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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4)화 (14/218)

14화

전생과 이번 생의 모든 소설을 통틀어 병아리 암살을 지시하는 백작은 처음 봤다는 거야 둘째 치고. 그 대상이 나였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어쨌든 8년간 몸 바쳐 일한 고용주가, 벨라의 가족이, 나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장면이었다.

‘미친…….’

혹여나 내 모습이 보일까 봐 서둘러 창틀 바깥으로 몸을 숨겼다. 엄청나게 자그마해진 심장이 팔딱거렸다.

언뜻 보인 알핀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아마 그는 명령에 불복할 수 없을 것이다. 알핀의 집은 백작령의 농촌이고, 백작의 명령은 어쨌든 백작령에선 절대적이었다.

사람 하나를 몰래 죽이라고 해도 뜻대로 될진대, 한 줌짜리 병아리야 얼마나 간단할까.

늦어도 점심시간 뒤면 이 암살 명령은 저택 전체로 하달될 것이다. 방금 전까진 저택 내부에서 돌아다니다가 들켜도 클레멘츠에게 다시 전달된다는 위험 부담밖엔 없었다. 물론 그 역시 충분히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혼자 어디 숨어 있다가 저택 전체에 쫙 깔린 하인들에게 들키기만 하면 말 그대로 죽음이었다.

피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잠시도 빼놓지 않고 클레멘츠나 카시스에게 꼭 붙어 있는 것뿐이었다.

‘어…… 어쩌지.’

상황이 180도 변했다. 클레멘츠를 피해 도망치다가, 그에게로 다시 도망해야 한다니. 그래야 산다니.

‘하지만…….’

다시 클레멘츠의 옆에 얼쩡대다 쓸데없이 관심 끄는 상황을 막으려고 그 난리를 쳤는데.

이제 와서 보호가 필요하니까 다시 가까이 간다는 건 너무…… 비굴할뿐더러 이도 저도 아니었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이 세계의 주인공들의 행복? 아니면 내 목숨?

젠장! 쉽게 결정할 수 있을 리 없잖아!

‘벨라…….’

내 소중한 여주인공, 내 아가씨. 반드시 행복하게 해 줄 거라고 다짐했는데.

‘클레멘츠…….’

이번엔 벨라에게 목숨을 잃는 슬픈 일 없이 그녀와 사랑하게 해 주겠노라고, 서로 얼굴도 보기 전부터 수없이 혼자서 약속했었지.

그런데…….

“흑……. 만일 우리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땐 전 정말 더는, 흑, 버티지 못할 것 같아요. 에반젤린…….”

아악! 하필이면 지금 그 목소리가 초고음질로 재생될 건 뭐람!

더군다나, 나는 원래 세계에 살다가 뜬금없이 이쪽 세상으로 이식되었다. 이곳에서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는 채 선뜻 선택할 순 없었다.

한바탕 꿈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길고 생생했다. 죽어도 그저 꿈에서 깨는 것뿐이고, 원래 세상에서 꿈속 기억을 행복하게 되새기며 휴재가 끝나길 기다릴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

만약 그게 아니라면? 이 목숨이 정말 나의 유일한 목숨이고, 이곳에서의 죽음이 영영 없어지는 그것이라면?

그것도 무력하고 작은 짐승이 된 채 권력자의 심술에 사라지는 개죽음이라면?

‘흐윽…….’

병아리로 변해 버린 게 이렇게 한탄스러울 수 없었다. 차라리 벨라처럼 맹수였다면 좋았겠다. 쓸데없이 귀여워서 관심 끌지도 않고, 자신을 지킬 힘도 있고.

저택 바깥에 숨어? 그러다 고양이나 여우랑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대로 끝이다. 그건 같이 일해 온 하인들에게 죽는 것 이상의 개죽음이다.

‘엄마아…….’

결국, 나는…… 눈물이 차올라서 고갤 들며 내달렸다. 날렵한 발걸음으로 창턱과 기둥 사이를 뛰어넘으며, 처음 도망 나왔던 곳으로 돌아갔다.

천만 다행히도 카시스는 아직 거기서 ‘병아리! 제발 나와다오, 부탁이다!’ 따위를 진지하게 외치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삐익!!!!”

병아리가 된 뒤로 어느 때보다 크게 소리 지르며 그에게 포로롱 날아갔다. 그가 반사적으로 날 받쳐 들며 눈을 크게 떴다.

“병아리?! 시미크시여, 감사합니다.”

어라. 지금 저 붉은 눈에 살짝 눈물이 맺혀 있는 것 같은데. 아니겠지. 원래부터 눈동자가 초롱초롱한 미남인 것뿐이겠지?

상관없었다. 안 그래도 내가 지금 울고 싶으니까.

“역시 창밖에 있었던 건가? 하아……. 십년감수했군. 바깥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느냐? 다시는 함부로 나가지 말거라. 알겠지?”

그는 내가 도망가기 전보다도 더 다정하게 말하곤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삐힉…….”

이 손바닥 위에 비하면 방금 전 있던 곳은 얼마나 험난한 세상인가. 새삼 눈물이 난다.

“귀여운 것…….”

어쩐지 카시스마저 반대쪽 손으로 눈가를 쓱 훔쳤다. 어라, 정말 울기 직전이었던 건가? 그 카시스 듀프레 후작이?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새로운 손님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듀프레 후작님이시군요.”

“모나한 영애, 반갑습니다.”

벨라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섬세한 검은색 생머리. 몸에 밴 태도는 보편적인 귀족 영애의 우아한 몸가짐과는 달랐다. 마치 위험하고 아름다운 맹수가 움직이는 듯한, 절제된 힘과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그것이 벨라의 매력이었다.

오늘 벨라는 보라색과 흰색을 기조로 한 드레스를 입고 같은 색의 베일을 보석 서클릿을 통해 뒷머리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무척 잘 어울렸지만 조금 불편해 보였다. 내가 입혔다면 똑같이 예쁘면서 좀 더 편안하도록 꾸몄을 텐데.

“삑빅!(벨라!)”

“황태자 전하를 만나 뵙고 싶습니다. 지금 괜찮을까요?”

벨라는 나를 본체만체했지만, 그야 아직 내가 오필리어인 줄 모르기 때문이리라. 나는 오히려 그녀의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뻐졌다.

벨라!! 우리 기특한 벨라, 클레멘츠를 만나러 가겠다고?

아이고, 장하다. 드디어 사랑을 찾아왔구나. 어때, 역시 운명의 감각이랄지, 그런 게 느껴졌지? 절대로 놓치면 안 되는 사람이겠단 생각이 들었지?

정말로 정말로 다행이야. 클레멘츠가 저렇게 뻘짓을 하고 있긴 하지만, 너만 제대로 중심을 잡아 준다면 문제없을 거야. ‘뷰티 앤 더 비스트’는 그렇게 설계되어 있으니까. 그가 너를 사랑하도록 정해졌으니까.

아마 지금의 나를 누가 본다면 ‘아니, 병아리도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구나!’라고 생각할 텐데.

“예, 지금쯤이면 급한 정무는 마무리 지으셨을 겁니다.”

“그 병아리는…….”

안내하는 카시스를 앞세우던 벨라가 드디어 나에 대해 언급했다.

“예.”

벨라의 푸른 눈은 마치 북극의 빙하만큼이나 싸늘하게 느껴졌다.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시녀이자 소꿉친구인 날 대할 땐 곧잘 귀찮아하고 질색했지만, 저렇게 무감정하지는 않았는데.

흠, 혹시 저것이 벨라가 다른 사물을 대하는 눈인 걸까? 내가 없던 ‘원작’에서는 클레멘츠를 만날 때까지 늘 저렇게 세상을 보고 살아왔던 걸까?

그렇다면 더더욱 빨리 클레멘츠와 사랑을 하게 만들어야겠어! 나는 의지를 불태우며 날개 끝을 말아 쥐었다. 벨라가 사랑을 하면 분명 저 속의 만년빙마저도 아름다운 호수처럼 녹아내리겠지!

“오늘도 참 샛노랗고 가벼워 보입니다. 제가 황태자 전하께 들고 가도 괜찮을지요.”

“모나한 영애, 죄송하지만 그건…….”

포로롱.

카시스의 생각이야 이해한다. 아무리 백작 영애에게라도 주군의 소중한…… 병아리를 함부로 넘겨줄 수 없으리라.

하지만 중요한 건 당사자인 병아리의 의견 아니겠는가.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벨라의 손바닥 위에 포르륵 내려앉았다. 나는 언제나 그녀를 믿으니.

“앗…….”

놀라서 되돌아본 그는 내가 벨라의 손 위에서 좋다고 깡총깡총 뛰는 것까지 보고는 허탈해하고 있었다.

진정해. 이게 애정도의 차이란 거거든. 물론 카시스, 너도 좋아해.

……뭐지? 이 팜므파탈 같은 독백은.

“안녕하신가, 영애.”

“살펴 주신 덕분에 평안합니다.”

안부를 물은 쪽은 그다지 상대의 안부에 관심이 없어 보였고, 덕분에 평안하다는 쪽은 그다지 고맙거나 평온해 보이지 않았다.

이는 단언할 수 있었다. 슬프게도.

왜냐면…… 둘 사이에 혹여나 어떤 온기라거나 열정이 비치지 않을까, 내가 매의 눈으로 관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클레멘츠의 지독히도 변화 없던 표정은 나를 보고서야 변했다. 나는 또 무슨 헛짓거리나 헛소리를 할세라 그를 무시하며 벨라의 손 위에 웅크렸다.

“허…….”

흥. 저렇게 헛웃음을 지어도 소용없다. 따지고 보면 내 주인은 벨라지, 클레멘츠가 아니잖아.

“전하의 병아리는, 참으로 천방지축이군요. 새벽에도 없어져서 백작저가 한바탕 뒤집어졌었다고 들었는데.”

이 댁 아가씨 입장에선 병아리를 찾아 온 저택을 뒤졌단 말이 달갑게 들릴 리 없었다.

“나의 병아리니 특별히 활발하고 건강해도 이상할 건 없다.”

그러나 클레멘츠는 나에 대한 이 말마저 칭찬 필터에 통과시켜 버렸다. 그리고 벨라는 이 불굴의 병아리 사랑에 굴하지 않고 제 할 말을 했다.

“주인 속은 모르고 가볍게도 돌아다니는 모습이, 더더욱 어떤 사람을 생각나게 합니다.”

……앗.

갑자기 저격을 당한 당사자는 충격에 몸을 펴지 못했다.

“그대의 시녀 말인가. 이제는 돌아왔겠지?”

“아뇨,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벨라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졌다.

“어디 휩쓸려서 죽진 않았다는 무성의한 쪽지 하나 덜렁 남겨 놨더군요. 아주, 누가 주인이고 누가 시녀인지 모를 지경입니다.”

미, 미안해!

벨라는 정말 많이 걱정한 듯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에 있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그대는 그 시녀를 많이 아끼는 모양이야. 이름이 오필리어라고 했던가.”

“그 아이 이름을, 기억하시는군요.”

그거야 나도 의외이긴 하지만 클레멘츠는 상당히 머리가 좋았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름이라 해도 기억하는 건 대수롭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벨라는 왜 기분이 상한 것만 같지?

‘……!!’

그런가, 이것은……! 질투?

운명을 느낀 사람이 자신 외의 다른 여자를 기억하는 것에 대한 질투인 건가?

심장이 세게 뛰기 시작했다. ‘뷰티 앤 더 비스트’의 동지 독자님들, 제가 드디어 해냈습니다. 여주인공이 자각의 첫발을 떼는 모습을 봤어요!

너무 기특해서 벨라를 업고 백작저 한 바퀴라도 돌고 싶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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