 하얗고 검은 덩어리가 우당탕 떨어졌다.

세상에. 낮과 밤의 마물들이었다!

“전하! 맞습니다. 이 마물들이 싸워서 제가 휘말렸어요!”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손가락질까지 하며 외쳤다.

숲에서는 숨어서 벌벌 떠느라 못 봤던 모습이 자세히 보였다. 깡마른 나무토막 같은 손과 발이 커다란 포대 자루 밑으로 쏙 나와 있었다. 옷과 피부, 그리고 공기의 흐름에 따라 일렁이는 머리카락까지 전부 밤처럼 까맣거나 낮처럼 희었다.

그들의 목에는 밝은 빛으로 된 사슬이 묶여 클레멘츠의 손바닥에 그려진 별과 연결되어 있었다.

“뭐야? 왜 네가 묶여 있는 거야?”

“왜야? 우리는 묶이게 된 거야?”

“뒤싱겐!”

“아, 뒤싱겐!”

상황 파악을 못 하던 마물들은 눈앞의 클레멘츠를 확인하고는 벌벌 떨면서 고개를 숙였다.

클레멘츠는 나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이 사람을 아나?”

“……알아, 하지만 나는 아니야. 메라가 저주했어.”

“내가 걸었어. 인간의 딸은 인간의 딸과 닮은 어린 새가 됐어. 메라는 실수했어. 닉타가 도망가자고 했어.”

“네가 해 놓고! 변명은 비열해.”

“네가 시작했어.”

“아냐, 네가 먼저였어.”

……실수로 맞춰 놓고, 수습하지 않고 튄 거였구나. 이 마물들이!

“제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풀어 줘요!”

두 마물은 눈…… 하 씨, 무서워. 저게 눈이 맞을까? 눈에 해당할 법한 구멍을 둥그렇게 뜨고 날 쳐다봤다. 등골이 오싹했다.

그들은 내게서 고개를 돌리고 자기들끼리 떠들었다.

“흥.”

“흥, 인간의 딸은 우리에게 명령 못 해.”

“뒤싱겐의 말이라면 모를까.”

…….

우리는 우리보다 약한 자의 명령은 듣지 않는다, 뭐 그런 건가. 잘 알겠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염원을 담아 클레멘츠를 올려다보았다. 너무 간절한 나머지 두 손을 모으기까지 했다.

“전하- 부디…….”

제가 뭘 원하는지 아시죠? 황태자 전하. 이 세계의 주연. 우리 유일무이한 남주인공.

“제 저주를 풀어 주세요. 제발요.”

좀 들어주자. 응? 너에게도 정말 좋은 일이거든, 그게. 지금은 다 말 못 하지만 사실 내가 너에겐 사랑의 오작교나 다름없다니까?

네가 앞으로 벨라를 얼마나 사랑하게 될지, 그리고 내가 있었기에 이미 벨라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알면 놀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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