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기어이 클레멘츠의 손에 이끌려 그의 방에까지 들어오고 말았다.
클레멘츠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조심스럽게 보듬었다. 시름에 잠긴 눈은 그야말로 절경이었지만……. 지금은 제대로 살필 마음이 없었다.
탁. 내가 날개 끝으로 그의 손가락을 쳐내자 클레멘츠는 물었다.
“이봐, 병아리. 뭐가 문제지?”
“……비익.”
“왜 이러는 것이냐?”
방으로 오면서부터 나는 몸이 아팠다. 아무래도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았다. 이대로 벨라와 클레멘츠가 이어지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에.
벨라는 원작처럼 클레멘츠를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감을 느꼈을 테니, 지금쯤 그에게 더 화가 나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클레멘츠는 지금 날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벨라와의 인연을 회복할지를 걱정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벨라에게로 달려가도 모자랄 판에!
아니면, 가능한 멋진 모습으로 벨라와의 만남을 곱씹으면서 ‘흥미롭군…….’이라고 중얼거린다거나. 하다못해 수려한 미간을 찌푸리면서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정무를 확인한다거나…… 그래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지금……!
‘클레멘츠, 병아리 걱정하지 마.’
‘그게 뭐냐.’
‘병아리 걱정하지 말라고.’
‘그거 어떻게 하는 거냐.’
대화가 가능했다면 딱 이런 말이라도 오갔을 듯하다. 얘가 이런 애였나?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돌아누웠다. 욱, 속이 뒤집히는 것 같다.
“아픈가? 이겨 내라. 네가 내게 속한 것이라면, 강해야 한다.”
고작 병아리에게 강해질 것을 주문하다니, 클레멘츠 레스타 뒤싱겐다웠다.
“비잇.(나한테 신경 쓰지 말고 너 할 거 해라…….)”
혼란스러워 했을 벨라에게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해 줄 수 있었다면. 아니면 적어도, 거기에 낑겨 들어간 병아리만 아니었어도. 그 중요한 만찬이 그렇게 망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니, 그리고 대체 클레멘츠는 어떤 포인트에서 감히 벨라에게 화를 낸 거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이었다.
만일 이대로 둘이 접점 없이 멀어지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그때야말로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더 이상 달콤하고 환상적인 이야기가 아니게 된 세계에서 무슨 낙으로 살지?
“삐흐흐흑…….”
“……병아리.”
아놔, 얘 아직도 안 갔네.
하기사 ‘저리 가.’라고 생각하며 삐약거렸다고 순순히 가 줄 리는 없었다. 나는 힘겹게 책상에 걸터앉아 가만히 클레멘츠를 노려보았다.
“안색이 좋지 않군.”
그거야 그렇겠지. 너를 째려보고 있으니까.
……우욱.
아무튼 내 결심은 더욱 확고해졌다. 날이 어두워지면 가능한 빨리, 조용히 빠져나가자. 남주인공의 상태를 보니 이거 이대로 놔뒀다간 큰일 날 성싶었다.
아직 그가 백작저에 온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으니, 이제라도 내가 없어지면 그의 태도는 금세 정상으로 돌아오겠지. 원작대로, 벨라를 듬뿍 사랑해 줄 남주인공으로.
“전하, 카시스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생각을 마치고 있자니 듀프레 후작이 들어왔다. 그제야 클레멘츠는 잠시 내게서 신경을 떼어 내었다.
“보고하라.”
카시스 듀프레 후작은 충직한 황태자의 심복답게 차분히 보고했다.
“저택 안은 깨끗합니다. 충분한 경비가 번을 서고 있으며, 대충 살핀 결과 사용인들의 대우도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저택 바깥의 영지 관리는 수도로 올라온 내용과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토목이나 건축은 잘 모르겠으나, 징세에 있어서는 법망에 걸리지 않을 정도의 착복이 의심됩니다. 확실한 건 아직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합니다.”
하마터면 딸꾹질을 할 뻔했다. 듀프레 후작, 오늘 처음 온 거 아니었나? 짧은 사이 혼우드 지방에 대해 이렇게 잘 파악하다니. 황태자의 수족 자리는 아무나 차지하는 게 아니구나.
“모나한 백작은 어쩌고 있지?”
“매일 이 시간에는 서재에서 독서를 한다고 합니다.”
실시간 인물 정보까지! 알파고인가?
다만 듀프레 후작도 모르는 게 있었다. 백작님은 이 시간마다 그럴싸한 책을 펴 놓지만 읽지는 않는다.
아마 옆에서 시중드는 집사라든가… 집사에게 그날 있었던 마음에 안 드는 일을 토로하고 있을 것이다. 불쌍한 집사 할아버지. 아마 지금쯤 내 욕을 듣고 계시겠구나.
“서재 근처에서는 전하의 관심을 얻지 못한 백작 영애에 대한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두런두런 들린다곤 합니다만.”
소름이 돋았다. 카시스 듀프레, 그의 정보력은 어디까지인가!
게다가 모나한 백작이 나뿐만 아니라 벨라에게까지 좋지 못한 소리를 늘어놨다니. 화가 나서 속이 더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제가 뭔데……! 동생 팔아 장사하려는 오라비 주제에! 정 황태자의 총애가 필요하면 직접 드레스 입고 꼬시든가!
“허.”
클레멘츠의 반응은 가벼운 비웃음에 그쳤다.
“백작 영애는?”
“사람들을 풀어 시녀를 찾고 있다 합니다.”
“약초를 캐러 갔다는 시녀 말인가. 정말 아끼긴 하나 보군.”
앗! 벨라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것만으로도 조금쯤 기뻐졌다. 어쨌든 관심이 아예 없지는 않다는 뜻 아닌가? 게다가 날 찾고 있다는 말을 통해 어느 정도 벨라에 대해 좋은 인상까지 받은 모양이었다. 예스!
음…… 나를 찾고 있다고.
걱정시켜서 미안해. 빨리 돌아갈게, 벨라.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뭐가 말이지?”
“숲으로 갔다는 모나한 영애의 시녀 말입니다.”
듀프레 후작은 아마 클레멘츠가 벨라의 시녀를, 그러니까 나를 걱정하고 있다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원작에서도 후작은 이런 식으로 클레멘츠를 오해하고는 했다. 사실 그의 성격이 차가워, 일부 인물을 제외한 이들에겐 인정머리란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그에게 온정이 있다는 전제 하에 가정을 해 버리는 거다.
아마 그건 제 주군이 이상적인 군주의 재목이라는 종류의 콩깍지. 어찌 보면 일종의 충정일 것이다.
클레멘츠는 대답했다.
“그러면 좋겠지.”
숲으로 들어갔다가 밤이 깊도록 돌아오지 않는단 소녀를 두고, 돌아오면 좋겠지- 돌아오지 않는 것보다는 그게 낫겠지. 딱 그 정도의 객관적인 태도. 바로 그게 클레멘츠 레스타 뒤싱겐이 타인에 대하여 갖는 입장이었다.
그러니까, 나에 대해서.
새삼 실감되는 적확한 거리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내 계획대로라면 나는 딱 그 정도의 거리 안에서 클레멘츠의 순탄한 사랑과 무탈한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분명코 그 소녀와 이 병아리는 같은 존재이건만, 이 온도차는 대체 뭐란 말인가?
“그 병아리군요.”
카시스는 그제야 날 발견한 듯 관심을 보였다. 예리한 붉은 눈이 빛나더니 금세 심각해졌다.
“……어디 아픈 겁니까? 상태가 안 좋아 보입니다.”
“만찬에서 돌아온 뒤로 계속 이 상태다. 자세히 살펴보려고 했지만 내 손을 쳐내더군. 백작저의 의사라도 부를 참이었다.”
정말이지 과한 관심이었다. 클레멘츠는 방금 전 혼우드와 모나한 백작저에 대한 보고를 들을 때보다도 1.5배는 진지해 보였다. 부디 내 착각이었으면. 제발 내 착각이었으면.
심지어 카시스마저도 그에 못지않은 진지함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으음…….’
그래도 카시스는 내가 돌아올 거라고 걱정해 주기도 했으니까, 그의 손마저 매정하게 쳐내고 싶진 않았다. 그는 그저 주군에게 충성하는 것뿐이니까. 단지 열심히 일하고 있을 뿐이니까. 음음.
“……뭐지, 카시스.”
“예?”
“왜 병아리가 너의 손은 쳐내지 않는 거냐.”
…….
저게 ‘뷰티 앤 더 비스트’의 남주가 한 말이라고? 귀가 듣기를 거부하는군.
“흐음.”
다행히도 이번만큼은 카시스도 못 들은 것처럼 손바닥 위에 올린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체한 게 아닐까요?”
“병아리가 체하기도 하나?”
“아마 그럴 겁니다. 만찬장에서 내리 지켜보고 계셨잖습니까? 조그만 것이 제게 관심이 쏟아질 때는 불편한 듯 가만있다가, 분위기가 풀어지고 나서는 모이를 쪼아 먹었습니다. 똑똑한 새입니다.”
“당연하지 않나, 내 것이니.”
……황송하옵니다? 곧 당신 것은 아니게 되겠지만, 예…… 일단은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사이엔 거의 흡입하듯이 먹더군요. 흡사…… 걸신들린 20세 소녀 같았습니다.”
“삐힉!”
뭐란 말인가. 저 예리한 비유력. 가내에 건장한 20세 소녀라도 있단 말인가?
유능한 카시스는 소화제를 희석한 물에 설탕을 타 주었다. 그걸 먹고 나니 몸이 점점 편해졌다. 결국 나는 스트레스로 앓아누운 게 아니라 그냥…… 체한 거였다.
아니, 그럴 수도 있지!
누군들 배고픈 상태에서 갑자기 병아리가 되면 먹는 양을 조절하지 못할 법도 하잖아? 그렇지 않을까? 암만 최애 커플의 위기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젠장. 목구멍이 포도청이니까. 금강산도 식후경이니까. 먹다 죽은 귀신이 때깔도…….
음냐.
……좋다니까! 헉. 배 속이 편해지니 깜빡 잠들었나 보다.
카시스가 나가고, 편지 몇 장을 확인하고 짐을 정리하던 클레멘츠는 다행히 이내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그가 더 깊이 잠들 때까지 기다리다가 잠시 졸았었다. 분명 두 눈을 부릅뜨고 버티려고 했건만.
사위에 내려앉은 어둠이 이제 막 차분히 가라앉고 있었다. 창공의 마지막 빛이 꺼지는 것과 동시에, 훅- 하는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내 몸은 두둥실 떠올랐다.
하얀빛이 은은하게 주변을 두르고 있는 가운데, 다시 내게만 들릴 만큼 작은 파열음이 들렸다. 다음 순간 나는 인간 여자의 모습으로 사뿐히 안에 내려섰다. 주변을 감싸는 게 검은 구름이 아닌 흰 빛 무리란 것만 빼면, 벨라가 변신하는 과정과 같았다.
‘돌아왔어!’
아직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내 손가락, 시야에 비치는 금빛 머리칼! 인간의 몸을 가진다는 게 이렇게 감동적인 일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