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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4)화 (4/218)

4화

‘설마……! 설마 설마!’

“……이 숲의 이름인 ‘안개’는 마력을 품은 안개입니다. 마계로의 통로에도 안개가 자욱하다더군요.”

“어느 정도 거리지?”

“기록별로 상이합니다…….”

세상에, 클레멘츠다! 저 은발과 보라색 눈. 백마의 마구에 찍혀 있는, 날개 달린 다이아몬드 형태인 클라티아 제국의 문장. 틀림없었다. 옆에 있는 사람은 그의 심복인 카시스 듀프레 후작이었다.

벨라가 스무 살이 되는 해에 클레멘츠는 서쪽의 혼우드로 시찰을 온다. 어쩐지 저택이 손님맞이로 유독 분주하더라니. 그렇구나, 그게 오늘이구나. 하필이면 오늘이구나. 제길!

오늘을 위해 8년을 기다렸다. 이렇게 감동적인 순간에 하필 내가…… 병아리라니. 순식간에 모든 게 엉망이 돼 버렸다. 통곡을 해도 모자랄 기분이다.

그때 클레멘츠가 이쪽을 돌아봤다. 기척을 알아챘나? 나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했다.

“전하, 어디 가십니까?”

“잠깐 볼일 좀 보고 오지.”

“아, 네.”

그러고는 정확히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니, 여기서? 여기서요? 잠깐! 잠깐!

아무리 소설 속의 남주인공을 실제로 구경하고 싶었다지만, 그런(?), 그걸(?) 굳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진 않았다. 클레멘츠, 나는 너를 알지만 우리는 지금 처음 만났는걸. 흑흑.

병아리의 귀를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 모른다는 점을 한탄했다. 두 날개를 펴서 머리 전체를 꼭 감싸느라 안간힘을 썼다.

묵직한 발소리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하지만 우려하던 생리적 배출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아주 가까이에서, 그의 숨소리가 들렸다. 서서히 날개를 풀고 위쪽을 보자 클레멘츠가 나를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은 이렇게 아래에서 쳐다보면 어느 정도 못생겨 보이게 마련이다. 그런데 클레멘츠는 굴욕의 각도라는 게 없었다. 더군다나 병아리 입장에서 훨씬 큰 인간을 보고 있음에도 하얗고 매끄러운 얼굴엔 잡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우왕.’

나는 여주인공 벨라의 시녀로서 클레멘츠를 멀찍이서 지켜볼 생각이었지, 이렇게 터무니없는 고화질로 오래 감상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자수정 못지않은 보라색 눈이 깊어졌다. 그는 촉촉해 보이는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고 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다음 순간 나는 그의 손바닥 위에 올라가 있었다.

“삐, 삐…….”

클레멘츠가 몸을 일으키자 시야가 순식간에 아주 높아졌다. 하지만 그가 손을 모아 나를 조심스레 감싸고 있었으므로 무섭진 않았다. 클레멘츠가 다시 한번 나를 살피고 중얼거렸다.

“……뭐야, 이 귀여운 건.”

내가 귀엽다고?

그는 나를 가지고(!) 카시스가 기다리고 있는 샘 가로 갔다.

“카시스, 이것 좀 보지.”

나는 대 클라티아 제국 황태자의 손바닥 위에서, 3대 세력가 중 하나인 듀프레 가문의 젊은 가주이자 황태자 파의 대표를 묵례 따위 하나 없이 오만하게 응시했다.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깎은 듯 섬세하게 잘생긴 클레멘츠에 비하면 조금 차가운 인상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나를 한참 쳐다보다 말했다.

“뭡니까, 이 귀여운 건.”

“주웠어. 내 병아리다.”

‘내’ 병아리?

클레멘츠는 마치 오늘이 며칠인지 얘기하듯 당연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키울 생각이다.”

나는 놀라서 주저앉았다. 그러니까, 클레멘츠의 손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철퍼덕 주저앉았단 뜻이다. 그는 그런 내가 더 귀여운지 손가락으로 두어 번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것 봐라. 귀엽지 않으냐.”

“물론 귀엽긴 합니다만……. 어미가 찾지 않을까요?”

“상관없다. 내가 더 잘 키울 거니까.”

뭐 이런…….

이제 내 삶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남주인공의 아기 새가 되어도……. 음, 이렇게 말하니 꼭 애칭 같군. 하지만 말 그대로 지금 나는 아기 새였다.

빙의한 지 8년이 흘렀다. 그 세월 동안 벨라에게 좀 더 세상에 대한 신뢰와 사람 사이의 유대감을 심어 주려고 노력했다. 이제 벨라의 속마음을 읽을 수 없으니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다 한 것이다.

남주의 애완동물이 되어도 아마 여주인공과 연애하는 모습은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둘의 관계를 더 가깝게 해 줄 수도 있겠지.

예를 들면 이렇게.

‘특별히 구경시켜 주지. 내 애완 새인 오필리어다.’

‘제 시녀의 이름과 같아요. ……귀엽네요. 조금은.’

‘그대만큼 귀엽진 않아.’

‘……흥, 그런 말도 안 되는.’

벨라라면 분명 저렇게 말하면서 속으로는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클레멘츠와의 로맨스를 위해서는 지금부터가 중요한데!

황궁으로 가면 그 무서운 악녀 카밀 드 베일리스에 같이 맞서야 한다. 오직 미래에서 온(?) 나만이 그녀의 계략을 알고 있는데.

또 벨라가 대마녀의 기억을 떠올리고 혼란스러워하게 되면 내가 반드시 그녀의 옆에 있어야 했다. 과거와 현재는 다르다고, 너는 너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고- 이미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해 주었지만 적절한 때에 다시 이야기하며 달래 주어야 하는데.

더군다나 우리 집 레오라 가문은 거의 몰락했다. 낮에 병아리가 되는 몸으론 당연히 일을 할 수 없을 테고, 시녀 일로 백작가에서 받는 봉급을 제하면 안 그래도 기울던 가세가 더 급격하게 기울 것이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다.

황태자의 애완동물이 되면 황금 새장 속에서 신선한 알곡을 대가 없이 먹고 살겠지만……. 아마도 밤에는 인간으로 돌아갈 텐데? 벨라 이외의 사람들에겐 한없이 차갑고 의심이 많은 클레멘츠였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나를 가만히 놔둘 리 없다.

역시…… 클레멘츠가 나를 키우게 놔둬서는 절대 안 된다. 어차피 이 관심은 높으신 분께서 처음 보는 미물에게 가볍게 던지는 일시적인 호기심일 터.

그나마 이들은 모나한 백작저로 나를 데려다줄 터이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저택에 도착하면, 밤이 되기 전에 클레멘츠의 옆에서 빠져나와야겠다. 그리고 어떻게든 이 저주를 풀어야겠지.

내가 진지한 고민을 마칠 동안, 두 사람도 나를 데려가는 쪽으로 합의를 마쳤다.

“그렇다면 이리 주십시오. 이동 장 대신 작은 가방에 넣겠습니다.”

“아니, 내가 계속 데리고 있지.”

클레멘츠는 이쪽으로 손을 뻗는 카시스를 휙 피했다.

“잠시 이 안에 있거라.”

나는 그의 셔츠 앞주머니에 쏙 넣어졌다. 부드럽게 오르내리는 그의 가슴과 체온이 한 겹의 흰 천을 사이에 두고 느껴졌다.

“……!”

아니, 너무 가깝지 않나? 이건 좀. 당신, 이제 곧 임자 있는 남자가 되실 텐데!

보송보송한 솜털로 뒤덮인 얼굴에 피가 몰리는 것 같았다. 소름 돋는 느낌에 파닥거렸더니 그가 피식 웃었다.

“조금만 참아라.”

음, 그렇지.

그에게 지금 나는 외간 여자가 아니다. 그저 키우고 싶은 새끼 새를 직접 운반하려는 것뿐이다. 반려동물에게 책임감을 갖고 싶은 거겠지. 이 행동을 의식한다고 하면 그는 얼마나 황당할 것인가.

클레멘츠는 능숙하게 말에 올랐다. 이내 말발굽 소리가 울리며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삑……!”

친절하게도 그는 망토 자락을 들어 내가 있는 쪽을 덮었다. 바람이 차단되자 주머니에 갇힌 몸은 셔츠로 전해지는 체온에 슬그머니 데워졌다. 힘든 일을 겪은 뒤라 잠이 쏟아졌다.

이렇게 자면 안 되는데. 생각해야 할 것들이 한 더미인데…….

그러나 어차피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나는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깨어났을 때는 말의 속력이 꽤 줄어 있었다.

“모나한 저택이군요.”

카시스의 목소리였다.

“제국의 끝에 있을지언정 전경만큼은 장관입니다.”

날개 끝을 움직여 눈을 비볐다. 양 날개를 펴 주머니 끝에 살짝 걸고 몸을 쭉 뻗으니 바깥 풍경을 볼 수 있었다. 클레멘츠의 가벼운 웃음이 머리 위에서 흩어졌다. 간지러운가 보다.

그 웃음소리에 카시스 듀프레 후작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이었지만 그의 표정에 당황이 떠올랐다.

왜 저러지. 주머니에 병아리 꽂은 사람 처음 보나?

처음 보겠지. 그렇군.

듀프레 후작은 충직한 심복답게 곧 동공의 흔들림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돌렸다.

두려울 만큼 무성하던 숲에선 이미 빠져나왔다. 멀고 가까운 장소에 도로와 건물들, 관리된 녹지가 보였다. 앞에 보이는 건 내 집보다 익숙한 모나한 백작 저택. 빙의한 뒤로 매일 일해 온 곳이었다.

“……!”

동시에 나는 깨달았다.

원작에서, 혼우드의 모나한 백작저로 찾아온 클레멘츠를 처음으로 마주하는 사람은 바로 벨라였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역사적인 첫 만남이 곧 펼쳐질 것이다.

‘벨라!’

과연. 저 앞에 서성거리고 있는 벨라가 보였다. 흰색과 남색으로 편하게 지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멀리서 대충 봐도 우아했다. 클레멘츠가 탄 말이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나는 쿵쾅대는 심장을 안고 다시 주머니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소설 속에서 이 첫 만남이, 마주치는 눈빛과 분위기가 얼마나 치명적이고 운명적으로 묘사되었는지. 아직도 그 장면을 생각하면 설렐 정도였다.

그 완벽한 장면에, 남주인공의 앞주머니로 삐져나와 있는 병아리 따위의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이왕이면 이 순간만큼은 내 존재 역시 흐릿해지길 바라며 숨을 죽였다.

‘잠시 말 좀 묻지.’

“잠시 말 좀 묻지.”

꺄아아!!! 혹시 황태자 전하십니까!

“……혹, 황태자 전하십니까.”

꺄악!!

“그래. 모나한 백작의 집에 머물기로 했지. 그대 역시 모나한가와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백작은 제 오라비입니다. ……놀랄 만한 손님이 오실 거라 하더니, 정작 준비가 미흡했군요.”

“아니. 내가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으니 마음 쓸 건 없다 전해 주겠나.”

그러겠다고 대답한 벨라가 저택 쪽으로 멀어져 갔다.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그녀가 여기 있었단 건, 혹시 날 기다렸던 걸까? 괜히 미안하면서도 운명의 만남을 이끌었다는 생각에 뿌듯해졌다.

‘만났어. 드디어 만났어!’

난 아직 주머니 속에 얌전히 몸을 옹송그리고 있었다. 혹여라도 첫 만남의 여운을 느끼고 있을 클레멘츠에게 방해가 될까 걱정이 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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