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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2)화 (12/218)

12화

“저 작은 것이 그 멀리 백작저 본관까지 헤매느라 얼마나 배가 고팠겠습니까.”

엄청난 맛이었다. 원작에서도 클레멘츠가 시키는 모든 일을 어떻게든 완벽하게 해다 바치던 카시스 듀프레는 요리에마저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의외의 재주가 있군, 카시스. 앞으로 병아리의 식사 제조는 네게 일임하도록 하지.”

“전하께서 맡기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기쁘게 행하겠습니다.”

하지만 잘 먹다가도 그 말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제국 최고의 고급 인력이 병아리 식사 전담에 시간을 뺏겨야 할까? 클레멘츠가 가야 할 길에는 듀프레 후작의 그 다재다능한 조력이 필요한 일이 산적해 있을 텐데.

뭐 어차피 이 한 그릇 이후로 다시는 그에게 식사를 얻어먹을 일 따위 없을 테지만.

어휴, 하여간 저놈의 과잉 충성. 싫다고 할 줄도 좀 알아라.

그런데 힐끗 살펴본 카시스는 정말로 싫은 기색이 아니었다. 거의 클레멘츠와 흡사한 표정으로 내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니까 황공할 정도로 눈부시고 신분 높은 미남 둘이서 한갓 모이 쪼는 병아리를 더없이 흐뭇하게 감상하고 계시단 얘기였다.

“솔직히 충분히 깊은 트렁크에 넣어 두어 저 작은 날개로는 뛰어넘어갈 수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 보니 알겠군. 내 아이가 저리 잘 먹어 튼튼하구나.”

예? 누구 아이요?

“만찬 때 주변을 경계하는 걸 보고 느꼈지만, 예민하고 영민한 병아립니다. 사람을 피해서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저장고까지 찾아가지 않았습니까. 거기다 튼실하기까지 하니. 그야말로 당신께 어울리는 최고의 새가 될 겁니다.”

“당연한 말을 하는군, 카시스. 황족의 새가 아닌가.”

이게 다 뭔 소리람. 이젠 숫제 내가 탈주해서 숨은 것까지 칭찬할 기세였다.

“어떻게 성장할지 참으로 기대가 됩니다.”

에휴. 어떻게 성장하긴. 아무리 똑똑하고 힘 세 봤자 근수 좀 나오는 닭밖에 더 되겠냐?

애당초 저 콩깍지 씐 자들이 날 똑똑하게 보는 이유도 다 사실은 인간이기 때문이지 별건 아니었다.

어떻게든 내게서 정을 떼 놓아야 하는데, 방법이 없을까?

모이 그릇을 싹 비우고 머리를 굴렸다. 때마침 클레멘츠는 내게서 시선을 떼고 책상 위의 서류를 읽고 있었다. 카시스도 그 옆의 조금 작은 책상에서 서신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 옳거니.

변방으로 시찰을 와서도 다른 데 한눈팔지 않고 편지로 도착한 정무를 처리하다니. 실로 모범적이다.

완벽한 황위 후계자라는 명성을 얻은 클레멘츠와 행정관으로는 대적할 자가 없다는 듀프레 후작, 둘의 조합다운 광경이었다.

그렇지만 방해해야겠어.

로판은 일보다 사랑이 중요한 장르니까! 정상적으로 여주인공을 사랑하게 만들기 위하여 난 클레멘츠에게서 멀어져야 하니. 이런 고육계라도 써야 하는 내 심정을 부디 알아주었으면 한다.

누구더러 알아 달라고 바라는지도 모르는 채, 결심을 마쳤으니 일단 움직였다.

“전하, 이것은 수도와 각 지방별 귀족들의 영지 목록과 주 수입원을 비교한 것입니다. 옆의 서류는 최근 귀족들의 동향을 맥락과 인물간의 연관성에 집중하여 해석한 도표입니다.”

“어디 한번 보지.”

마침 카시스가 서류를 올렸다. 오호라- 귀족에 대한 문서라? 그렇다면 중요한 일인가 보군요?

하찮은 미물 같은 것이 검토를 방해해 버린다면 참으로 유감이겠군요?

클레멘츠 역시 진보랏빛 눈에 진지한 기색을 담고 서류를 응시했다. 하지만 그 내용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대뜸 다가간 내가 종잇장 한가운데에 발라당 누워 버렸기 때문이다.

“……!”

“……!”

경악한 눈빛들이로군. 후후. 어때? 무엄하지? 성가시지? 짜증이 확 치솟지?

“……하, 이건.”

“……귀엽군요.”

뭐라고?

“병아리가 전하께 정을 붙인 걸까요?”

“그랬으면 좋겠군.”

왜 그렇게 흘러가? 잠시만.

기세 좋게 누워 놓고도 당황스러움에 쭈뼛거렸다. 둘은 나의 귀여움과 이 ‘귀여운 ’'에 대한 소감을 몇 마디 더 나누더니 살짝 들어다가 옆에 내려놓았다.

후…… 후후후.

이 두 녀석 아직 끈질긴 병아리의 무서움을 모르는군. 그 사랑스럽단 눈빛이 곧 마귀 새끼를 보듯이 변할 것이다!

다시 서류를 앞에 두고 얘기하려는 둘에게 다시 다가가서 이번엔 더 대차게 엎어졌다.

그들은 이번에도 귀엽다고 칭찬한 뒤 나를 들어다 옆에 놓았다. 세 번째 시도에 클레멘츠가 말했다.

“병아리, 급한 일만 보고 나서 너와 반드시 놀아 주마. 지금은 안 되겠군. 미안하다.”

나는 무시하고 다시 그와 서류 사이에 끼어들었다. 히히! 못 봐!

“……후우.”

그가 한숨을 쉬기에, 고지가 눈앞인 걸로 생각했다. 이제라도 카시스에게 명령해 이 병아리를 밖으로 내보내리라고.

그러나 내가 안일했다.

“삑……?”

시야가 높아졌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그는 나를 제 어깨에 걸친 검은색 외투 앞주머니에 폭 흘려 넣었다. 훨씬 가까워진 거리였고, 살짝 미적지근한 체온마저 느껴졌다.

“정 네가 원한다면 같이 보도록 하자.”

옆에서 카시스가 웃었다.

“제국에서 가장 높은 열람 권한을 가진 병아리로군요.”

그 말대로 이 자리에선 클레멘츠가 들고 있는 서류의 내용이 잘 보였다. 이크. 나는 꼬물거리며 날개를 꺼내 그쪽을 슬쩍 가렸다. 원래는 사람이니까 내가 보면 안 되는 정보겠지.

그러자 자연히 반대쪽으로 넓어진 시야 가득히 클레멘츠의 얼굴이 보였다. 왼쪽 아래서 상당히 근접하여 올려다본 각도였다. 숲속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얼굴에 굴욕이란 없었다.

길게 뻗은 은빛 속눈썹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영롱한 보랏빛.

직선과 곡선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콧날. 턱선.

그 모든 것이 어느 때보다도 확실하게 눈에 담아졌다. 정말 성은이 망극…….

아니, 아니! 저 얼굴은 벨라의 것이야. 내가 이렇게 음흉한 눈길로 훑으면 안 돼!

날개로 그의 얼굴을 가려 보며 숨을 골랐다. 후우, 얼굴로 방어하다니, 역시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야. 저 외모에 그만 홀리고 어서 방해해야 하는데…….

날카롭게 굴리던 눈에 내가 담겨 있는 클레멘츠의 옷 자체가 들어왔다.

옷은 입은 사람의 신분을 말해 준다. 그 자체만으로 황태자의 권위를 드러내야 하는 외투의 만듦새는 정교함과 세련됨의 극치였다.

예를 들면, 차라리 하나의 예술 작품과 같은 저 목깃의 자수가 그랬다.

보라색, 검은색, 은색 실로 놓인 자수. 솜씨 좋은 장인이 며칠 꼬박 매달려 완성했을 것이다. 도안을 그린 이도 틀림없이 진정한 예술가였다.

황성의 장인분들께 사죄합니다. 크흑, 저도 저렇게 아름다운 걸 망치긴 싫어요. 싫지만…… 이 세계가 어떻게든 원래대로 굴러가게 하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네요.

몇 번 꾸물거리다 추진력을 얻어 점프하고, 정확히 자수의 가장자리에 발톱을 거는 데 성공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튼실한 부리로 실밥을 몇 차례 물어뜯었다.

“전하…! 옷이.”

좋았어!

마냥 태평하던 듀프레 후작도 놀라서 지적했다. 섬세하기 짝이 없는 자수는 버릇없는 병아리의의 부리와 발톱에 무자비하게 망가졌다.

이제, 이제 됐겠지? 이 옷이 얼마짜린데. 이제 내쫓을 마음이!

“푸흡! 하하하.”

생겼겠지, 라고 생각하려고 했는데. 난데없이 터진 웃음소리에 아까보다도 가까워진 그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봤다.

세상에. 클레멘츠가 소리 내어 웃고 있잖아.

가만히 숨만 쉬어도 잘생겼는데, 저렇게 스스럼없이 웃는 순간은 차라리 마법적인 무언가였다.

지금은 대낮인데도, 깊고 맑은 밤의 월하 향 꽃봉오리가 탁 터지는 것만 같았다.

조금 뒤늦게야 내가 격하게 움직이느라 그를 간지럽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지금 사람의 몸이었다면 아무 행동도, 아무 생각도 못 하고 그저 불타는 고구마 같은 낯으로 서 있었으리라.

야, 야, 약해져서는 안 돼. 벨라를 생각해. 벨라! 나에게 힘을 줘!

결과적으로 내 행동은 아무 반향도 일으키지 못했다.

클레멘츠는 손가락을 내어 나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가 망가진 옷에 신경 쓰지 않자 카시스도 금세 관심을 끄고 업무에 집중했다.

난생처음으로 황궁의 의상 담당자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독한 자식들, 공부를 이렇게 했으면 전교 1등을 했을 거다.

그렇다. 당장 한국 입시 현장으로 끌고 가도 압승을 거둘 집중력이었다.

다른 방법을 찾자. 지금까지는 너무 온건했나 보다.

타락시키려는 대상이 너무 건실하자 점점 사악하고 비열한 방법을 찾는 악마처럼, 더욱더 악랄한 병아리가 된 내 눈에 꽂힌 것은 서류였다.

그래, 저 서류로 일을 한다면 서류를 쓰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면 되는 거였는데. 왜 지금까지 그 생각을 못했지? 후후후. 우후후. 크. 하. 하. 하. 하.

“그래서 옆의 이 숫자를 보시면…… 어! 병아리가.”

포로롱. 적진으로 뛰어드는 돌격 대장마냥 보무당당히 책상에 올랐다.

“엇!”

“조심하거라!”

역시 이번엔 반응의 온도 자체가 달랐다. 나를 잡아채지도 어쩌지도 못한 채 긴장한 그들을 비웃듯이, 한쪽 발을 들어 잉크병에 담갔다.

“……!”

“삐약삐.”

그리고 마치 아무 것도 모르는 순수한 병아리처럼 책상을 빠르게 종횡으로 오갔다. 특히 방금 전 카시스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바로 그곳에 잉크 도장을 꾹 남기는 걸 잊지 않았다.

“서, 서류가…… 서류가……!”

카시스에겐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내가 너무 심했나? 심했다. 죄송합니다, 후작님. 정말 죄송합니다. 부디 백업을 해 두셨기를.

그런데 정작 문제의 황태자 전하께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당당하며 자유로운 걸 보니 황가의 병아리가 확실하구나. 장하다.”

진심이냐? 너는 도대체 뭐가 문제냐?

하아- 정말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황태자 전하의 반응이 기대 이하라서 어쩔 수가 없네. 후작님, 원망하라면 그대의 주군을 원망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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