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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6)화 (6/218)

6화

젠장.

지금만큼 내 존재 그 자체에 대해 회의감이 든 적이 있었던가?

이 자리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다.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서, 딱 내가 있는 자리만 땅속으로 쑥 꺼져 버리면 그만큼 기쁜 일이 없겠다.

“하하, 전하께선 그 새를 참으로 아끼시는군요.”

모나한 백작은 당장이라도 눈빛으로 나를 구워 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클레멘츠.

“사랑스럽지 않은가?”

사람 속을 모르고 반문까지 해 버렸다.

거기에 동의해야만 하는 모나한 백작도 꽤 속상할 것이다. 내겐 갑중의 갑인 고용주님도 황태자 앞에선 미천한 을에 불과했다. 그는 이제 거의 이를 악물며 대답하고 있었다.

“그렇군요. 정말……. 저렇게, 귀여운 병아리는, 처음 봅니다, 전하…….”

“아무리 어여뻐도 내 병아리를 그리 열렬히 쳐다보진 말게나. 작은 몸으로 놀라서 체하기라도 하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는가.”

포크를 쥔 모나한 백작의 손마디가 새하얘지고 있었다. 아마도 그 포크로 나를 찔러 꼬치로 만들고 싶단 뜻이겠지.

백작가 지하에 있다는 고문실. 사악한 표정으로 내 몸에 포크를 하나씩, 하나씩 꽂아 넣는 백작의 모습이 떠올랐다. ……젠장, 8년의 시간 동안 이 집 따님을 뻔질나게 숲으로 빼돌렸어도 들통나지 않았는데, 고작 하루 병아리가 된 죄로 고문당하게 생긴 건가?

하지만 백작님, 저 역시 황태자 전하께서 저 따위에게서 신경 끄시고 백작님의 동생을 바라봤으면 좋겠어요. 장담컨대 당신보다도 제가 더 간절하게 원하고 있답니다. 님보다도 제가 더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라고요. 제가!

하지만 제발 옆을 좀 보라는 뜻을 담아 고갯짓을 해 봐도, 클레멘츠는 가만 나를 바라보다가 그림 같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저 미소가 벨라의 것이었어야 하는데!

벨라가 입은 검은색과 짙은 붉은색으로 이루어진 드레스는 신비로운 푸른 눈을 강조해 주었다. 소설에 나오는 그대로의 차림새였다.

다행히 그녀만큼은 클레멘츠를 보고 있었다. 벨라가 입을 열었다.

“이 병아리는 제가 데리고 있는 시녀 아이를 닮았군요.”

“삐힉!”

이럴 수가, 병아리도 재채기를 하는구나! 콧바람 때문에 모이 조각 몇 개가 밀려났다. 클레멘츠는 손가락으로 내 등을 톡톡 두드렸다.

설마 나의 벨라가 뭔가 알아채 준 걸까? 이 곤란함을, 내 답답함을 알까? 발을 동동 굴렀지만, 늘 그렇듯 벨라의 무심한 벽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가?”

하지만 그 말에 클레멘츠가 처음으로 벨라에게 의미 있는 시선을 주었다. 여태까진 그가 오로지 나에게밖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벨라는 기가 막히게 예쁜 배경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됐다. 저 토파즈를 연상시키는 벽안과 자수정 빛 눈이 마주쳤으니까. 벨라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클레멘츠의 인연. 게다가 무척 아름답기까지 하니, 저 눈 맞춤 뒤의 나머지는 일사천리일 터였다.

첫 스텝이 좀 꼬인 게 뭐가 중요한가? 펼쳐질 꽃길이 구만리인데.

훗날엔 이 황당한 해프닝 자체가 즐거운 농담거리가 되겠지. 오히려 나에 대해 대화를 나누며 친해지기 시작했다면 엑스트라로서 영광일지도.

“예. 꼭 이 병아리처럼 작고 귀엽지요. 밝은 금발을 가졌고, 눈 색도 황금 같습니다. 이름은 오필리어라고 해요.”

벨라, 나에 대해 그렇게 좋게 말해 주다니…!

“그렇군.”

“오전에 간단한 심부름을 보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심부름?”

“네. 숲으로…… 약초를 구해 오게 시켰지요.”

안개의 숲이니 하빌의 뿌리니 하는 이야기는 쏙 빠진, 평범해 보이는 말이었다. 잘했어, 벨라! 잘한다!

“약초라. 웬만한 약초는 백작가의 창고에 보유하고 있을 법한데, 그대의 시녀를 직접 보내다니.”

“그 아이는 저의 일을 꼭 자기 일처럼 도맡으니까요. 손수 해야만 안심되는 것들이 있죠.”

“그대는 약초에 조예가 깊은 모양이군.”

됐어, 됐다! 드디어 제대로 된 대화가 되고 있군!

흘끗 보니 모나한 백작도 대충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벨라를 제 권력욕을 성취할 도구로 생각하며 부담감만 주는 저 인간에게 좋은 감정 따윈 없었지만, 지금만큼은 공동의 목표가 달성된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건너편의 카시스 듀프레 후작은 돌아가는 상황을 관망하며 식사를 계속했다. 아마 이 자리에서 그만이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있을 것이다.

후작이 접시를 가리키며 음식을 더 청하자, 기분이 좋아진 모나한 백작이 와인 잔을 집어 들며 가벼운 잡담을 던졌다. 이내 시종이 요리를 더 가져와 듀프레 후작 앞에 대령했다.

나도 이제 편히 식사를 할 마음이 들었다. 클레멘츠가 놓아 줬던 물을 대여섯 번 쪼고는 다시 모이 접시에 고개를 박았다.

……우아한 자리에서 이러고 있기 부끄럽구만. 냠냠. 하지만 병아리가 되고 보니 조그마한 부리로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양이 턱없이 적었다. 양을 채우기 위해 먹는 속도는 자연히 빨라질 수밖에. 냠.

다시는 엉뚱한 자리에 끼어드는 이런 일이 없길…….

“꽤 어두워졌군. 그대의 시녀가 곧 돌아오길 바라네.”

그게, 사실 이미 돌아와 있는데.

“아마 무사할 겁니다. 진작 심부름을 끝내고 어디 과자 가게나 서점을 들르느라 정신을 팔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삐휵!”

하마터면 좁쌀이 목에 걸릴 뻔했다.

어딜 심부름을 가면 겸사겸사 과자를 사러 가기도 했고, 최신 소설을 구해 보며 좀 노닥거릴 때도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게…… 그게 남주에게까지 다이렉트로 까발려질 줄이야. 이게 바로 여주인공의 시녀라는 건가?!

한편으론 기뻤다. 이런 사소한 대화를 곧잘 하다니. 소설 속과 비슷한 전개지만 더 풍부해진 대화에 즐거워졌다. 이대로라면 더 빨리 친해질 것 같은데? 호호!

병아리치고 해괴한 소리를 낸 나에게 양쪽에서 시선이 와 닿았다. 푸른 눈을 빛내던 벨라가 말했다.

“하지만 걱정이 영 안 되는 것도 아니랍니다. 황태자 전하, 시녀가 돌아올 때까지만 이 병아리를 제게 주시겠어요?”

!!

이거다!

나는 기쁘게 삐약거렸다. 클레멘츠가 나를 벨라에게 주기만 하면 많은 문제가 해결되었다.

클레멘츠는 호의를 보였으니 벨라에게 점수를 딸 기회요, 나는 모습이 변하기 전에 클레멘츠로부터 도망쳐 나올 걱정이 사라진다. 벨라는 자연스럽게 심부름 갔던 시녀를 찾게 될 것이다. 그녀는 흑표범, 나는 인간 모습으로 마주해야 할 테지만.

말하자면 오고 가는 병아리 속에 싹트는 사랑! 의도하고 꺼낸 제안은 아닐지라도 우리 벨라는 정말 똑똑했다.

‘전하, 일전에 병아리를 보내 주신 덕분에 마음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시녀 아이도 돌아왔어요.’

‘그깟 새로 그대의 마음을 달랠 수 있다면, 주도록 하지. 몇 마리든, 어떤 종류든.’

‘그런…… 과장된 말씀 마세요. 한갓 시골 여자에게 과분합니다.’

퉁명스럽게 대답하지만, 저 변경 바위산의 암석처럼 차고 단단하던 벨라의 마음에는 분명 균열이 생길 터!

들여다보면 그 안에선 끈덕지고 단내 나는 낯선 것들이 배어 나와, 벨라는 당황하여 새로운 감각들을 밀어내겠지.

하지만 마침내는 바윗돌인 줄만 알았던 자신의 마음이 그에 의해 녹고 부서지면 달콤한 향기를 내어 놓는 사탕 같기도 하다는 걸 깨달으리라.

우후후후……. 후후후후후!

이쪽의 이야기에 큰 관심을 갖고 있던 모나한 백작 역시 기쁜 눈치였다. 그는 입꼬리가 떨리도록 과장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뭔가 크게 동의하거나 주장하고자 할 때 저 고용주님이 흔히 짓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입은 곧바로 닫혀 버렸다.

“……모나한 영애.”

순식간에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듀프레 후작은 물론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도 싸늘함에 몸을 굳혔다.

갑자기 뭐지?

희망찬 미래의 망상에 젖어 있던 나 역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주제넘군.”

뭐라고?

이게 정말, 클레멘츠가 벨라에게 하는 말이 맞나? 그 클레멘츠 레스타 뒤싱겐이, 세상에서 벨라루시아를 가장 사랑하게 될 사람이?

납득이 안 된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아, 하고 짧은 탄성을 내뱉은 벨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그, 저, 어, 뭐, 제 여동생이 전하께 뭐 실례되는 말이라도 하였습니까?”

백작이 허둥지둥 끼어들었지만 클레멘츠는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혹은 물건일지라도 내게 속한 것은 최대한 존중하는 게 좋다. 내가 누구인지 그대가 알고 있다면.”

“……전하께선 이 나라의 유일한 황태자이십니다.”

무슨 소리지? 이게 병아리 좀 데리고 있겠다고 해서 들을 말인가? 심지어 이번엔 벨라가 클레멘츠를 올려다보는 눈빛마저 조금쯤 날카로워 보였다.

파직. 보석이 맞부딪칠 때 생기는 불꽃처럼, 시선이 충돌하며 내는 적대감에 내 마음이 다 갈가리 찢기는 것 같았다.

뭔데!!

얘들아, 제발! 사랑을 하자. 부탁이야!

엉망이 된 분위기 속에서, 식사는 흐지부지하게 끝날 기미가 보였다. 모두가 눈치를 보는 가운데.

“먼저 일어나도록 하지.”

하얗고 커다란 손이 내 앞에 내밀어졌다. 이 와중에 나를 직접 챙기려는 모양이었다. 올려다본 보라색 눈동자는 얕은 불쾌감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난 가능한 침착하게, 이건 아니라는 의사를 표현하려 애썼다. 이런저런 날갯짓 발짓도 해 보며, 고개를 저어도 보았다. 평범한 병아리의 행동으론 부자연스러워 보일지라도. 어떻게든 이 일생일대의 로맨스를 사수해야만 하니까.

아니, 얘야. 뭔진 모르겠지만 이렇게 가면 어떡해? 소설 내용이 완전히 틀어지잖아.

벨라가 잘못했어도 한 번만 봐줘. 너와 운명의 짝인 여자라고! 좀만 더 관심을 가지면 금방 반하게 될 거야. 그렇게 정해졌으니까.

지금 이렇게 가면, 고작 병아리 한 마리 때문에 그녀에게 심하게 대한 걸 후회하게 될걸?

당연하게도 입 밖에 나오는 소리는 다음과 같았다.

“삐약. 삐약. 삐약. 삐약? 삐약. 삐-!”

아악! 미쳐 버리겠네!! 으아아아!

또 당연하지만 클레멘츠가 내 말을 알아들을 리는 없었다.

“더 먹고 싶으냐? 방으로 돌아가서 얼마든지 더 주지.”

그는 나를 강제로, 하지만 조심스레 들어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의 첫 만남이 무르익으며 설렘과 여운을 남겼어야 할 만찬장이 지독한 침묵에 잠겼다.

망했다. 이건 진짜 완전히 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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