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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1)화 (11/218)

11화

평소 같으면 일일이 멈춰 서서 넉살 좋게 인사를 주고받았겠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했다. 동이 트면 뜻대로 운신할 수 없다.

‘찾으셨어요? 아이고 죄송해요.’와 ‘저는 괜찮아요.’를 기계음처럼 연발해 대며 두 발은 계속 움직여 저택 건물을 향했다.

접근해 오는 인물들에게 일하러 갈 시간임을 상기시켜 모두 보내 버리느라 힘들었다. 그 뒤에야 나는 간신히 혼자가 되었다.

내가 돌아왔다는 걸 이제 하인들도 알고 있다. 벨라가 쪽지를 봤을 테니 이제 날 찾으라는 명을 다시 내리지도 않겠지. 적어도 민폐 끼칠 일은 이제 없는 셈이었다.

“휴…….”

벌써 하늘은 뿌옇고 푸른빛을 잔뜩 머금었다. 나는 서둘러 저택 본관의 하인용 입구로 들어갔다.

모나한 저택은 본관과 별관으로 나뉘었다.

용도를 구분하자면 본관에는 손님을 응대하는 접견실과 만찬장, 회의실 등의 공적이고 굵직굵직한 장소가 있었다.

또한 뜨끈뜨끈한 만찬을 바로 대령하며 하인들이 빠릿빠릿하게 시중들 수 있도록 주방과 저장실, 하인 숙소 등도 본관에 함께 있었다.

별관은 백작가의 식구나 귀빈이 사용할 안락한 침실들과 서재가 있었다. 모나한 백작, 벨라, 클레멘츠, 카시스의 방이 모두 별관이었다.

그러므로…….

‘별관은 안 돼. 본관에 숨어 있는다!’

로맨스가 진행되도록 거리를 두고 있어야 하지만 집에는 갈 수 없다면, 역시 주인공들과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원래 내 방은 별관의 벨라 방 옆에 찰싹 붙어 있었다. 그렇지만 거기 있으면 벨라가 나를 발견하게 될 터. 내가 황태자의 병아리라고 알고 있으니 나를 데리고 클레멘츠에게 가거나, 클레멘츠에게 내 이야기를 꺼내거나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주인공들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으리라던 내 다짐은 말짱 도루묵이 된다.

만찬장에서도 나 때문에 분위기가 엉망진창이 되지 않았던가. 또 얼쩡거렸다가 어떤 파국이 닥칠지. 상상만 해도 두렵다.

벨라와 클레멘츠 사이에 안정적인 핑크빛 기류가 흐를 때까지는 본관에 몸을 숨기고 있자.

이 저택에서 일해 온 세월이 헛되지 않아, 어디로 숨어야 할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대저택의 본관. 하루를 시작할 준비가 한창인 말소리며 발소리가 먼 데서 먼지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나는 구석진 복도에 있는 작은 문으로 들어섰다.

바깥에서 보기보다 넓은 공간이었다. 작은 창에서 들이친 빛이 겨우 발밑을 밝혀 주었다.

나무로 짜인 선반들 위에 린넨 자루로 묶은 저장 식품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이곳은 수많은 식료품 저장실 가운데 하나로, 비스킷이나 육포 같은 장기 보존 식을 넣어 두었다.

백작가에선 늘 신선한 재료로 만든 진수성찬을 아낌없이 먹을 수 있으니, 평소엔 이런 비상식량 창고는 누구도 굳이 들어가 볼 이유가 없었다.

“휴.”

살그머니 문을 닫고 돌아서니 그제야 안전한 장소에 도달했단 생각이 들었다. 작은 창문 밖에서 들어오는 빛은 점점 밝아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다시 병아리가 되었다.

과정은 사람으로 돌아올 때와 똑같았다. 후욱- 하는 상승 기류가 나를 동동 띄워 올렸고, 흰빛이 주변을 감쌌다. 다음 순간엔 작디작은 노랑 병아리가 되어 저장 창고 바닥에 살그머니 내려앉았다.

이 괴리감은 아무리 변신을 해도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았다.

벨라는 어떻게 흑표범이 되는 저주를 참고 견뎠을까? 숲속을 뛰노는 게 그리도 좋은가 보다.

클레멘츠와 성공적으로 이어지고 나서도 그 자유가 보장되어야 할 텐데, 흠.

‘뭐, 안 되겠어? 내가 옆에 있을 텐데.’

백작가에서도 오랜 세월 그녀의 비밀과 자유를 지켰으니 황궁에서라고 못 할 건 없을 것이다.

비록 몸은 병아리가 되어 있었지만 나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어떻게든 저주를 풀 수 있으리라고.

빛나는 사랑과 미래를 펼쳐 갈 주인공들의 곁에 있을 수 있다고.

쌓여 있는 비스킷 자루 위로 포로롱 날아 눈을 감았다. 밤이 되면 저주를 풀 방법을 더 자세히 찾아보리라고 생각하면서, 쏟아지는 졸음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그렇게 눈을 떴는데.

“흐윽, 병아리님……!”

뭐야 이거.

“병아리님! 정말 다행이에요. 더 늦기 전에 발견되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으흑…… 흑!”

잠이 덜 깬 눈을 힘주어 떠도 보이는 상황은 똑같았다. 웬 소년이 나를 손바닥 위에 모셔 놓고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병아리님…….’

그 어처구니없는 호칭을 엊저녁에도 붙인 사람은 백작의 시종 알핀이었다.

이 상황은 그러니까…… 들킨 거네?

“병아리님, 대체 이런 구석진 곳에는 어쩌다가 들어오셨어요! 이 저장실은 평소엔 아무도 안 온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런데 너는 대체 왜 들어온 거야?

“아무도 병아리님을 발견하지 못하면 아무도 모이를 드리지 않을 테고, 따뜻하게 데워 드리지도 않을 거고, 그러다가 연약하신 병아리님이 돌아가시면 백작가는…… 또 우리 하인들은…… 흑!”

소년은 말을 멈추고 소매로 눈물을 슥슥 닦았다.

“휴, 아무튼 다행이다.”

“…….”

그리고 목청 높여 외쳤다.

“병아리님 찾았어요!!”

뭐?!

아, 아니. 병아리 잘못 봤습니다.

저는 그냥 평범한 민가의 병아리고요. 엄마 닭을 놓쳐 헤매다가 여기 맛있는 게 있어 보여서 들어온 것뿐이에요.

비록 비스킷도 육포도 병아리가 쪼아 먹기엔 너무 단단하지만 아무튼요.

여기 있다가 죽으면 안타깝지만 그게 운명일 뿐인 그런 병아리라고요. 절대 생각하시는 그런 중요한 병아리가…….

“정말이냐, 알핀?”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저 바깥에서 외치는 소리와 함께 이쪽으로 우르르 몰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니 젠장, 아니…… 무슨 상황인지 대충 알 것만 같았다. 어쨌든 벗어나야만 하는데!

“삐, 삐빅-!”

알핀이 한눈파는 사이 어떻게든 날아 보려 했으나, 소년은 기민하게도 다시 나를 감싸 잡았다.

“어엇-! 안 돼요, 병아리님. 저희와 가셔야죠. 황태자 전하께서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고 계신다고요”

뭐어-!!!

곧이어 저장실 안에 사용인들이 모여들었다. 아마 이 저장실이 생기고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들어온 건 처음일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참 안쓰럽고 정신 사나운 몰골로 ‘살았다, 만세!’를 연발했다. 한마디씩 던지는 말들만 정리해 봐도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최고의 귀빈이시자 클라티아의 영광 그 자체인 황태자께서 기침하시자마자 병아리가 없어진 걸 아셨다. 백작님이 불려 가셨고 온 저택이 뒤집어졌다.

전하께서 병아리를 찾아오기 전에는 식사도 하지 않겠다 엄포를 놓으셨으니, 다들 아무것도 못 한 채 곳곳으로 흩어져 병아리만 찾아다녔다.

잠긴 문은 열고, 물건이 쌓인 창고는 뒤엎고, 하여간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고 한다.

시시각각 참담한 심경을 금할 길이 없었다. 머리카락 대신 내 머리에 난 솜털이라도 쥐어뜯고 싶은 기분이었다.

대체……. 클레멘츠, 대체 왜 이러니! 이러는 게 벨라에게 얼마나 안 좋아 보이겠어? 여주고 뭐고 필요 없다 이거니? 남주가 하고 싶긴 한 거야?

하, 어쨌든 이대로라면 이어질 상황은…….

“어서 황태자 전하께 데려다 드리죠!”

“아이쿠, 그래. 맞아.”

“흠흠. 내가 가도록 하겠네.”

집사 할아버지가 알핀으로부터 나를 넘겨받았다.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점잖게 나를 쓰다듬었다.

“어제는 오필리어고 오늘은 병아리님이라니, 요즘은 뭘 찾아 헤매게 될 운세인가. 허허.”

어쩌다 보니 두 실종 소동의 당사자이자 공범이자 주범이 나였다. 모두에게 그저 면목 없을 뿐이다.

그렇게, 그렇게 나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나를 보자 클레멘츠의 보랏빛 눈이 크게 일렁거렸다.

“정말 그 아이로군.”

“면목 없습니다, 전하.”

“찾았으니 됐다. 처음 발견했다는 시종에게는 큰 상을 내리도록 하지.”

“오, 자비로우신 전하, 그 애에게 크나큰 영광일 겁니다.”

집사 할아버지가 공손히 물러가고, 클레멘츠는 나를 큰 책상 위에 설탕 과자 다루듯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따사로운 눈길이 와 닿았지만 애써 그의 눈을 외면했다. 얼음 같은 남주의 다정한 눈길 따위, 여주인공을 제외한 생물도 무생물도 받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왜, 젠장.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병아리.”

“……휴, 삐약.”

“얌전히 잠을 청하지 않고 왜 그렇게 위험한 곳으로 사라졌느냐. 내가 미치는 꼴을 봐야만 하겠나?”

그 목소리에 담긴 책망조차 꿀처럼 달고 부드러웠다. 젠장, 넣어 두라고! 대사도 그렇고 부디 벨라를 위해 아껴 달란 말이야. 병아리가 대체 뭐길래 이래.

아무리 간절히 빌어도 그는 멈추지 않고 한술 더 떴다. 부러 그를 데면데면 못 본 체하며 있었더니 클레멘츠가 몸을 낮추어 나와 시선을 나란히 했다.

“하룻밤 새 얼마나 야위었느냐. 가엾은 것.”

아뇨, 저기요, 그럴 리가요.

사실일 리 없음에도 걱정스러운 말에서 진정성이 듬뿍 배어나왔다.

“전하께서 병아리를 키우신다기에 알핀이란 소년에게서 병아리 돌보는 법을 전부 전수받았습니다. 다행히 찾았으니 이 특식을 먹일 수 있겠군요.”

때마침 클레멘츠의 인공 지능 명작인 카시스 듀프레 후작이 조그만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 언뜻 볶은 곡식의 고소한 향기가 풍겨 왔다.

흥, 입맛 없어.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속 편하게 모이나 쪼고 있으라는 거야?

꿀꺽.

그러고 보니 어젯밤부터 변변한 걸 먹지 못했구나. 그저 살짝 볶은 곡식 모음일 뿐인데 지금 이 순간 지독하게도 맛있어 보였다.

“자아.”

카시스는 내 가까이로 그릇을 밀었다.

으음, 혼우드산 햇귀리에 으깬 완두콩, 곱게 가공해 갈색이 되도록 가열한 밀기울인가. 제법…….

헛, 아니 비겁하게……! 비겁하게 나를 먹을 걸로 길들이려 하다니!

“잘 먹는군.”

클레멘츠가 흐뭇하게 지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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