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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0)화 (10/218)

10화

“대문 밖으로 나가시려고요? 음, 용서하십시오, 아가씨. 이놈이 뭐라고 감히 아가씨께 말참견을 하면 안 되는 건데, 그……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 않습니까.”

“…….”

“언제까지 밖에 계실 겁니까? 외람되옵니다만 혹시 숲으로 가실 생각은 아니시죠? 아이쿠, 죄송합니다. 허나 무슨 일이 있었다간 경을 치는 건 소인 같은 놈들이 아닙니까. 용서하십시오, 아가씨.”

그딴 소릴 감히 제게 늘어놓은 문지기 페로는 오필리어와 친했다.

뭐라도 씹은 듯 떫은 표정으로 감히 제 주인의 동생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던 바로 그 얼굴로, 오필리어 녀석이 ‘충성!’을 외치며 각도 안 잡힌 경례를 올리면 쉽게도 너털웃음을 지어 댔다. 바보스러움이 옮기라도 한 건지. 그럴 때면 오필리어 레오라가 두 배는 더 싫었다.

‘돌아오기만 해 봐. 저녁을 굶겨 버릴 테다.’

그런 바보를 위해 나오다니. 괜한 짓을 한 스스로를 탓하며 막 저택으로 들어가려 했을 때였다. 이 답 없는 시골의 공기 속에서는 빛나다 못해 번쩍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자가 말을 건 것은.

“잠시 말 좀 묻지.”

벨라루시아는 불만과 만족,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감정들을 그때까지도 선명히 분별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 느껴지는 건 종전까지와는 완전히 결을 달리했다.

뭐지, 저건?

심장을 뒤트는 강렬함이었다. 도무지 귀찮다는 눈으로 외면하거나 대충 구겨서 어딘가로 던져 버릴 수 없는 종류였다.

자신이 저자를 본 것인가? 아니면 저자가 제 눈을 붙잡아 끌어당긴 건가.

벨라루시아는 자신이 별안간 팽팽히 당겨진 화살이 되었다고 하면 알맞을 것이라 여겼다. 겨눠진 대상은 은빛의 사내였다. 그러니 두 눈을 뜨고 쳐다보는 수밖엔 다른 선택이 없었다.

온 신경을 빳빳하게 당겨 걸어 놓은 장력이 뒤에서 속삭인다. 저자를, 저놈을…….

어떻게 하겠다는, 뒤이은 충동을 벨라루시아는 해독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자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주변의 공기가 정상으로 돌아온 듯했다. 허파를 쥐고 있던 손에서 풀려난 것처럼 숨을 쉬었다.

끔찍하게 불쾌했다. 또한 그 눈은 끔찍스럽게도 고왔다.

“벨라, 소중한 나의 동생아. 누가 왔는지 똑바로 보았겠지?”

지금껏 본 그 어떤 옷보다도 요란스럽게 차려입은 오라비가 그녀를 불렀다.

그녀와 똑같은 벽안과 흑발이되 그 얼굴은 판이했다. 백작은 서부의 어떤 고만고만한 지방 귀족을 만나러 갈 때보다도 훨씬 더 헛바람이 잔뜩 든 표정이었다.

“황태자 전하시잖아요.”

“그래. 그렇다면 네가 이제부터 뭘 해야 할지도 알겠구나.”

“뭘 해야 하죠?”

“이런, 동생아! 여태껏 목청이 터져라 가르쳤음에도 아직 네가 뭘 해야 할지 모른단 말이냐? 쯧쯧…….”

백작은 여동생을 벽에 붙은 거울 앞으로 데려갔다.

“봐라, 너의 아름다움을. 너는 좁디좁은 저택 안에서만 자라 모르겠지만 너의 아름다움은 혼우드 제일일 뿐 아니라 멀리 수도로 가도 대적할 여인이 없단다.”

외모가 좋다 나쁘다 하는 건 벨라에겐 창문 밖에 날아다니는 벌레 정도의 문제였다.

어쨌든 존재는 하는고로 사람들을 시끄럽게 만들되, 관심 밖에 있으므로 그녀에게선 아무 감상도 이끌어 내지 못했다.

다만 방금 전에 목도했기로 황태자의 모습은 거기에서 벗어난 다른 영역이기는 했으나.

“네 시녀 아이도 제법 예쁘장하지만 옆에 서 있으면 오로지 너를 돋보이게 할 뿐이지.”

은거울 속에서 멍하니 뜨여 있던 눈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벼려져 제 오라비를 곁눈질했다.

“그 바보가 여기서 왜 나오나요.”

그러나 제 이야기와 꿈에 한껏 도취돼 있는 백작에겐 곱지 못한 눈길도 말도 먹히지 않았다.

초라한 출신의 시녀 하나야말로 그에게는 창밖의 벌레와 다름없었다.

“알겠느냐? 사내라면 너를 보면 좋아하게 될 수밖에 없어. 식사가 시작되면 그분께 시선을 보내거라. 말을 던지거라. 이토록 고급한 무기를 가지고도 이용하지 않는다면 너는 바보다. 그분을 쟁취해라. 이 오라비와 이 집안에 영광을 안겨주도록 하렴. 오오, 너도 사랑을 하면 좋지 않겠니?”

사랑?

벨라루시아는 코웃음을 쳤다. 사랑이란 주제 역시 그녀에게 외모와 마찬가지 정도의 무게였으나, 이번엔 창문을 자꾸 두들겨 대는 벌레 정도는 되었다. 한사코 그 주제로 귀찮게 하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벨라, 너는 언젠가 사랑을 하게 될 거야.”

기이하게도 그런 말을 할 때의 바보 녀석은 그 어느 때보다 바보 같은 얼굴이었다.

“지금껏 살아온 인생이 변하고, 알아 온 세상이 변하는 강렬한 사랑. 그 사람을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스해지고, 그 사람이 행복해지기만 한다면 무엇이라도 주고만 싶은 그런 감정.”

또 시작이네.

“네가 말하는 사랑이란 게 파이 사고 돈이 남으면 서점에서 세 권에 1실버씩 주고 사 오는 거니?”

그때엔 오필리어 옆에 각양각색 한심한 책들이 쌓여 있었다.

“으흠흠. 크흠. 물론 그런 책에 나오는 사랑도 있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바보 자식은 부끄러운 듯 책 더미를 슬쩍 자기 뒤로 밀었다.

[집착 대공님의 침대를 탈출했더니 이번엔 정신 나간 폭군이…….]

하도 길어서 다 보이지도 않는 제목인 데다 조잡한 붉은색이 덕지덕지 발라진 표지가 수상쩍었다. 얼씨구, 바보 주제에.

조금 붉어진 얼굴로 그 책을 살짝 뒤집어 놓은 바보가 말을 돌렸다.

“만약, 만약에 있잖아. 어떤 사람을 너무 갖고 싶어서 부수거나 가둬야겠다는 욕심이 들어도 그러면 안 돼. 사랑한다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이 잘 있도록 해 주어야 해.”

“관심 없어. 이제 네 경박한 책이나 봐.”

바보는 끈질기니까 바보였다.

“남녀 간의 사랑만 사랑은 아니야. 이를테면 나도 너를 사랑해!”

정말 곤란한 기억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얼굴은 바보 같다 못해 아예 바보의 기운이 뿜어져 나와 제게까지 옮겨 붙을 듯한 기세였다. 벨라는 질색하며 밀어냈다.

“나는 너 싫어.”

“그래도 괜찮아. 지금은 관심 없더라도…… 언젠가 너는 전부 알게 될 거야. 그러니 서두를 필요 없어. 앞으로 시간이 아주 많이 남아 있으니까.”

앞으로의 시간을 말하는 눈은 꿈결에 젖어 있었다. 그 바보는 꼭 영원히 성가시게 곁에 붙어 있을 것처럼 굴었다. 벨라는 몸서리치며 내뱉었다.

“시끄러워!”

사랑 타령에 안 그래도 모자란 뇌가 절어 버린 오필리어 레오라는 아예 사랑 노래를 불렀다.

이불을 털면서, 방을 청소하면서, 정원을 거닐면서. 아, 그 소리가 얼마나 듣기 싫던지!

매번 귀를 틀어막고 창문을 닫아 걸었어도 그 음성의 잔상은 여전히 귀에 남아 있었다.

그러니 잘은 몰라도 하나는 확실한 것 아니겠는가. 사랑은 바보스러운 거다. 그러니 가능하면 영영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굳이 따지자면 오라비는 현명하기보단 멍청한 쪽이었다. 그러나 늘 수중에 들어올 이익만큼은 철저히 따지는 오라비가 오필리어나 하는 바보짓에 물들 리는 없었다.

제 오라비의 말끝에 들먹인 사랑을 벨라는 그렇게 가볍게 묵살했다.

어쨌거나, 그 황태자. 그자의 존재가 예상 밖이란 것만큼은 인정했다. 저녁 만찬장에 들어가기 전, 벨라루시아는 자신을 뒤흔들었던 감정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네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는 가능하면 명확히 알수록 좋아, 벨라.”

가끔 그 바보가 도움이 될 때도 있긴 있었다.

화살처럼 날카롭고 활시위처럼 팽팽하고. 잘못 버려두면 제 속을 마구 긁을 뿐 아니라 손에 쥐면 그 상대조차도 찔러 버릴 수 있을 법한 기분.

오필리어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반 푼어치도 사랑이 아니었다. 이건 그러니까…….

벨라는 얽히고설킨 느낌 안에서 알아볼 수 있는 형태를 신중하게 빼어 냈다.

“갖고 싶어.”

입 밖으로 내자 더 선명해졌다. 달을 뽑아내 태어난 듯한 몸. 그 피 한 방울, 눈빛 하나까지도 전부 내 거야.

“너는 혼우드의 공주나 마찬가지니, 동생아. 이 땅 위에 네가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가져야지.”

허나 만약 가지지 못한다면, 상하게 하고 피를 흘리리라. 그 피는 붉으리라. 그자의 눈은 황실의 것이라는 보랏빛이니. 그 눈을 찔러 피를 내면 어쩌면…….

벨라루시아는 잘 익은 포도주의 향을 떠올렸다.

그의 피를 쏟는 일이 분명 질 좋은 포도주를 담느니보다 가치 있는 일이리라. 그를 찌르고 싶다- 이 손으로.

밤마다 사람 하난 우습게 찢어 죽일 맹수가 되어도 생명을 직접 거둬 본 일은 없었다. 그러나 왠지 저자라면, 저이의 생명이라면 뺏어 봄직도 했다. 아마도 무척 기쁠 것 같았다.

“벨라, 네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 할 수 있어. 그럴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게.”

오필리어도 미덥진 않지만 적어도 오라비보다는 낫지 않나.

“아가씨,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오필리어 대신 부르러 나온 시종이 아뢰었다. 벨라루시아 아가씨는 매혹적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나 하고 싶은 게 생겼어, 이 바보야.

* * *

아, 이게 뭔가요.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다시 백작가의 정문을 통과했다. 주간 경비와 교대할 때가 된 페로 씨가 하품을 하며 반겨 주었다.

“며칠 쉴 줄 알았더니 바로 출근이냐?”

“하하, 그렇게 됐네요.”

“하암. 너도 참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구나. 수고해라. 아가씨랑 꼭 화해하고.”

“네, 네. 그럼요.”

채 해가 밝지 않았지만 저택의 사용인들은 벌써 일과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오필리어잖아? 대체 어디 있다 오니?”

“오필리어! 아이고, 이 녀석아!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하, 하하. 죄송해요. 많이들 걱정하셨나요? 저는 별일 없어요. 그냥 몰래 낮잠을 좀 잔 건데, 아이 참. 정말 죄송해요. 괜찮다니까요. 앗! 라스민 씨는 어서 우물물을 길러 가셔야 하지 않나요?”

망토를 눌러썼는데도 여기저기서 날 알아보고 말을 거는지라 꽤나 곤란했다.

제길, 이 단벌 망토 탓인가? 짙은 남색 옷감이 예쁘면서 튼튼하고 테두리도 깔끔하게 둘려 있어서 마음에 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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