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아, 정말 악당의 대사 같잖아.
어쨌든 필요하다면 서류를 찢는 시늉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대충 훑어보고 가장 별 내용이 없어 보이는 종이를 골랐다.
까매진 발톱으로 종이를 잡고 부리 사이에 한쪽 모서리를 집어넣기 무섭게, 카시스가 반응했다.
“저, 전하.”
찌이익-.
“전하! 병아리를 잠시 다른 곳으로 옮겨야겠습니다. 잉크가 묻은 발도 씻고요. 제가 금세 하고 오겠습니다.”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낸 카시스가 나를 황급히 들어 올렸다.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그래야겠군.”
클레멘츠는 엉망이 된 책상 위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카시스가 나를 데리고 방을 빠져나가는데도 다시 내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드디어 화가 난 걸까? 그렇다면 좋을 텐데.
한편 카시스는 내 발을 씻는 데 쓸 순한 비누와 물기를 말릴 수건, 그리고 중간중간 쪼아 먹을 만한 베리 종류를 바구니에 같이 챙겨 나왔다.
“휴, 미안하구나. 애당초 그런 중요한 문서가 있는 책상에 너를 올려놓아 네가 그런 잘못을 범하게 하는 게 아니었는데.”
예?
카시스는 바구니 속의 블루베리를 탐하는 데 여념이 없던 나를 톡톡 쓰다듬었다.
지금…… 정성들여 완성한 문서를 훼손했는데도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해 주는 거야?
눈부셔! 눈부셨다. 이 빛은…… 선한 사람의 광채인가? 대체 내가 이렇게 착한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설마하니 네가 뭘 알고서 나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서류를 망쳤을까. 내가 부주의하고 생각이 짧았다. 앞으론 조심해야겠지.”
맙소사…… 양심이 너무 아프다.
고의였어요. 죄송해요. 온전한 고의였어요.
한 세계의 정상적인 작동과 그 세계에 속한 개인의 행복 사이에서 망설임 없이 전자를 택해 버린 나는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윤리적인 책임감에 고뇌했다.
어쩌지. 클레멘츠가 날 아예 내쫓아 버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패악을 부리긴 했지만.
고개를 푹 숙였다. 갑자기 그의 붉은 눈을 마주 보기가 미안해졌다.
내가 그들의 옆에 붙어 있으면, 이런 식으로 그에게 미안해질 일이 점점 더 많이 생길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답은 탈출이었다.
차마 내게 화를 내진 못했지만 그들도 이제는 알았을 것이다. 내가 황태자에게 어울릴 만한 우아하고 얌전한 애완동물이 아니라는 걸.
외관이 귀엽긴 하지만 득은커녕 실만 불러올 거라는 걸. 그러니까, 잠시 바깥에 놔두라고 했지만 이대로 사라져 버려도 굳이 열심히 찾지는 않겠지.
더군다나 이미 아침에 병아리 때문에 온 저택을 들쑤시지 않았나.
암만 황태자의 신분으로 절대적인 우위에 있다 해도 모나한 저택에서는 엄연한 손님의 위치이다. 두 번씩이나 사용인을 총동원하고 집 안을 뒤지기엔 부족한 명분이었다. 모나한가가 상대적으로 힘이 없다 해도 어쨌든 귀족이고, 클레멘츠에게도 차려야 할 체면이 있는 이상.
이걸로 정말 잘못된 인연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죄송해요, 듀프레 후작님. 인간으로 다시 만났을 때는 꼭 잘 대해 드릴게요. 우선은 이별합시다.
그가 시종 하나를 불러 몇 가지를 지시하는 동안, 바닥에 내려놓아진 바구니에서 몰래 뛰어내렸다.
병아리의 발은 생각 외로 빨랐다. 전력으로 질주해서 기둥 뒤에 숨은 뒤에도 카시스는 아직 시종과 이야기를 마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 그렇게 하게.”
“말씀 받들겠습니다.”
헙, 이야기가 끝난 듯했다. 서둘러 더더욱 거리를 벌렸다. 마침 별관을 환기시킬 시간이었고, 카시스가 보기 전에 포로롱 날아 창문을 타 넘는 데 성공했다.
‘오.’
저택 내부를 암만 잘 안다 해도 외부 장식까지 눈여겨보지는 않았는데, 자세히 보니 밖에 붙은 선반은 튼튼하고 널따랬다.
게다가 창문과 창문 사이엔 기둥이 있었는데, 기둥의 마디마디를 빙 둘러 붙어 있는 장식은 선반과 높이가 딱 맞았다. 즉, 창문과 기둥을 타고 다니며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병아리! 어디 있는 거냐. 병아리!”
이내 복도 안쪽에서 카시스가 두리번거리며 날 찾아다녔다.
“병아리!!”
이윽고 그가 바로 옆 창문을 열고 외쳤다. 나는 창문과 기둥 사이의 장식 위에서 최대한 벽에 붙었다. 카시스는 마치 내가 추락했을 거라고 생각이라도 한 듯 훤칠한 몸을 굽혀 저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제길, 황태자 전하께는 뭐라고 말한다…….”
잘생긴 얼굴은 옆에서 슬쩍 봐도 사색이 되어 있었다. 만일 그가 평소의 침착하고 주의 깊던 카시스 듀프레라면 좌우를 한 번 둘러보고, 창턱 끄트머리에 삐져나와 있는 노랑 솜털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허둥대던 카시스는 이내 복도로 되돌아가 다른 방향으로 멀어져 갔다.
이제 어디로 가지?
우선 클레멘츠의 방과 가능한 멀어지는 방향으로 창틀과 기둥을 넘나들며 나아갔다. 실로 미션 임…… 아니, 스파이 영화를 방불케 하는 장면이었다.
문제는 그토록 멋지고 은밀하게 건물을 누비는 이가 영화배우가 아닌 병아리라는 점이었지만. 겉보기엔 우스워 보일지라도 나는 진지했다.
이렇게 된 이상 밤까지 별관에 숨어 있어야겠는데. 본관에 쭉 깔린 하인들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황태자에게로 데려갈 테니.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모처럼 내 대에 일생일대의 기회가 왔는데. 이렇게도 뜻대로 굴러가는 일이 하나도 없다니.”
모나한 백작이었다.
이 시간에 서재엔 웬일이지? 본관의 백작 집무실에 있을 시간인데.
아무래도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스트레스 탓에 여기서 땡땡이를 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란 벨라를 클레멘츠에게 ‘선보여서’ 그 덕을 보는 일이겠고.
어휴, 저것도 오라비라고.
갑자기 언짢아진 나는 걸음을 멈추고 열린 창문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낮말은 새가 듣는다는 말의 참뜻이다.
“벨라루시아 녀석. 어릴 때부터 그렇게 예뻐서 얼마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었냐. 헌데 자랄수록 요상하고 사악한 헛짓거리만 해 대고. 마땅히 여자로서 관심 가져야 할 것들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니 원.”
일생일대의 기회라면서 고작 하는 게 동생의 미모에 기대는 일인 작자가 할 말은 아닐 텐데!
짐작이야 했지만 정말로 벨라를 걸고넘어지니 화가 났다. 어찌 보면 그가 바로 벨라를 고립되게 만들어 ‘원작’에서 클레멘츠를 죽이게 만든 원흉이었다.
저주를 풀기 전에 저놈의 머리털을 좀 물어뜯어 놓으면 속이 시원할 텐데.
“아니 그러냐, 알핀?”
“어, 음, 그게…… 저는 아가씨와 백작님 모두 무사태평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역시나 고상하신 백작님은 혼자 뒷담화를 까지 않고 누군가를 세워 두신다. 매일 저녁 집사 할아버지가 감내하는 일이었으나, 지금은 알핀이었다. 아마 클레멘츠의 부름을 받고 지나가다 걸린 것이겠지.
차마 백작 영애를 흉볼 수도, 주인의 말을 부정할 수도 없었던 알핀에게 백작은 오히려 으스대며 면박을 주었다.
“바보 같은 자식. 무사? 태평? 이럴 땐 인생 역전의 기회를 얻으시길 바란다고 해야 할 거 아니야.”
“예, 예에…… 기회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불쌍한 알핀.
“아무튼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겠어. 의외로 황태자 전하 본인께서도 외모가 출중하셔서 그런지 벨라를 보고도 혹하시지 않는 것 같아. 벨라 그 아이만이 가진 매력을 보시도록 만들어야겠어. 수도 여자들과는 다른…….”
또 무슨 짓을 벌일 셈인 걸까? 아, 이러면 또 원작 전개와는 달라지는데.
“이게 다…….”
쾅!
벌떡 일어나 책상을 친 백작이 외쳤다.
“이게 다 그 건방지고 못생긴 병아리 때문이다!”
뭐?!
모, 못생겨? 클레멘츠도 카시스도 내가 귀엽다고 했는데.
아니, 그보다도 나에게 저렇게 화가 많이 났었단 말이야?
만찬장에서 나를 눈빛으로 구워 버릴 듯 쳐다보던 백작이 떠올랐다.
“그 엉뚱한 축생이 전하의 주의를 빼앗지만 않았어도 벌써 벨라에게 반해 계셨을 것을!”
그 부분은 사실 나도 동의했다. 반성하고 있던 바였다. 그런데…….
“만찬장에서 그 요망한 노란 것이 전하를 호리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평범한 병아리가 아니야. 분명 마녀가 술수를 써서 들어가 있는 거다.”
그- 저기, 마녀가 술수를 써서 들어가 있는 쪽은 오히려 당신의 동생입니다만.
게다가 대체 어떻게 내가 요망한 노란…… 뭐시기로 클레멘츠를 호렸다는 건가? 이게 바로 ‘저년이 내 (동생의) (것이 될 예정인) 남자에게 꼬리를 쳤어!’라는 것인가?
저런 엄청난 헛소리를 강제로 듣고 있는 알핀은 얼마나 퇴근하고 싶을까.
멀찍이서 냉소를 짓던 내 정신이 번쩍 든 건 다음 외침 때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야! 오늘은 아침부터 전하께 불려가 병아리를 찾겠다고 맹세하고 온 저택을 까뒤집어야 했지.”
빠득. 이를 가는 소리가 창가를 넘어 들렸다.
“그놈의 멍청한 병아리가 기어 나간 것 때문에! 이는 나 셀레우시스 아메시트 모나한은 물론 300년의 역사를 가진 모나한가에 대한 모욕이다!”
맞다. 병아리가 없어진 것 때문에 백작까지 불려 갔었다고 했지. 쥐뿔도 없는 주제에 자존심은 정말 센 모나한 백작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나 모나한 백작은 절대 이 모욕을 참지 않겠다. 알핀, 너는 주인의 모욕을 참을 테냐?”
“예? 무, 물론…… 시종은 주인이 당한 모욕을 참으면 안 됩니다만…… 그게…….”
“참지 마라.”
“예, 옙.”
모욕을 안 참으면 어쩔 셈이지. 그대로 되갚아 줄 작정인 걸까? 병아리에게?
창틀 너머로 슬쩍 고개를 들어 보니, 백작은 알핀에게 손짓해 가까이 오도록 만들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미물이 죄를 지으면 죽음으로 갚아야 하는 법. 그 건방진 병아리를 발견하거든 몰래 죽이거라.”
“예? 하, 하지만 황태자 전하의 병아리님이신데요?”
“멍청한 것! 너는 누구의 사람이냐? 황태자냐? 아니면 모나한 백작이냐?”
“그, 그건…….”
알핀이 우물쭈물하자 백작은 회유하듯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다른 하인들에게도 빠짐없이 전달하도록 해. 병아리가 전하에게서 떨어지는 순간, 모가지를 비틀어 죽이라고 말이야. 후후…….”
오싹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