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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5)화 (15/218)

15화

어차피 벨라와 나는 이런 걸로 벌어질 만한 사이가 아니었다. 또 벨라도 금세 한미한 출신의 평범한 여자에게 클레멘츠가 관심을 가질 리 없다는 걸 눈치챌 것이다.

“영애가 내게 말하였으니 기억하는 게 예의겠지.”

“단지 그뿐인가요? 언제부터 그렇게 레이디에 대한 예의를 떠받드셨습니까, 황태자 전하.”

“백작 영애……!”

오예.

듣다 못한 카시스가 제지하고 나섰고, 만찬장의 끝물에서처럼 벨라와 클레멘츠의 눈빛이 파직거리며 맞붙었다.

이때다! 나는 충돌하는 눈빛 사이의 온도를 감지하기 위해 온몸의 감각을 열었다. 병아리로 변한 이후 가장 진지한 순간이었다.

감정 온도를 스캔합니다. 3, 2, 1…….

어라. 미지근하다 못해 시원했다. 아까 전보다도 더 싸늘한 온도였다.

뭐지? 분명 벨라가 질투하는 것 같은데. 아직 감정을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인가?

이런 이런- 이거 아무래도 내가 최대한 빨리 저주받은 신세를 졸업하고 연애 상담하는 시녀 포지션으로 복귀해야겠는걸-?

“이것 보게, 지금도 과민하게 그 시녀를 감싸고 있지 않아.”

“과민?”

벨라는 콧방귀를 뀌었다.

“감싸요? 그 애를 제가 아껴요? 웃기는 소립니다. 그 애가 날조해 대는 것과 흡사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아끼지 않아요. 오히려 싫어합니다. 성가시기 짝이 없어요. 차라리 떼어 낼 수 있는 혹이라면 싶습니다.”

벨라가 다양한 감정을 인정하고 표현하기를 바라 왔지만, 아직까지도 좋다거나 아낀다거나 하는 마음은 갈 길이 멀었다.

나도 벨라를 아끼니 너도 나를 아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면, ‘난 너 싫어!’라고 쏘아붙이며 홱 돌아서는 경우가 일반이었다. 즉, 평소 하던 소리라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싫어하는 이를 그리도 찾아다니나? 애당초, 마음에 안 드는 시녀라면 다른 이로 바꿨으면 되었을 터.”

“바꾼다고요? 오필리어를, 다른 아이로?”

파박. 벨라의 눈에서 또다시 푸른 불꽃이 튀었다.

“8년 전부터 제 곁에 있었던 아이를요?”

“그리 오래되었나.”

“그럼요. 첫 만남부터 곤혹스러웠던 그 아이와 함께 지낸 세월이 얼마나 길었는지…….”

또 구구절절 내 이야기가 이어졌다.

너희들! 대체 언제까지 내 얘기만 할 거니?

둘 다 알고 있는 화제에서 출발하는 건 훌륭한 대화 전략이라지만! 대체 어느 세월에 서로에 대한 대화로 넘어갈 거니? 이, 이 조연 겸 독자는 속이 타는구나…….

클레멘츠도, ‘나는 그대의 시녀보단 그대가 더 궁금해.’라든지. ‘그보단 당신에 대한 말이 좀 더 듣고 싶군.’ 같은 말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가만 듣고 있지 말고!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으려니 과연 그가 끼어들었다. 그렇지만 내 기대보단 훨씬 차가운 말이었다.

“그래서 그대의 시녀에 대한 얘길 늘어놓으러 온 건가?”

“……귀하신 분을 붙잡고 지루한 얘길 늘어놨군요. 그 애 이야긴 그만하도록 하죠.”

잠시 침묵하던 벨라는 그제야 엉뚱한 병아리에서 벗어나, 원래 하려던 말이 생각난 듯싶었다. 그녀는 그를 보며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정말로 매혹적인 표정이었다. 그야말로 누가 봐도 홀릴 만한.

윽, 잠깐. 내 심장이 뛰어. 클레멘츠보다 내가 먼저 반하겠어.

“어제 만나 뵌 이후로 전하가 통 잊히지 않더군요. 전하를 알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뭐!!?

방금 전까지 연옥에 있다가 단숨에 천국까지 끌어올려진 듯했다. 우리 벨라가! 클레멘츠에게 이런 말을 하다니! 적극적이야. 멋져!

이제야말로 서로 가까워지겠구나. 나는 날개 끝으로 두 눈을 훔쳤다.

“어떤 것을 알고 싶지?”

“모든 것이요. 답하시기 쉽지 않을 테니, 중요한 것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어떤 것들이 당신께 중합니까?”

‘……!’

질문하는 벨라의 목소리는, ‘안개를 피워 내는 깊은 땅속에서 울려 나오는 것처럼 오묘했다.’

소설에 나오는 표현이었지만, 듣는 순간 그 문장이 이 울림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란 걸 깨달았다. 듣는 사람의 오금이 저릿해지는 목소리였다.

‘세상에, 벨라!’

벨라가 클레멘츠에게 강한 감정을 느끼며 이야기할 때면 자연스레 이런 목소리가 나오곤 했다고 소설은 말하고 있었다.

두 귀로 그 낯설고 신비로운 목소리를 듣는 클레멘츠의 반응도, 보통은 한 번에 다섯 줄 이상 묘사되어 있었다.

그야 사람이라면 다 듣고 충격받을 만큼 매력적인데, 그게 호감을 느끼는 여자라면 어떻겠는가. 아예 사랑에 빠지고 말겠지.

그런데 힐끗 살펴본 클레멘츠는 예상보다 무표정했다.

……음. 겉보기엔 저래도 많은 생각이 들고 있겠지? 분명 그럴 거야.

예기치 않은 사고로 조금 늦기는 했지만 이제 원래 정해진 대로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틀림없이 이 순간의 벨라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을 거다.

벨라의 아름다운 벽안에서는 이제 불꽃이 탁탁 튀었다. 붉은 입술이 움직여 모양을 만들어 냈다. 대체 저 입술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이 병아리가 중합니까?”

아, 또 나냐고! 이 치명적인 분위기에 병아리 이야기를 해야겠냐고! 잘 나가다가 계속 오필리어(병아리)라는 브레이크가 걸린다.

내가 테이블 위에서 자꾸 얼쩡거리는 게 문제인가? 아, 그렇구나! 하긴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없었다. 내가 사라져 줘야 하는 거였어.

나는 카메라 앵글에 잡혀 버린 걸 깨달은 영화 스태프처럼 황급히 모서리를 향해 갔다. 옆에 있던 카시스에게 날개를 파닥였다.

“삐빅!(야, 나 좀 챙겨.)”

친절한 카시스는 반색하며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뒤에서 불쑥 나온 손이 나를 채 갔다. 클레멘츠, 이게 뭐 하는 짓이니.

“그렇다. 이 아이가 내게 중하다.”

그의 옷깃에 놓인 자수는 여전히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있었다. 난 항의의 의미로 그의 손바닥을 부리로 찍었다. 그러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야의 구석에서 카시스가 머쓱하게 손을 내리는 게 보였다.

벨라는 당당하게 말을 이어 갔다.

“갑작스럽게 구는 저를 용서하소서. 믿지 않으시겠지만, 저는 전하께 운명과 같은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운명이라.”

“저와 전하가 아주 상관없지는 않아야 한다는, 그런 느낌이죠.”

당신에게 운명을 느낀다. 그러니 당신에게 중요한 걸 내가 가지고 싶다. 이 얼마나 솔직하고 로맨틱한 말인가.

만일 달라고 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중요한 가치라면. 신념이나, 명예나, 목숨이나, 마음이나, 그런 것들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벨라는 오싹할 만큼 하얗고 모양 좋은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 다시 묻겠습니다. 그 병아리를 제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받아야겠습니다.”

꼭 안 어울리는 드레싱처럼, 좀 잘될 성싶으면 병아리가 마구 끼얹어졌다.

‘내 죄가 크군…….’

몰래 내쉬려던 한숨은 클레멘츠의 비웃음에 자연스럽게 묻혔다.

“웃기는군. 영애, 내가 아낀다, 내게 중하다 분명 말하였다. 황족의 권속을 어찌 대해야 할지도 만찬장에서 분명 일깨워 주었어. 내 병아리를 달라고?”

이어지는 말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대는 이 아이를 죽일 생각이었지 않나.”

뭐?

조그마해진 눈을 깜빡이며 벨라를 쳐다보았다. 벨라의 그림 같은 표정엔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이내 그녀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털썩. 나는 그만 클레멘츠의 손바닥에 주저앉았다.

만찬장에서 벨라는 그에게, 시녀가 돌아올 때까지 마음을 달랠 수 있도록 병아리를 달라고 했었다. 다음 순간 클레멘츠가 과민하게 화를 내고 만찬은 흐지부지 끝났다.

그때 화가 난 이유가 이거였나?

그때 나는, 그저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클레멘츠가 벨라에게 나를 넘겨줬으면 하고 바랐었다. 그런데…….

‘왜?’

조금 전, 나를 북국의 빙하처럼 차갑게 쳐다본 이유가 이거였을까? 그녀의 시녀로 살아갈 때는 단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했던 눈길이었다. 너무나 낯설고, 몸속까지 떨렸다.

“그 작은 새는 죽을 이유가 충분합니다. 전하께 중요한 걸 제게 달라 하는 이유는 돌려 드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영영 없애기 위해섭니다.”

“어째서지?”

“몹시 불경한 말씀입니다만, 전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는 저와 전혀 상관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바라시는 것들이 족족 무너지기를 원합니다.”

“……모나한 영애, 점잖으셨던 분이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듣다 못한 카시스가 끼어들었다. 벨라는 무관심한 눈으로 그를 한번 보고 말을 맺었다.

“왜 그런지는 저도 모릅니다.”

“흥미롭군.”

‘흥미롭군.’ 이 대사는 원래 남주인공의 전매특허다.

대상은 여주인공이며, 여주인공의 남다른 행동과 성격에 가랑비에 옷 젖듯 감동하여 이제부터 여주인공을 흥미로워하는 데 전심전력을 다할 것이고, 그것이 단순한 흥미가 아니란 걸 깨달았을 땐 사랑에 빠져 있으리란 선서나 다름없었다.

그 말을 클레멘츠가 벨라를 향해 했다는 건 기뻐 마땅한 일인데…….

왜 전혀 기쁘지 않을까?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클레멘츠가 말한 것은 그저 말 그대로의 흥미였다.

전하에게 운명을 느낀다, 전하에 대해 알고 싶다 떠드는 여성들이야 얼마나 많았을까.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걸 모두 좌절시키고 싶노라고 고백하는 이는 없었을 것이다.

그 발칙함과 독특한 분위기만으로도 얼음 같았던 황태자가 흥미를 갖기는 충분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흥미가 사랑으로 이어지는 당연한 과정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에서 어떤 온도도 찾을 수 없어서였을까? 그래서 이렇게 불안하고 겁이 나는 걸까?

“전하의 새는…… 오필리어를 닮았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없애야 합니다.”

멍해진 머릿속에 소설 속 에피소드 하나가 떠올랐다.

황궁으로 간 벨라를 새 황태자비 후보로 인식한 귀족들은 그녀에게 선물을 보낸다.

귀한 향료, 약재, 가구, 의류, 보석 액세서리 등.

벨라는 그 가운데 자수정으로 된 것들을 한데 모아 바수어 버린다.

클레멘츠의 눈을 닮은 것들이 세상에 흩어져 있는 것이 싫다면서. 자색의 빛나는 고운 것은 그의 눈 안에만 있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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