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떨어진 핸드폰을 다시 주워 들어 살펴보니 나와 마찬가지로 충격의 구렁텅이에 빠진 독자들의 덧글이 이어졌다.
[피폐물 맞네요…….]
[하…….]
[……뭐야?!?]
[전개도 지지부진하고 내내 고구마만 먹이더니 이게 뭐예요……. 로판인데 남주가 이제 없으니 그냥 판소인가요? 필력이 좋아서 참고 읽었는데 이제 그냥 모르겠네요. 하차합니다.]
[클레멘츠는 페이크고 메디프가 찐 남주인가요? 메디프 파는 고개를 들어 주십시오.]
[작가님 다음 화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남주 다시 살려 주세요. 모른 척하고 읽을 테니까요.]
그 와중에 무엇보다도 나를 미치게 하는 내용은 한 줄의 공지 사항이었다.
[‘뷰티 앤 더 비스트’ 1부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 후 2부로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뭐? 이렇게 끝내 놓고선 휴재한다고?
나는 눈물을 머금고 드러누우며 간절히 빌었다. 기절했다가 눈을 뜨면 2부가 시작되어 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난 여주인공의 동갑내기 시녀가 될, 12세의 오필리어 레오라로 빙의되어 있었다.
아카시아 꿀 같은 금발. 황금 같은 금안. 동글동글한 눈과 인상이 제법 귀엽긴 했지만 다 자라도 벨라처럼 아름다워지진 못할 터였다.
소설 속에서도 눈에 띄는 언급은 없었다. 백작가에 황태자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호들갑을 떤다든가, 벨라에게 옷을 입히고 시중을 든다든가. 황궁의 소문을 전해다 주고 심부름을 하는, 어느 소설이건 여주인공의 옆에 있을 법한 그런 전형적인 역할이었다.
그런 가벼운 존재감이었으니, 내 이름보다도 내가 모시게 될 아가씨의 이름을 들은 뒤에야 빙의했다는 걸 깨달을 정도였다.
“……휴재 끝나면 깨워 달라고 했지, 조연으로 빙의시켜 달라고 한 적은 없는데요?”
“오필리어, 그게 무슨 말이니?”
저 사람이 바로 오필리어의 어머니겠지. 둥그렇게 뜬 황금색 눈이 딸과 무척 흡사했다. 나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냥 좀 더 잘래요, 어머니.”
“오, 그러도록 하렴. 다음 달에 모나한 저택에 가면 원할 때 마음껏 잘 수도 없을 테니…….”
쓸데없이 디테일한 꿈이군.
‘이번엔 진짜로 휴재가 끝났을 때 깨워 주세요.’
누구에게 비는지도 모르는 채 눈을 감았다. 혹은 적어도 그냥 다음 날 아침에 내 침대에서 깨어나길 바라면서.
하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몇 번을 다시 잠들었다 눈을 떠도 여전히 오필리어 레오라였다.
그제야 충격에 울기도 하고 방에 틀어박히기도 해 봤지만, 이미 일어난 일인 걸 어쩌랴.
며칠이 지나고서 겨우 진정한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소설 안으로 들어온 건 어쩌면 기회일지도 몰랐다. 1부 마지막의 그 비극을 막고,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두 주인공을 구할 수 있는 기회.
사랑은 역경이 있어야 더 불타오른다는 공식은 익히 안다. 그렇다고 그 역경이 굳이 서로 죽고 죽이는 살벌한 것이어야 하나?
역경을 헤치며 잃은 것이 크면 클수록 아무리 진정한 사랑이라도 피폐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독자들이 알고 보니 이 소설 피폐물이었냐며 아우성을 친 것 아닌가.
이런 경우 결말이 슬플 가능성 역시 상승한다. 내 최애 소설인 ‘뷰티 앤 더 비스트’에 새드 엔딩이라니. 그거야말로 하늘이 두 쪽 나도 막아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자면 문제의 그 사건에서부터 시작해야 했다. 벨라는 어째서 클레멘츠를 죽였나?
악녀 카밀의 이간질 탓에 애증이 커진 탓도 있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벨라의 정체였다. 벨라루시아 레우니스 모나한. 그녀는 환생한 마녀였다.
소설의 배경인 이곳 클라티아 제국은 악마를 몰아낸 마법사가 세운 나라였다. 오래전 이 땅 위엔 온갖 마물과 마수, 악마들이 기승을 부려 도저히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없었다.
순수한 마력 덩어리 속에서 태어나는 악마.
그보단 탁하고 흐릿한 기운 속에서 생겨나는 마물.
이 두 족속을 통틀어 마족이라 불렀다.
어느 날 천재 마법사가 자신의 피를 매개로 하여 모든 마족을 봉인하고 황위에 올랐다. 그 피의 힘은 후손인 뒤싱겐 황가에게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그러나 봉인이 이루어진 뒤에도 오직 세상의 서쪽 끝, 마계와의 경계에 있는 혼우드엔 마수들이 활개를 쳤다.
땅 자체에서 진하게 올라오는 마력을 머금으면 평범한 짐승들도 마수로 변이했다. 황가의 피로도 마수만큼은 몰아낼 수 없는 이유였다.
대신에 숲속에는 마수들이 어미처럼 따르는 오래된 마녀가 있었다. 본디 인간 출신으로 무시무시한 마수들을 뜻대로 부리고, 인간 세상의 질서는 무시한 채 자유롭게 사는 대마녀가.
고민 끝에 황제는 대마녀를 잡아 죽이고 시체를 매다는 방법으로 마수를 토벌했다.
겁먹은 마수들은 깊은 숲속으로 물러났지만, 대마녀의 원혼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가 혼우드 출생의 어느 귀족 아가씨 몸으로 들어갔다.
그렇다. 그게 바로 벨라였다.
1부 후반에야 벨라의 정체를 알고 나서 충격에 치를 떨었다. 처음 만나는 그 순간부터 서로 원수였다니.
클레멘츠의 피를 흘려라, 계속 부추겨 대던 본능이 다름 아닌 대마녀의 원혼이었던 것이다.
이러다가 벨라가 정말로 그를 죽이게 될까 봐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가? 그 끔찍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 버렸고 말이다.
‘하지만…….’
끝내 클레멘츠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었을 때, 벨라를 사로잡고 있던 대마녀의 혼은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를 온 하늘 가득 울리며 떠나간다.
그리고 벨라는 빠르게 식어 가는 클레멘츠의 시신 위에 눈물을 흘린다.
웃은 건 대마녀의 영혼이고, 벨라는 울었다. 결국 둘은 다른 존재라는 뜻이다. 분명 벨라는 클레멘츠를 죽인 것을 깊이 후회할 터였다.
그럼 후회할 일을 하지 않게 만들어 주자.
벨라는 어려서부터 외로움과 답답함에 시달렸다.
낮보단 밤이 편했고, 한밤중에 몰래 저택 밖의 숲으로 나가 뛰어 노는 걸 즐겼다. 숲속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가 벨라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훗날 밝혀지지만 ‘목소리’란 당연히 마수들의 것이었다.
하지만 오직 바른 행실이니, 숙녀의 교양이니 하는 것을 쌓아 좋은 혼처로 보내지는 게 목적인 귀족 영애에게 그런 비밀이 용납될 리 없었다.
오라비는 엄하게 야단을 쳤고, 저택의 사용인들은 별나고 이상한 아가씨 취급이었다.
한사코 빠져나갔다가 저주를 받아 돌아온 뒤에는 더 심해졌다.
“잘도 여기까지 들쑤시는구나, 아름다운 밤의 딸. 네게 더 어울리는 모습을 선물할게.”
흑표범의 모습으로 변하는 밤의 마물의 저주는 벨라에겐 축복이나 마찬가지였다. 늘 숲속을 더 자유롭게 누빌 수 있기를 바라 왔으므로.
하지만 자유는 얼마 가지 못했다. 고명한 백작가 영애의 비밀이 탄로 날까 봐 다들 쉬쉬하며 벨라를 감금하다시피 했다. 결국 벨라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마음의 문을 닫았다. 그녀도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억눌리며 성장한 아가씨가, 운명적인 사랑이 찾아와도 그 사랑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저 하얀 목을 발톱으로 그으라거나, 살점을 찢어 먹으라고 속삭이는 원혼과 그에게 호감을 느끼는 진짜 자신의 생각을 구분할 수 있을까? 아마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만일 어릴 때부터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친구가 있었다면? 답답하고 억압된 마음을 누군가에게는 털어놨다면?
과거와 현재는 다르다고, 예전에 어떤 존재였건 너는 너로서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해 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그렇다면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란 걸 받아들일지도 몰랐다. 파국으로 치닫는 발걸음을 스스로 멈출지도 모른다.
‘좋아, 결심했어.’
소설이 시작되기까지 앞으로 8년이나 남았다. 한 아이가 성장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소설 내용이 시작되고 클레멘츠가 오면 그땐 그들 사이에 장애물이나 오해가 없도록 해 주는 사랑의 수호천사가 되리라.
그렇게라면 이 이야기의 결말도 피폐나 새드가 아닌 달달한 해피 엔딩으로 바뀌겠지?
‘얘들아, 내가 꽃길 걷게 해 줄게!’
많이 어려진 12세의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결심했다.
* * *
“벨라. 벨라루시아!”
마침내 12세의 벨라와 처음 만난 그날, 미리 결심하던 대로 반갑게 웃으며 그 모나한 가문의 작은 아가씨를 끌어안았다.
“뭐, 무슨.”
아무 걱정도 하지 마.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어.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게.
비단 같은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여자아이가 내 품 안에서 그대로 몸을 굳혔다.
나는 매일매일 벨라의 곁을 지켰다. 비록 시녀지만 오필리어는 몰락 귀족의 딸 신분이었기에, 수업을 같이 듣기도 하며 소꿉친구처럼 함께했다.
마지막까지 읽던 소설의 여주인공을 어려서부터 지켜보니 애정이 더더욱 깊어졌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나는 벨라를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벨라, 수놓는 게 싫으면 안 해도 괜찮아. 내가 하고 있을 테니 더 자.”
“밖에 모나한 백작님이 돌아다니고 계셔. 널 찾는 것 같은데…… 이렇게 하자. 옷 방에 숨어 있으면 내가 널 못 봤다고 둘러댈게.”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내게 해도 좋아. 나는 네 편이야.”
언제든 그녀의 말을 듣겠다고 말했지만, 보통 벨라는 듣는 쪽이었고 이것저것 종알대는 건 나였다.
하기야 성격이 쉽게 바뀌진 않으니. 겉으로는 여전히 퉁명스럽더라도 내게 조금쯤은 마음을 열었으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8년의 세월은 그렇게 쏜살같이 흘러갔다.
그동안 벨라의 시녀로 지내며 무엇보다 공을 들였던 게 있었다. 그녀가 들키지 않으면서 충분히 비밀스러운 자유를 맛볼 수 있도록 협조하는 것.
물론 벨라가 마수들과 지내는 게 위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엔 그녀의 본성이 억눌리는 것이 백배는 위험했다.
실제로 클레멘츠를 볼 때마다 원작의 벨라는 폭발하듯 튀어나오려는 본성 때문에 곤욕을 겪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