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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9)화 (9/218)

9화

“설마 너…… 이제 와서 흑염의 마왕 같은 걸 소환해 볼 생각인 거야? 그러기엔 몇 년 늦은 나이 아닌가?”

“그런 거 아니에요.”

“아쉽네. 예전에 나도 진지하게 시도해 본 적 있었어. 주문도 기억하고 있지. 피보다 짙은 자여, 어둠보다 검은 자여…….”

“아, 제발 그만하세요…….”

혼우드에서마저도 적마법은 이제 그다지 진지한 취급을 받고 있지 못했다.

“아무튼 오필리어의 말이니까 최대한 멀쩡한 물건으로 구해 볼게. 여긴 혼우드니까, 그런 종류의 책 구하기야 어렵지 않지.”

“최대한 빠르게 부탁해요. 며칠 안으로 올게요.”

설령 제대로 된 책을 구한다 해도 내게 적마법을 이해할 만한 재능이나 직관이 있을진 모르는 일이지만,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듯 뭐라도 시도해 봐야 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시몽 씨와 작별하고 서점을 나온 나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저주 해결 이외에 내가 해야 할 일. 바로 틀어져 버린 로맨스를 제자리로 되돌려 놓기.

아무리 객관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원작과 이만큼의 편차가 생긴 건 내 탓이 컸다. 그밖에는 변수가 발생할 요인이 없었다.

그렇다면 배경으로부터 그 변수를 제거- 즉 내가 모나한 저택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변형된 조직에서 이물질을 제거했을 때처럼 스스로 원래 모습을 되찾지 않을까?

클레멘츠는 하룻저녁 처음 보는 병아리에게 신경을 쏟았지만, 아침이 되자 ‘병아리가 도망갔군. 갈 곳으로 갔겠지.’ 정도의 감상을 남기고 잊어버리는 것이다.

벨라는 쪽지를 보고 내가 어딘가에 잘 있다는 걸 알았을 테니, 집으로 온 귀하디 귀한 손님에게 정신을 집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비록 해석할 수 없는 본능이 그를 해치길 원하고, 오라비가 어떻게든 유혹해 내라고 헛소리를 해 대겠지만. 이제 벨라는 그것들이 제 의사와 상관없다는 걸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내가 필요하다면, 밤에 백작가로 가 보자! 야간 문지기 페로 씨는 나를 들여보내 줄 터였다. 뭐가 됐든 빌어먹을 병아리인 상태로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당분간 밤에만 움직이면서 저주를 풀 방법도 찾아보고, 낮에는 안전하게 집에 틀어박혀 있어야겠다.

계획은 그럴싸했다, 계획은. 그런데…….

“여보, 우리 오필리어가 요즘 통 소식이 없네요. 집으로 잘 돌아오지도 않고……. 설마하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요?”

무슨 일이 있어도 거하게 있었던 딸은, 집으로 들어가려다 부모님의 이야기 소리를 듣고 멈칫했다.

레오라 남작가는 가세가 기울면서 재산이란 재산은 다 팔아 버려, 집이라곤 이제 다 무너져 가는 저택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 무너져 가는 이 집은 정원 근처의 침실에서 나누는 이야기가 이토록이나 여과 없이 들렸다.

보무당당히 문 열고 들이닥치려던 발걸음이 멈칫거렸다. 어머니, 아버지, 제가 왔는데요, 그런데요, 아무 것도 일단 묻지 마시고요-로 시작하려던 장황한 변명이 쏙 들어갔다.

“일은 무슨 일입니까. 어렸을 때부터 그 아이가 얼마나 의젓했다고. 그 아인 이미 우리들보다도 훨씬 미덥다고요.”

윽.

“그렇지만…… 이제 겨우 스무 살이잖아요. 그 예민하고 까다로운 백작님께 무슨 책이라도 잡히는 날엔…….”

“진정하세요. 오필리어는 열두 살 때 갑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울었던 그때 이후로 우는 소리 한번 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때부터 한사코 모나한 댁 아가씨를 지키겠다며 의욕을 불태우고.”

“그 어린애가 얼마나 부담감이 컸으면 그랬겠어요? 그때부터 어리광 한번 안 부리는 게 오히려 가슴 아파요. 남작 작위를 이어받은 제가 좀만 더 능력 있었어도…….”

“토머스.”

“흑……. 만일 우리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땐 전 정말 더는, 흑, 버티지 못할 것 같아요. 에반젤린…….”

“걱정 말아요, 톰. 걱정 말아요. 아휴- 이 사람! 다 큰 어른이 어쩜 이렇게 잘 우는 거예요?”

이어서 아버지가 훌쩍훌쩍 흐느끼는 소리와 어머니가 나직하게 달래는 소리가 들리고, 점점 조용해지며 불이 꺼졌다.

아, 이거 참.

레오라 남작가를 물려받은 아버지는 무척이나 눈물이 많고 심약한 사람이었다. 지금 어머니가 간신히 진정시켜 잠자리에 드신 것 같은데, 지금 들이닥쳐서 상황을 얘기했다간 아예 목 놓아 울다가 쓰러지실지도.

“하…….”

꽃봉오리가 막 올라온 등나무에 기대며 주저앉았다. 이제 시간이 별로 없었다. 먼동이 틀 조짐이 보였다. 백작가로 돌아가거나 집으로 쳐들어가거나, 지금 결정해야 했다.

작은 얼굴을 손바닥에 푹 파묻자 단발로 짧게 친 머리가 앞으로 쏟아졌다.

바보 같은 나. 그때 숲속에서 틀린 판단을 하지만 않았어도. 그깟 약초를 그렇게 욕심내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대차게 말아먹는 일 따위…….

나의 ‘진짜 부모’는 한국에 있었다. 별안간 이런 세계에 오는 바람에 못 만난 지는 아주 오래됐지만 그렇게 애틋하거나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헤어져 있어도 알아서들 어련히 잘 사시겠거니.

성인이 되자마자 날 끈 떼 놓은 연처럼 떼어 놓은 사람들이었다. 너도 이제 성인이니 웬만한 건 알아서 해야 하지 않겠냐면서, 대학가의 쪽방 하나를 얻어 준 게 다였다.

거기서 내가 거듭 휴학계를 써 가며 이런저런 알바를 전전하는 동안, 두 살 어린 남동생에게는 학비든 용돈이든 달라는 대로 퍼 주었다.

그런 사람들이니 내가 없어져도 버틸 거란 확신이 들었다. 만약 남동생이 사라졌다면? 그러면 그거야 큰일 난 거지만.

막 스무 살이 된 내가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잘해 나갈 거라고 그들도 믿었듯이. 나 역시 그들이 나 없이 잘 살 거라고 믿으면 된다. 딱 그 정도의 미련이었다.

하지만 이 무너져 가는 레오라 가문의 남작 부부는.

그들은 오필리어 레오라를 낳아 기른 ‘진짜 부모’였다. 8년간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지지해 준 사람들이기도 했다.

처음엔 이들도 원래 생의 내 부모와 다를 바 없는 줄 알았다. 겨우 열둘밖에 되지 않는 어린아이를 남의 집에 시녀로 보냈으니까.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확실해졌다. 그들은 단지 실제로 무능해서 어린 딸의 손이라도 빌려야 할 뿐이었다. 남작 부부도 그들의 신분에서 찾을 수 있는 돈벌이에 열심히 매달렸지만 역부족이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그 알량한 귀족 신분과 저택 유지라는 명목으로 버는 족족 새어 나가는 잔고 탓이었다.

그렇지만 신분이 모든 것인 이 세계에서 덜컥 귀족 혈통을 내던지는 건 현실적으로도 어렵고, 나름 오래되긴 한 집안이라 조상님 뵐 낯도 없었으리라.

이 세계에선 몰락 귀족의 자식이 어릴 때부터 시녀나 시동 노릇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오히려 그 일에 저렇게 죄책감을 느끼는 게 드문 케이스였다. 보통이라면 ‘등 따시고 배부른 곳에 보내 줬는데 뭐가 문제지?’라며 코나 후비면 후볐지.

무엇보다도 ‘이제 스무 살밖에 안 된 아이를…….’이란 말에 옛날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한숨을 폭 내쉬며 조용히 일어서 망토 자락을 털었다. 출근할 시간이었다.

결국은 또 병아리인 상태로, 한바탕 폭풍이 지나가게 될 백작 저택에 있게 되는 거다. 제발 그 폭풍의 이름이 사랑이면 좋으련만.

그래, 좋게 생각하자. 그렇게 잘 대해 줘도 도망쳐 버린 병아리 따위, 클레멘츠는 더 이상 아무런 미련도 두지 않겠지? 그러니까 하루 이틀만 눈에 띄지 않으면 완전히 잊어버리겠지?

그렇겠지?

* * *

늦는다.

벌써 세 번째 시계를 확인하던 벨라루시아 레우니스 모나한은 신경질적으로 시계를 닫았다.

거슬려, 정말로.

그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만나고, 함께했던 8년 전부터 언제나 거슬리는 아이였다. 옆에 있을 땐 물론이고, 어느 순간부턴가 옆에 없을 때는 특히나 더 거슬렸다.

걱정할 가치가 없어.

그야 그 아이는 곧잘 이런 식이었으니 말이다.

간단한 일을 하라고 시장으로 보내 놓으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서 화가 나게 해 놓고, 한참 뒤에나 시답잖은 군것질거리들을 잔뜩 들고는 헤벌쭉한 얼굴로 나타난다.

“미안해. 시장에 간다고 하니까 다들 나한테 뭐 하나씩 부탁해 가지고. 걱정했어, 벨라?”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면 그 얼굴은 두 배나 더 바보스러워 보였다.

걱정? 웃기고 앉았다.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그런 간지러운 단어를 쓰다니.

“걱정? 별일이네. 아니, 나는 화났어.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에게 연락이라도 미리 보냈어야 할 거 아니야?”

“미안…….”

그러고선 둥글고 큰 눈에 경이로울 만큼 길게 빠져 있는 눈꼬리를 뚝 떨어뜨린다. 동정심을 유발할 속셈, 모를 줄 아나. 벨라루시아는 더욱더 표정을 굳혔다.

“대신……!”

그 표정을 읽는 황금빛 눈 안에는 불티가 톡, 튀었다. 커다란 눈동자에는 저렇게 지나가는 모든 것들이 긴 꼬리를 남겼다. 우습게. 천하게.

“대신에 너랑 같이 먹을 것도 잔뜩 사 왔어. 이게 진짜 맛있는 거거든! 가로수 길에 새로 파이 가게가 생겼는데 주력 메뉴는 레몬 크림 파이야. 이건 정말 내가 전생과 이생을 통틀어 먹어 보지 못했던 맛이라고.”

저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는 또 어떻고. 벨라루시아는 오필리어가 옆에서 조잘댈 때마다 왠지 끔찍한 기분에 몸서리가 났다.

“말, 하지 마.”

“말?

저게 진짜.

저 종알거리는 입부터 막아야 해.

급하고 서투른 손에 제 입을 틀어 막히고도, 또 휘둥그렇게 떠지는 눈. 헤벌쭉 웃는 미소. 뭘 알았다는 건지 대뜸 끄덕여지는 머리.

“……!”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맥락 없이 떠안겨지는 포옹.

정말 싫었다. 처음부터 한결같이. 정말, 정말 정말 싫어. 오필리어 레오라 따위.

그러니 참으로 기다릴 가치조차 없다. 멀리서 휘적휘적 걸어오는 꼬라지가 보일까, 대문 앞으로 나오기까지 한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내가 저 따위를 보려고 무슨 말까지 들었는지 알기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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