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클레멘츠는 나를 제 짐을 모두 빼낸 깊은 트렁크 속에 넣어 두었다. 숲속에서 그대로 입고 있던 긴 망토자락을 손으로 잘 잡고, 높은 트렁크 밖으로 살그머니 나왔다.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나는 현 위치에서 방문까지의 최단 경로를 노려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황태자에게 배정된 방은 충분히 넓어서, 트렁크의 위치도, 문까지 가는 길도 클레멘츠가 잠들어 있는 침대와는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껏 많은 작품을 통해 통계적으로 도출해 낸 바에 의하면 99.8%의 로판 남주는 잠귀가 아주 밝았으며, 특히 이런 식으로 누군가 그가 잠든 방에서 뭔가를 도모하는 경우에는 결정적인 순간에 깨어날 확률이 굉장히 높았다.
‘음…….’
나가다가 클레멘츠에게 들킬 경우 최대 사망이었다. 잠들기 전까지 애지중지하던 병아리가 나란 걸 믿어 줄 거란 기대는 접어야 했다. 벨라의 시녀라고 밝히면 오히려 일이 더 커질 수도 있었다.
‘그래, 역시!’
나는 지금까지 무언가 들킬 위기에서 무수히 지켜 주었던 주머니를 꺼냈다. 안에는 잘 말려서 빻은 하빌 뿌리가 들어 있었다.
남주의 코밑에 수면제를 들이댈 생각을 하다니. 정말…… 조연 주제에 죄송합니다!
혹여라도 기척을 감지하고 눈을 뜰까 봐, 숨조차 거의 멈춘 채로 한 발 한 발을 떼었다. 무슨 도둑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곁으로 가서 본 클레멘츠의 모습은 석고로 빚은 천사처럼 조금 슬퍼 보이고 아름다웠다.
저것은 벨라를 만나면 깨끗이 치유될 종류의 슬픔일까. 나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다. 한 사람과의 사랑이 인간의 모든 것일 수는 없지만, 로맨스 판타지에서는 다르잖아.
‘그러니 벨라를 사랑하는 것이 당신의 답이길 바라요.’
손에 꼭 쥐고 있었던 주머니를 쓰자, 설핏 인상을 쓰던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지워졌다. 온전한 평온 그 자체로 변한 모습이었다.
쿵쾅대며 뛰던 심장 박동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밤의 모나한 저택은 내 영역이나 다름없었다. 8년간 벨라를 빼돌려 오면서 각 시간대별로 어디에 누가 경비를 서는지도 빠짐없이 외웠다.
“벨라!”
망설임 없이 도착한 벨라의 방. 소리를 죽여 외쳤으나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어?”
벨라가 없었다. 지금쯤 흑표범으로 변해 멍하니 창밖 멀리 산속을 내다보고 있거나 잠을 청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방에 없다는 건 그 모습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는 뜻이다.
“어떻게?! 망 봐줄 사람도 없고…… 더군다나 황태자가 방문해서 외부인들이 가득한데. 세상에, 벨라!”
큰일이었다. 안 그래도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같은 벨라가 사라졌으니. 혹시라도 옷 방이나 욕실에 있나 허겁지겁 찾아보다가 황급히 바깥으로 나섰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한참 동안이나 벨라가 있을 만하거나 지나쳤을 만한 장소들을 휘젓고 다녔다. 하지만 그 모든 곳들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결국 나는 아무 소득도 없이 벨라의 방으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그나마 다행인 거라면, 벨라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는 거다. 만약 저택 사람에게 발각되었다면 작게라도 소동이 있었을 터.
벨라는 무사히 빠져나갔다. 하지만 어디로?
“하, 어쩌면 좋아……?”
벨라는 내가 숲에서 사라졌다는 걸 안다. 그러니 홀로 숲으로 나가 나를 찾고 있는지도. 그렇다면 완전히 길이 엇갈린 셈이다.
어떡하지?
여기서 아침까지 벨라를 기다릴까?
‘하지만…….’
날이 새면 나는 다시 말 못 하고 힘없는 병아리로 돌아갈 터였다. 그렇게 되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소설의 전개를 돌리고, 내 저주를 풀기 위하여.
결국 나는 벨라의 책상에 앉아 쪽지를 썼다.
[사랑하는 벨라, 나 오필리어야. 걱정시켜서 미안해. 사실,
사실…….]
뭐라고 할까? 숲속에서 무시무시한 마물 자매를 만나 너와 똑같이 저주를 받았다고? 황태자가 나를 붙잡고 못살게 구니까 제발 도와 달라고?
그랬다간 벨라가 얼마나 걱정하겠어. 게다가 클레멘츠가 날 잡고 있다고 말하면? 벨라가 그의 앞에서 나를 돌려 달라고 할 게 아닌가. 그랬다간 안 그래도 안 좋은 둘 사이 분위기가 더욱 파국으로 치달을 게 뻔했다.
그러니 이건 어떻게든 스스로 해결해야 해.
쪽지를 이어 적었다. 나는 잘 있다고. 당분간 사정이 있어 나타날 수 없지만, 곧 반드시 네 옆에 돌아가겠다고.
고민하다가 클레멘츠에 대한 것도 덧붙였다. 황태자와 네가 잘 어울릴 것 같으니 그와 가까워져 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이었다.
완성된 쪽지를 잘 보이는 곳에 놓은 후 걸음을 재촉했다.
어쨌거나 귀족 신분인 나는 사용인 중에서도 운신이 자유로운 편이었다. 백작가에서 숙식을 해결하기도 했지만 늦은 밤에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간 적도 8년간 여러 번 있었다.
무슨 말이냐면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대문 경비를 통과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오필리어! 대체 어디 있었던 거냐? 다들 너를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알아?”
“페로 아저씨도 저를 찾으셨나요? 죄송해요. 사실 아가씨 심부름은 한참 전에 끝냈는데, 시간이 남아서 저만 아는 장소에서 낮잠을 자 버린 거 있죠!”
“아이고야.”
“깨어나 보니까 사방에서 제 이름을 외치고 있지, 날은 어둡지. 부끄러워서 죽는 줄 알았네요. 아가씨도 화가 나셔서 집으로나 가 버리라고 하시던걸요. 헤헤.”
아가씨의 비밀 수호대 노릇만 8년을 해 오다 보니 그럴듯하게 둘러대는 기술만 늘었다. 아니나 다를까. 충실한 문지기인 페로 아저씨는 완전히 넘어가서 혀를 끌끌 찼다.
“쯧쯧쯔……. 얼마나 피곤했으면 어린애가 밝은 대낮에 낮잠을 그렇게 자냐? 얼른 집에 가서 좀 쉬어라. 밤길 조심하고.”
“넵. 수고가 많으십니다. 충성!”
비록 정식 기사가 되지는 못했지만, 페로 아저씨는 경비를 서고 남는 자투리 시간마다 검술을 연마하며 기사들의 용맹을 가슴에 새기곤 했다.
오른손을 말아 쥔 주먹으로 왼쪽 가슴을 내리치는 기사의 예를 취하고 돌아섰다. 페로 아저씨가 부끄러운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참나, 어휴, 녀석…….”
속여서 죄송합니다, 아저씨. 이걸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으음. 죄송해요…….
망토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고 향한 곳은 밤늦게까지 문을 여는 서점이었다.
나에게 걸린 저주는 마법으로 풀어야 했다. 문제는 이 깡시골 혼우드에서는 마법을 다루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거였다. 마법의 땅이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차선책으로 찾은 곳이 바로 이곳, 내 단골 서점이다.
“이야, 오필리어 아니야? 마침 잘 왔다. 요 며칠 안 보여서 섭섭하려던 참이었어.”
“안녕하세요, 시몽 씨.”
책 더미 속에 앉아 있던 젊은 남자가 쾌활한 인사를 건넸다.
로판 세계관인 것이 헛되진 않아서, 아마 아무런 비중도 없을 이런 상점 주인마저도 원래 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미남에 속했다.
물론 주인장 얼굴만 보고 서점 단골이 된 건 절대 아니다. 나에겐 원래 독서를 즐기는 취미가 있었다. 아무튼 아니다.
“요즘 바빴니? 수도의 소식통에 의하면 저번에 네가 문의했던 ‘황녀님은 꾀병쟁이야.’ 6권 탈고가 마무리 중이라더라. 곧 출간될 것 같은데, 들어오면 한 권 빼놔 줄까?”
“아, 당연하죠. 그러면 정말 감사하죠.”
시몽 씨는 이제 내 얼굴만 봐도 내 독서 이력과 작가 취향, 최근 읽는 책, 그에 기반하여 다음에 내가 관심을 둘 책의 목록까지 한 번에 뽑을 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이쪽도 알파고가 따로 없네.
……아니 잠깐. 원작 내용대로라면 며칠 내로 벨라와 클레멘츠가 황궁으로 돌아가고 나도 당연히 따라가게 될 텐데. 시몽 씨가 빼 준 이 책을 살 수 있게 될까? 늦을 것이다.
“……가 아니라, 오늘은 다른 책을 주문하러 왔어요.”
“음? 그 책을 안 산다고? 별일이네. 작가가 누굴 죽이기라도 했어?”
“그건 아니지만요.”
비유를 들어도 하필. 왠지 착잡해진다.
“어떤 책을 주문하실 건가요, 오필리어 아가씨.”
“저는 아가씨가 아니고 아가씨의 시녀라니까요.”
내 신분을 대략 알고 있는 시몽 씨는 가끔 이런 식으로 농담 삼아 나를 아가씨라고 부르곤 했다. 아마 내가 페로 경에게 기사의 예를 취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의 악의 없는 장난이리라.
“마법 책을 구해 주세요.”
“뭐? 마법?”
시몽 씨는…… 매일 오로지 라이트 노벨 코너를 들락거리며 시간을 죽이던 학생이 어느 날 비장한 눈빛으로 올림피아드 과학서를 계산하기라도 한 것처럼 반응했다. 뭐 사실이 비슷하긴 했다. 여기서까지 주로 로맨스 소설을 탐독하던 나였으니.
“네. 청마법 말고 적마법이나…… 흑마법 종류로요. 소환이나 저주와 관련된 내용이면 좋아요.”
마법이라고 다 같은 종류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청마법은 제국의 시작과 역사를 같이하며, 비교적 최근에 눈부시게 발전된 마법이었다. 청마법은 이성과 지식을 통해 마력을 다루는 법을 다루며, ‘학문’으로서의 성격이 가장 짙었다.
따라서 마법 대학과 마탑에서 주로 가르치는 것도 청마법이었고, 마법을 공부한다고 하면 보통 이쪽을 뜻했다. 아무래도 가장 번듯하고 장래성도 있었으므로.
적마법은 그와 달리 까마득하게 오래된 고대에서 기원했다. 그것은 계산이나 이성보단 직관과 비기, 혹은 신들림에 의존했다. 학자들보다는 샤먼이나 구도자, 고대 종교의 신관에게 어울리는 마법이었다.
흑마법은 적마법 계열 중에서도 마계와 관련된 존재를 다루는 술법을 일컬었다.
먼 옛날에는 적마법이 청마법과는 비교도 안 되도록 우세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무엇보다도 현 제국의 국교인 시미크 교단이 적마법 계열을 배척했다. 그에 샹그리아 가문 등 적마법을 다루던 대표 가문들도 거의 몰락한 상태였다.
자, 그러면 마계와 가까운 땅에서 마력 안개가 솟아오르고, 마물이 튀어나와 저주를 걸거나 이상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태어나기도 하며, 변방 중 변방이라서 마법 교육기관이 생길 이유가 없는 혼우드는 어떤 마법과 관계가 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