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왜 갑자기 그 이야기가 생각나는 걸까.
그러니까, 벨라가 나를 죽이려 드는 것도 어느 정도는 원래의 나, 오필리어 레오라에 대한 애정의 결과일 것이다. 지금으로썬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었다. 가장 긍정적으로.
그럼에도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무력한 병아리를 죽이겠다니. 내가 알던, 맹수의 힘을 가졌어도 사소한 것 하나 해치지 않던 그 벨라가 맞나?
진심이 아닌 건 아닐까? 클레멘츠의 앞이라서, 긴장해서, 마음에 없는 소릴 내뱉은 건 아니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저를 궁성으로 데려가십시오. 전하의 곁에 두어 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클레멘츠는 아무 대답 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기 위해 대가가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지불하지요.”
내가 지금껏 벨라에 대해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던 걸까? 왠지 그녀를 마주 보기가 겁이 났다.
그래서였다. 불과 5분 전에 들었다면 폴짝폴짝 뛰면서 환호성을 질렀을 내용이 벨라의 입에서 나왔어도. 그녀가 지독히도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어도. 난 기뻐하지 못한 채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삐, 삐약……!”
방문을 빠져나가는 벨라에게 가려고 뒤늦게 발을 동동 굴렀지만, 이미 클레멘츠가 나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나쁜 여자다, 병아리. 저이에게 정을 주지 마라.”
이 자식! 우리 벨라 욕하지 마!
이번에야말로 그의 손바닥을 아프게 쪼았다.
“아야.”
“전하, 괜찮으십니까?”
……결국 오늘 밤도 이 병아리 바보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 걸까?
벨라가 드디어 각성하긴 했지만 여전히 뭔가 잘못 굴러가고 있었다.
‘아, 어떡하지?’
클레멘츠가 벨라에게 반응하지 않는 게 병아리인 나 때문이라면. 그리고 벨라가 병아리인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게 인간인 나 때문이라면.
……특단의 조치를 취할 때였다. 내가 바로 오필리어 레오라이자 불쌍한 병아리라는 걸 둘 모두에게 고백해야겠다. 그럼 다들 깨닫겠지. 병아리에게서 신경 끄고 서로에게 집중해야 한단 걸.
클레멘츠는 아끼던 병아리가 사실 징그럽게 다 큰 사람이었단 걸 알면 자연스럽게 정이 뚝 떨어질 터. 그리고 벨라가 그토록 이야기하던 ‘시녀 오필리어’인 나를 그녀에게 돌려줄 것이다.
비록 이제 귀여운 병아릴 만날 순 없겠지만, 대신에 혼우드의 분위기 깡패, 절세 미녀가 마음속으로 들어오겠지.
벨라의 경우는 더 간단했다.
‘벨라, 사실 내가 그 병아리였어. 약초를 캐다가 너와 반대의 저주에 걸렸거든.’
‘뭐야? 바보…… 그런 줄도 모르고 난!’
‘괜찮아. 너에게 나쁜 의도가 있었겠어? 네게 돌아가고 싶었어. 같이 황궁으로 가자. 무엇이든 내가 도와줄게.’
……그걸로 화해할 수 있겠지?
일순 과격해졌던 마음은 금방 가라앉힐 수 있는 거겠지? 내가 어려서부터 봐 온 벨라는, 쉬이 생명을 해치지 못하는 순한 성품이겠지?
그래, 일단 한번 해 보자. 나는 결연한 마음으로 밤을 기다렸다. 그런데…….
‘왜 또 이렇게 되는 거야!’
눈물을 삼켰다. 시작도 하기 전에 계획이 망하게 생겼다. 이는 어쩌면 내 업보일 수도 있었다.
지난밤에 병아리가 탈출해 버려 마음을 졸였으니, 황태자 전하께서 오늘밤엔 친히 병아리를 안고 주무시기로 결정해 버린 것이었다.
말이 되냐, 이게……!
“안심해라, 눌러 죽이지 않을 테니.”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나를 가볍게 다시 잡아 품 안에 가두며, 클레멘츠가 속삭였다. 졸음에 조금 노곤해진 목소리였다.
“이 작은 저택조차도 네게는 너무 위험하니 안심이 안 되는구나. 내 손을 밤낮 벗어나지 말거라. 그러면 너를 지켜 줄 거다.”
필요 없어요. 제발……! 좀, 아…….
“가만있거라.”
헥헥.
결국 온몸의 힘이 동나 버렸다. 나도 나지만, 클레멘츠도 정말 불굴의 의지를 가진 녀석이었다.
이제 어쩌지?
곧 사람으로 변할 텐데, 클레멘츠에게 나는 초면인데, 침대 위에서 끌어안고 있으면 얼마나 뻘쭘하겠어.
‘제발…… 변할 때 이 품 바깥으로 벗어날 수 있기를…….’
유일한 희망은 인간으로 변할 때 몸이 공중으로 솟아오른다는 거였다.
‘좋아. 그러면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침대 밖으로 있는 힘껏 구르는 거야!’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았다.
그렇게 뜬눈으로 밤이 깊어 가고, 등 뒤에선 어느새 규칙적이고 나직한 숨소리가 들렸다. 클레멘츠는 잠이 들었다. 그리고…….
후웅, 하는 상승 기류. 몸에서 하얀 빛이 나며 위로 떠올라……야 하는데.
‘아, 젠장’
클레멘츠가 나를 하도 빈틈없이 소중하게 두 손으로 감싸고 있는 바람에, 나는 전혀 위로 떠오르지 못했다. 그저 그의 손바닥만 조금 들어 올렸을 뿐이다. 그 상태에서 파삭, 작은 파열음이 울리고.
다음 순간 원래 몸으로 돌아온 나는 클레멘츠의 팔 안에 사뿐히 안착했다.
‘으악! 으아악!’
“……으음.”
클레멘츠는 제 품에서 벗어나려는 나를 반사적으로 다시 끌어안았다. 졸지에 그의 가슴이 내 등에 닿았다. 깊이 내쉰 숨이 귓가를 스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으아아아악!! 조연 살려!!!’
온몸이 굳어 버렸다. 망할! 이제 어떡하지?
이 상황은 문제가 너무 많았다.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못해 처음부터 끝까지 오해의 소지로만 이루어진 장면이었다. 이러다 그가 깨어나기라도 하면.
“……뭐지.”
아아, 왜 우려하던 상황은 이렇게 빨리 일어나 버리는 건데!
“아……!”
순식간에 붙잡히나 싶더니 몸이 굴렀다. 다음 순간 나는 침대와 클레멘츠의 몸 사이에 갇혀 있었다.
양손은 그의 한 손에 붙잡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대체 언제 꺼낸 건지 깨닫지도 못한 단검이 내 목에 겨누어졌다.
‘미친. 칼이잖아.’
베개 밑에 숨겼던 건가? 밤중이라 희미한 빛을 잘 벼려진 칼날은 예리하게 반사해 냈다.
그의 눈이 깨진 자수정처럼 날카로운 빛을 쏘아 냈다. 그가 억눌린 듯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냐.”
그가 한 뼘만 손을 움직여도 목이 썰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먼저 분노인지, 위압감인지, 사정없이 뿜어지는 기운에 압도되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저는…….”
간신히 목소리를 짜내려니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도르륵 떨어졌다. 그저 살려 달라고 빌고 싶었다. 하지만 우선 그가 나를 죽이지 못할 이유를 먼저 말해야 했다.
“오필리어…… 레오라. 벨라루시아 아가씨의 시녀입니다.”
“……‘그’ 시녀?”
내 이름을 대자 살기가 조금 거두어졌다. 하지만 꼼짝도 못 하게 잡아 누른 손목과 목으로 드리운 단검은 여전했다. 나는 참다못해 애원했다.
“전하, 소, 손목이 아픕니다. 놔주세요.”
그러나 그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벨라루시아 모나한의 시녀라고 하면 너의 목숨을 보장받을 수 있을 줄 알았더냐.”
……그게, 맞긴 한데. 설마 벨라의 시녀라도 잘만 하면 죽일 수 있다는 건가?
그렇구나. 클레멘츠는 지독히도 냉정하고 자신에게 부여된 권위를 십분 이용하는 사람이었다. 벨라를 아직 사랑하지 않는 지금이라면 그녀가 아끼는 시녀라 해도 충분히 자신의 권한으로 죽일 수 있었다.
“…….”
“그리 자만했던 모양이군. 우스워. 그녀가 나에게 무엇이기에? 또, 너는 대체 그 여자에게 무엇이더냐.”
그렇지. 아직은, 운명의 여자인 벨라루시아 레우니스 모나한마저도 클레멘츠 레스타 뒤싱겐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어쩌면, 벨라에게 나도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백작이 널 보냈는가? 여동생으로 안 되겠으니 그 시녀라도 내 침대에 밀어 넣어야겠다 하던가?”
무슨 그런 오해를!
……할 만도 했다. 그의 지위, 그의 외모라면 얼렁뚱땅 몸으로 유혹해서라도 옆자리를 꿰차려는 시도가 얼마나 많았겠는가.
제길, 애정 캐릭터였던 책 속의 남주를 대면하기에 이보다 나쁜 상황은 없을 터였다.
최대한 내 목에 들이 밀어진 칼날을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침착하게 또박또박, 사실대로 말하면 저 칼이 내 목을 그을 일은 없을 거라고 자신을 수없이 격려하며.
“레오라가는 백오십 년 전 황제 폐하께 남작 작위를 인정받았습니다. 아무리 시녀라도 혼례조차 치르지 않은 분의 밤 시중을 들라고 강요될 신분은 아닙니다.”
강요가 아니라면 스스로 청해서 왔다고 해석될 수 있나? 클레멘츠의 눈빛을 보고 그렇다는 걸 깨달은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더, 더군다나 저에겐 이미 미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상황은 전혀 제가 원한 게 아닙니다. 전하, 설명을 하게 해 주세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그리는 편안하고 안락한 미래에는 늘, 레오라 가문의 형편과 적당히 맞으면서도 참하고 순종적인 남편이 곁에 있었으니까.
비록 상상 속 그 사람은 아직 얼굴도 이름도 뽀얀 안개처럼 흐릿하지만 어쨌든.
클레멘츠는 내 말을 듣고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나는 부질없는 애원을 몇 마디 더 해서 그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자. 후, 다시 들이쉬자. 침착하게.
“……흑.”
오필리어야, 침착하게!
“흐흑, ……흑!”
“…….”
원망스럽게도, 생사를 가르는 위험이 닥치자 내 뜻과 상관없이 흐느낌이 튀어나왔다. 그처럼 대단한 미남에게 인간으로서 처음 보여 주는 모습이, 감은 눈으로 계속 눈물을 흘리면서 흐느낌을 참으려고 애쓰는 모습이라니. 팬으로서도 독자로서도 조연으로서도 그저 비참할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파르르 떨리는 눈을 떴다. 클레멘츠는 내 목에 드리웠던 칼을 거두었다. 살려 주는 건가? 싶었는데.
“……냄새가 나는데.”
응? 어?
냄새? 이 상황에? 나, 냄새나나?
하긴 숲속의 그 사건 이후로 씻지 못한 건 맞는데……로 흐르던 생각은 딱 멈추었다.
클레멘츠가, 아직 손에 들고 있는 단검으로 내 망토 자락을 들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