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그러다 끝내는 이성을 잃고 연인을 죽였지.’
그러느니 차라리 마음껏 마수들과 교감하고 자유를 즐기도록 충분히 풀어 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지날수록 내 판단이 옳았다는 게 드러났다. 벨라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은 채 야성을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저 산과 들을 뛰놀며 호숫물을 핥아 먹고 반딧불이를 쫓는 걸로 만족하는 벨라와, 과거 마수를 부려 무수한 사람들을 죽였던 흉악한 대마녀가 같아질 리는 없었다.
밤이 되면 벨라가 방에서 빠져나와 저택 뒷문으로 나갈 수 있도록 망을 보았다. 혹여 예기치 못하게 마주치는 이의 주의를 돌리기도 하고, 그것마저 너무 늦었다면 약의 힘을 빌려 증거를 없앴다. 물론 죽인다거나 하는 살벌한 얘긴 절대 아니었다.
하빌의 뿌리. 강력한 수면제이자 환각제인 그 식물은 마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인체에 무해했다. 곱게 말려 빻은 뿌리의 향을 맡기만 하면 달콤한 잠에 빠져 다음 날 아침 상쾌하게 일어나게 된다.
완벽한 효과와 전무한 부작용. 대신에 그만큼 구하기도 힘든 하빌 뿌리를 마련해 오는 건 늘 내 몫이었다. 백작 영애가 수면제나 환각제 나부랭이를 구한다는 말이 나돌면 곤란하니까.
그런고로 나는 지금 숲속에 약초를 캐러 와 있었다.
안개 낀 숲을 휘휘 둘러보다가 망토에 달린 후드를 썼다. 손목에 건 바구니는 아직 비어 있었다.
평소에는 안개가 짙은 곳을 피해 잽싸게 약초만 쏙쏙 빼 갔었는데, 오늘은 눈에 보이는 곳에 하빌 뿌리가 없다.
“큰일 났네. 내가 너무 많이 캐 가서 이제 없나 봐.”
마법의 땅. 인간 세상과 마계의 경계에 있는 혼우드에서는 온갖 생명이 마법을 품고 태어났다. 이 몸 오필리어 역시 보잘것없으나 목소리에 미미하게 깃든 마력이 있었다. 그걸 보여 주듯 내 목에는 여섯 꽃잎의 꽃문양을 작은 도장으로 누른 것 같은 표식이 있었다.
마계와 인간계의 경계인 이 안개의 숲은 특히 마력이 짙어서, 하빌 뿌리처럼 희귀한 약초를 쉽게 캘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하기도 했다. 벨라가 마물을 만나 저주를 받은 것도 바로 이 숲에서였다.
“한 뿌리라도 가져가긴 해야 하는데.”
저택에 숨겨 둔 여유분이 얼마 없었다.
혹시 저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가 재수가 없어서 마물이라도 만나면 어쩌지?
벨라에게야 변신 저주가 반가웠다지만 지극히 평범한 인간인 내게 그런 게 달가울 리 없었다.
“으으, 어쩌지…….”
나는 짙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 깊은 숲을 힐끗거리다가 갑자기 깨달았다.
‘여기는 어차피 소설 속이지?’
벨라가 저주를 받은 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야성적인 천성을 가진 소녀에게 그 저주란 밤 시간 동안만이라도 주어지는 온전한 자유였다. 거기다 흑표범 저주라는 비밀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태도를 만들고, 장차 있을 클레멘츠와의 로맨스에 양념을 팍팍 뿌렸다.
즉 벨라에게 가해지는 변신 저주란 개연성이 차고 넘쳤다. 필연이었다.
하지만 나는?
오필리어 레오라는 여주인공 자리의 부속품이다. 여주인공을 보살피기 위해 그 자리에 꼭 있어야만 하면서, 결코 그녀보다 돋보여서는 안 되는.
즉 이건 내가 저주에 걸릴 일 따윈 없다는 확증이나 마찬가지였다. 여주인공의 시녀면 얌전히 옆에서 ‘꺄아, 황태자 전하께서 이쪽을 보고 계셔!’ 같은 영양가 없는 대사를 외치고 있을 의무가 있었다. 괜스레 쓸데없는 저주 따위에 걸려서 그 그림을 망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핫, 나도 참 별걱정을 다 했네!”
생각을 정리하고 나자 저 안개 속이 전혀 무섭지 않았다.
짙은 안개는 마치 가습기를 빵빵하게 튼 듯 촉촉했다.
마력의 스산한 냉기는 그저 시원하기만 했다. 나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약초를 찾아 나섰다.
“하빌이히- 어디히 있을까하- 오홍, 저기 있네용!”
바구니에서 작은 호미를 꺼내 주저앉았다. 고개를 숙이자 턱선 길이의 내 구불구불한 금발이 흘러내렸다. 슬쩍 귀 뒤에 꽂아 넣고 손을 놀렸다.
“오, 이거 제법 크잖아? 역시 마력 안개를 듬뿍 먹고 자라서- 응?”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그냥 분 게 아니라 다 때려 부술 기세로 미친 듯이 불어닥쳤다.
“악 씨!”
바람에 실린 낙엽 부스러기에 얼굴을 얻어맞았다. 소매로 얼굴을 가려도 좀체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다.
여태까지의 숲이 순한 맛이었다면, 지금은 갑자기 지옥의 매운맛 7단계가 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왜?
‘설마 내가 약초를 건드려서…….’라는 가정엔 과감히 가위표를 그었다. 지나친 자의식은 위험하다. 이 콧대 높은 세계가 착실히 조연 역할에 충실하던 조연에게 영향받을 리가!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소름 끼치게 높은 소리와, 소름 끼치게 낮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빠르게 가까이 오며 커지고 있었다. 마치 두 미친 여자가 깔깔대며 말싸움을 하는 것 같았다.
마물 중에서도 오래되고 고등한 것들은 인간의 형태로 인간의 말을 구사하곤 했다.
‘망했다. 마물인가 봐.’
패기 있게 들어오긴 했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 닥치자 몸이 떨렸다.
우선 숨자.
근처에 풍성해 보이는 관목 사이로 끼어 들어갔다. 프로 시녀 정신으로 하빌 뿌리만큼은 챙겼다.
몸을 숨기자마자 마물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같은 게 내 언니라니 믿을 수가 없어!”
“너 같은 게 내 동생이라니 재수도 없어!”
“나에게 넘겨! 모두 낮이야!”
“싫어, 내 거야! 전부 밤이야!”
마물 중에서도 고등한 편에 속하는 인간형 마물이었다. 관목 잎새 사이로 새하얀 옷을 입은 여자와 새까만 옷을 입은 여자가 보였다.
하얀 쪽은 피부도 종잇장 같았고, 까만 쪽은 칠흑 같았다. 분명히 발이 달려 있지만 지면 위로 동동 떠다니며 이동하는 것 같았다. 언뜻언뜻 보이는 얼굴들은 기괴했다.
아, 이게 뭐야…….
방금 전 ‘마물이 봐도 나는 조연이니 지나칠 거다.’라고 생각했는데, 확신이 없어졌다.
실제로 본 그것들은 생각보다 훨씬 미쳐 있었다. 미친 사람이 뭔들 못 하겠는가. 젠장.
아니나 다를까, 내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저들이 서로에게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하얀빛과 검은 구름이 팡팡 쏘아졌고, 쏙쏙 잘만 피하는 서로 대신에 애꿎은 숲만 망가뜨렸다.
그러면서도 깔깔댄다. 싸움이 아니라 장난이었나?
아니 잠깐, 숲에 마법을 난사하고 있다고? 그럼 나, 나의 안전은…….
그때 퍽 하는 소리가 들리며 시야가 온통 하얗게 뒤덮였다. 주변에서 뭔가 파삭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망했다거나 큰일 났다는 생각마저 없었다. 눈이 너무 부셔서 괴로울 뿐이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삐약.”
후, 일단 살았구나. 다행이었다.
주변을 보니 얼추 소란은 정리되었고 마물도 보이지 않았다.
“삐약삐약.”
이제 하빌 뿌리를 챙겨 저택으로 돌아가면 되겠다.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벨라가 채근할 텐데. 따뜻한 수프나 한 그릇 먹고 싶다.
근데 아까부터 왜 자꾸 새소리가 들리는 거지?
뭔가 이상했다. 아까 사수해 낸 하빌 뿌리는 기묘할 만큼 컸다. 튼실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 정도였던가? 분명 내 손과 비교해 보면…….
“삐약?”
손을 앞으로 뻗었는데 왜 노랑 솜털 날개가 보이는 걸까.
“삐약……? 삐, 삐약?(이거 내 목소리야?)”
“삐약!(꿈인가?) 삐약?(그렇겠지?)”
“삐…….(배고파…….)”
확실한 건 세 가지였다.
먼저, 나는 노랗고 작은 새가 되었다. 바구니와 하빌 뿌리만 떨어진 걸 보아, 입고 있던 옷이나 옷 안의 소지품까지 통째로 변해 버린 듯했다.
다음, 이게 꿈이든 현실이든 나는 저택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지막, 기껏 캐낸 하빌 뿌리는 도저히 운반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진짜? 저주? 이 시점에?
지금 난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심부름이나 훌륭한 조연 역할은 고사하고 대체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도 몰랐다.
다행히도 방향 감각은 그대로였지만, 병아리 발걸음으로 얼마나 걸어야 할지 아득하기만 했다.
날개를 열심히 퍼덕여 봐도 날기는커녕 배만 더 고플 뿐이었다.
“삐.(흑.) 삐이…….(흐흑…….)”
근무 중 이런 일을 당했는데 산업 재해 신청조차 할 수 없는 로판 세계관!
똑같이 저주를 당해도 벨라 같은 여주인공은 멋진 흑표범이 되는데, 병아리라니! 병아리라니! 실로 엑스트라에 어울리는 하찮음이었다.
음침한 숲속을 종종거리면서 걷고 있자니 막막함이 몰려왔다.
울어서 도움 되는 게 없는 걸 알지만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사람 모습일 땐 귀엽게만 느껴졌던 삐약삐약 소리가 이렇게 서글플 줄이야.
차라리 기다릴까?
확실하진 않지만 방금 그 마물들은 벨라에게 저주를 걸었던 밤의 마물과, 그 자매라는 낮의 마물 같았다.
밤의 마물의 저주를 받은 벨라가 낮엔 인간으로 돌아오듯이, 내 경우 낮의 마물에게 저주받았다면 밤에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밤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그것도 문제였다. 오필리어 레오라는 아무런 호신술도 배우지 못하고 그저 목소리에 약간의 마력이 담겼을 뿐인 민간인이다. 밤중에 깊은 숲속을 혼자서 통과하는 것도 충분히 위험했다.
게다가 내가 늦게까지 돌아가지 않으면 벨라가 걱정할 터였다. 망 봐줄 사람 없이 혼자서 밖으로 나가기도 힘들 테고.
“삐힉…….”
결국 난 다른 수가 없어 하염없이 숲속을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땅이 흔들렸다. 우뚝 놀라 걸음을 멈췄다. 말발굽 소리였다. 이 숲속에 나 말고도 누군가가 있었다! 그것도 말을 탄 사람이!
“삐! 삐약! 삐약……!”
이 순간만큼은 도적이든 산적이든 상관없었다. 이 기나긴 숲길을 지나 나를 마을까지 데려다줄 수만 있다면.
열심히 파닥거리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뛰어갔다. 말 탄 사람은 두 명이었다. 그들은 샘 가에 내려 말에게 물을 먹이고 있었다.
‘어……?’
뒷모습뿐이지만 둘 다 분위기가 범상치가 않았다. 물을 마시는 백마와 흑마조차 우아하게 생겼다. 게다가 한 사람은 은발, 다른 한 사람은 적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