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그런데…… 그런데 뭔가 조금 석연찮았다. 방금 전 그 장면은 기억과 같았나?
분명 대사는 틀림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이 찝찝함의 정체는 뭐지? 고민하느라 숨 쉬는 것도 거의 잊었다. 걱정이 된 클레멘츠가 옷 위로 나를 톡톡 건드려 볼 정도였다.
벨라는 클레멘츠를 보자마자 머리를 흔드는 충격에 말을 잊는다. 그래서 첫 마디는 조금 늦게 떨어진다.
“……혹, 황태자 전하십니까.”
또한 그녀가 처음 보는 클레멘츠에 대해 느끼는 기분 역시 좋지는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적개심. 공포감. 누가 봐도 매력적인 남자라는 사실이 주는 위화감은 그녀의 불쾌감을 더욱 날 서게 했을 것이다.
그러니 벨라의 말투가 차가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클레멘츠 쪽은?
이 장면에서 클레멘츠가 이렇게 건조하게 말했던가?
물론 소설 속의 묘사도 처음부터 마냥 달달하고 따스하지만은 않았다. 그렇지만! 그래도 뭔가, 변치 않는 운명적 사랑을 암시하는 그런……! 뭔가가! 더 느껴져야만 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클레멘츠가 이렇게 빨리 자리를 떴던가? 이대로 얼마간은 멀어지는 벨라의 뒷모습을 바라봤다는 내용이 한 줄 있었던 것 같은데.
“시장하군요.”
“저택에 도착하면 곧 만찬이 준비될 거다.”
별거 아니겠지. 지금 와서는 둘의 마음속을 읽어 볼 수도 없으니. 아마 괜한 불안일 것이다. 어쩌면 주머니 속에 들어앉아 말소리만 듣는 걸론 전해지지 않는 뭔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뜻밖에 둘의 첫 만남 자리에 있게 된 것만으로도 횡재한 거잖아? 이 둘은 운명이 틀림없으니 어떻게든 이어지게 될 터.
우선은 당장 내 앞가림을 어떻게 할지나 신경 써야겠다.
* * *
아, 미치겠다.
암만 병아리가 됐어도 눈치는 있었다. 나는 지금 망했다.
수십 개의 촛불이 근사하게 밝혀진 이곳은 모나한 저택의 홀. 오직 가문의 일원과 귀빈만이 여기서 식사할 수 있었다.
이 식사에 초대받은 ‘사람’은 넷뿐이었다. 클레멘츠, 듀프레 후작, 벨라, 그리고 모나한 백작.
평상시 시녀인 내 자리는 귀빈석의 저 뒤. 언제든 주인의 시중을 들 수 있으면서 윗사람들의 대화에 방해가 되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황태자의 옆에서 독상을 받았다. 만찬 테이블과 마찬가지로 흰 식탁보를 깐 조그만 테이블 위, 호사스러운 은그릇 위에 낟알이 쌓여 있다. 의자 대신 놓여 있는 따끈하게 데워진 돌들이 체온 변화에 민감한 병아리인 내 몸을 따스하게 데워 준다.
뜨겁다 못해 온몸이 불탈 것 같다. 아늑하게 쌓인 돌덩이 때문이 아니다. 시선 때문이다.
이 시선은 상석에 앉은 요란스럽게 차려입은 남자에게서 왔다. 이 저택의 주인, 나의 고용주이자 벨라의 오라비. 즉 내게는 갑 중의 갑인 모나한 백작이 나를 향해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내왔다.
왜 이글거리는고 하면 당연히 분노 때문이다.
클라티아 제국의 황태자는 제위에 오르기 전에 한 번씩 변경을 시찰하도록 되어 있다. 서쪽 변경의 주인으로서 그를 대접하게 된 백작이 그렸을 그림이야 뻔했다. 예쁜 여동생을 소개해 황태자의 눈에 들게 할 생각인 거다. 실제로 멋지게 성공할 계획이기도 했다.
권력욕에만 가득 차서, 동생이 제대로 자랐는지엔 관심도 없었던 결과로 그 모든 것이 망쳐지긴 하지만 말이다.
‘동생한테 잘 좀 하세요, 이 아저씨야.’
어쨌든 갑자기 끼어들어서 황태자의 관심을 쏙쏙 빼먹는 병아리 따위, 그의 머릿속 그림에 있었을 리가 만무했다.
“어째서 먹지 않는 거지?”
백작이 날 눈빛으로 지져 죽일 셈이든 어떻든, 고귀하신 황태자 전하께서는 더없이 다정하고 부드러운 눈빛을 보내고 계셨다. 내 건너편에 있는 벨라가 아니라, 애석하게도 나를 향해서.
젠장, 젠장! 젠장! 나도 이런 데 끼고 싶지 않았단 말이야!
내가 이깟 새 모이를 쪼든 말든 제발 상관하지 말아 줘. 지금이라도 이 병아리 테이블을 치우고 옆에 앉은 벨라를 보란 말이야!
“맞는 모이가 아닌 건가. 혹시 백작저에 저장해 둔 다른 곡식이 있나.”
“아, 하하하……. 물론, 물론 있습니다, 전하…….”
하…….
이렇게 된 이상 먹어야 한다. 어쨌든 이걸 부리 안에 욱여넣을 때까지 클레멘츠는 모이를 다른 것으로 가져오게 하며 내게 신경을 곤두세울 터였다.
콕.
‘……!’
눈물을 머금고 쪼아 먹은 곡식은 맛있었다. 시장이 반찬이라 하던가? 너무 맛있어서 문제였다.
하루 종일 숲을 헤매며 굶었다는 사실이 새삼 머릿속에 들어왔다. 혼우드산 햇귀리가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급하게 먹지 말고 물도 좀 마셔라.”
정신 차려 보니 클레멘츠는 다정한 손길로 제 핑거볼을 집어다 내 옆에 올려 주고 있었다. 아악! 망했다. 또 관심을 받아 버렸어!
또 한 번, 모나한 백작님의 타는 듯한 눈빛이 밀려든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벨라와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행원들을 데리고 부랴부랴 맞으러 나온 백작이 번지르르한 인사를 건넸다.
“황태자 전하!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다니. 미천한 제 생에 다시없을 영광이옵니다. 황도에서부터 이 변방까지 먼 길이 얼마나 험난하셨습니까? 부디 전하께 안식처와 만찬을 제공해 드릴 기쁨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때만 해도 난 희망에 젖어 있었다. 비록 몸은 이렇게 변해 버렸지만 곧 운명의 짝들이 만나고 사랑이 시작될 테니까. 내 두 번째 삶을 바쳐 온 일이 결실을 맺을 거니까.
클레멘츠가 이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만찬 자리의 내 몫 옆에는 따로 병아리의 모이를 준비해 줬으면 좋겠군.”
“예? 병아리요?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놀라 말을 더듬는 백작 앞. 클레멘츠는 주머니에서 나를 꺼내 보이며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오던 길에 주웠다. 황족의 권속에 걸맞도록 기를 것이니, 미물이라 여겨 소홀히 대접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뭐? 이게 무슨 소리야?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나를 키운다, 어쩐다 하는 게 어쩌면 단지 일시적인 흥미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그런 불안함.
황태자 앞에서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백작의 얼굴이 볼만했다. 나도 나지만, 모나한 백작도 이날을 얼마나 준비하고 기대했던가. 당연히 이런 예기치 못한 상황이 끼어드는 건 싫을 것이다.
거절해, 어서 거절해!
“전하! 물론 모나한은 비록 미물이라 하여도 전하께서 아끼시는 것을 성심껏 보살필 것입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저희에게 맡기시지요. 만찬 시간만큼은 모든 의무를 잊고 편히 즐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잘한다! 나는 거기 있을 이유가 없어!
예정에 없던 첫 만남 장면에 함께 있었던 걸로 족했다. 벨라와 클레멘츠에게 집중되어야 할 현장에 그 어떤 방해 요소도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클레멘츠는 확고했다.
“이렇게 작고 여린 짐승은 줄곧 지켜보지 않으면 안 돼. 혹여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병아리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관련된 자들의 허물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군.”
“그, 어……. 그렇지만 전하.”
백작은 우물쭈물했다. 황태자가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거절할 명분은 누구에게도 없었다.
그때 가만히 있던 듀프레 후작이 나섰다.
“만찬 자리까지 데리고 가시는 것이 도리어 병아리에게 괴로운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모나한 백작의 표정이 밝아졌다.
“차라리 식사하시는 동안 제가 안전하게 데리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모나한 백작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렇다. 황태자를 모신 만찬도 물론 기대되지만, 제국 3대 세력 가문 중 하나인 듀프레 후작가의 가주와 함께하는 저녁 식사 역시 백작은 놓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거물을 고작 하찮은 병아리 때문에 놓아 보내야 하다니. 그때부터 백작이 나를 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저어…….”
주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자, 얌전히 있던 시종이 나섰다. 알핀. 백작령의 농촌 출신 소년이었다.
“저희 집이 농가라서 병아리를 많이 키워 봤습니다. 병아리는 체온을 유지해 주는 게 중요합니다. 따뜻한 돌을 이용해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면 만찬장에서도 전하의 병아리가…… 아니, 병아리님이 편히 식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지금 나한테까지 존댓말 한 건가? 황족의 병아리란 이유로 인간에게 동물이 존대를 받은 것인가? 병아리 팔자가 상팔자?
어쨌든 알핀의 말에 모두가 만족했다. 농민 출신의 시종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홀에서는 작은 원목 테이블 위에 테이블보가 깔렸다. 그 위에 병아리 한 마리분의 식사가 준비되었다.
군불에 데워서 알맞게 식힌 돌들은 모양도 둥그렇고 보기 좋은 것으로 고른 것이었다.
병아리의 만찬 자리를 준비한다니. 정말 괴상한 짓이었지만, 수도 사람을 보는 일이 일 년 중에도 손에 꼽는 혼우드 사람들이었다.
그런 수도 사람 중에서도 귀하디 귀한 황태자를 맞는다는 생각에 이게 이상한지 아닌지의 감각마저 없어진 모양이었다.
“한낱 동물도 이렇게 귀하게 대하시다니…….”
“역시, 황태자 전하께서는 뭔가 다르시구나!”
하긴, 그들에게 클레멘츠는 인간이라기보단 차라리 유니콘에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
병아리 한 마리가 몸을 웅크릴 만한 공간을 감싸도록 따뜻한 돌이 모양 좋게 쌓였다. 거기다 알핀은 좀 더 힘을 내서 나뭇가지와 잎사귀로 장식까지 더했다.
그 결과가 이랬다. 식사가 시작되고 이미 한참 지났지만 아직도 내가 홀 안의 관심이란 관심을 죄다 끌어당기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클레멘츠는 벌써 옆자리의 벨라와 말을 주고받고, 그보다 많은 눈빛이 오갔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껏 그가 벨라에게 건넨 것은 형식적인 안부 인사가 다였다.
통탄스럽게도 내 자리마저 그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 있었다. 저택의 주인인 백작이 상석에 앉고, 귀빈인 황태자와 듀프레 후작이 각각 맞은편으로 옆자리에. 그리고 당연하게도 벨라는 클레멘츠의 옆이었다.
문제는 내 위치였다. 클레멘츠의 애완동물이니 클레멘츠의 옆에 있어야 하는데, 애완동물 주제에 주인보다 높은 위치에 있을 수는 없으니. 결국엔 클레멘츠와 벨라 사이에 끼어들어 가 버리고 만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