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오필리어.”
그는 나를 사랑스럽기 그지없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보랏빛 눈이 꿀을 떨어뜨린 듯 빛났다.
무척 잘생긴 얼굴이었다.
“사랑해.”
이토록 달콤한 속삭임을 그에게 받을 수만 있다면 제국의 여인들은 무엇이든 할 것이었다.
그는 이 제국의 황태자였기 때문에.
그러나 정말 애석하게도, 이 황송한 애정 표현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다.
“삐약.”
그렇다. 내 앞에 있는 상대가 누구든, 이곳이 황태자를 사모한 여인들 중 누구도 들어올 수 없었던 그의 침실이든 뭐든. 다 소용없었다.
지금 내 몸은 한 마리 노란 병아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귀엽군. 내가 고른 상대다워.”
귀여워 죽겠다는 듯 낮은 웃음을 흘리는, 클레멘츠 레스타 뒤싱겐. 고귀해 보이는 은발을 가진 황태자.
그가 바로 멀쩡한 귀족 영애인 나를 데려와 밤낮 병아리로 지내게 만들고, 가족과 생이별하여 이 골치 아픈 황궁에서 지내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삐약! 삐약!”
나는 항의의 의미로 거세게 날개를 파닥거렸다. 이, 이 미친놈. 고작 병아리 따위를 애첩마냥 끼고돌아서 지금 황궁에 어떤 파란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
“카시스.”
“예, 전하.”
“오필리어가 통 모이를 쪼지 않는군. 어떻게 된 일이지?”
너 때문에요!
“이런, 새로 바꾼 최고급 모이가 입에 맞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전에 드시던 걸로 다시 바꾸라 이르겠습니다.”
“사랑스러운 오필리어, 황태자의 병아리면서 입맛이 이렇게나 검소하다니. 실로 제국의 귀감이다.”
무슨 소리야!
황태자의 보좌관으로 제국에서 가장 유능한 남자인 카시스 듀프레 후작마저 이 애완동물 놀음을 진지하게 거들고 있었다. 나만 빼고 제국이 미쳐 돌아가나?
클레멘츠는 내가 본모습일 때도 내 말을 듣는 놈이 아니었다. 하물며 지금이야 무슨 의사를 전달할 수 있을까.
저항할 의지를 잃은 나는 모이 그릇 위로 주저앉았다. 세련된 모이 그릇 위에 금박으로 박힌 내 이름 ‘오필리어’가 보였다. 아무리 화를 내도 저 귀하신 놈에겐 그저 귀엽게나 보이는 내 신세가 처량했다.
“나의 오필리어,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느냐.”
너요, 너! 나의 모든 근심과 걱정과 파국의 원인은 너예요!
이상했다. 분명 내가 읽은 소설 속에서 클레멘츠는 이런, 속되게 말해서 또라이가 아니었다. 여주인공을 향한 달콤한 태도로 독자들의 칭송을 받는 남주인공이었다.
그러다가 사랑하는 여주인공 벨라루시아에게 죽음을 맞기는 하지만.
애독자였던 나는 그 비극적인 사건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소설에 빙의한 뒤로 그의 죽음을 막으려 애썼다. 여주인공과 그 사이에 오해가 없도록, 서로에게 진심인 그 마음만 예쁘게 가져가도록.
하지만 일은 보기 좋게 엉망진창으로 꼬여 버렸고 그 결과가 지금이다. 잘 살아 있는 건 좋다. 그런데 왜, 여주인공에겐 관심도 없고 병아리에 불과한 나를 데려다 섬기고 있는 걸까. 본래 신분도 여주인공의 소꿉친구쯤 되는 엑스트라인 나를.
“황태자 전하! 오필리어를 돌려주세요! 분명 오늘 점심은 제가 돌볼 차례일 텐데요?!”
쾅쾅쾅쾅. 견고한 침실 문을 부술 듯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황태자의 방문을 저렇게 마구 두드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카밀 드 베일리스 후작 영애. 백금발과 녹안의 미녀.
가장 유력한 황태자비 후보였던 여자.
그리고 소설 속에선 클레멘츠의 관심을 받기 위해 여주인공을 죽도록 괴롭혔던 악녀.
그러나 지금은 병아리가 된 나를 서로 가지겠다고 클레멘츠와 불꽃 튀는 경쟁을 벌이는 사람일 뿐이었다.
카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클레멘츠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돌려보내.”
“맡겨 주십시오.”
무슨 엄숙한 임무라도 계획하는 듯한 눈빛이 오갔다. 듀프레 후작은 붉은 머리의 잔상을 남기며 방문 쪽으로 다가갔다.
내가 여기 있는 걸 다 알고 있으니 한사코 들어오겠다는 카밀과, 오필리어 님은 여기 없으시다며 입에 침도 안 바른 거짓말을 늘어놓는 듀프레 후작의 실랑이가 들려왔다.
카밀은 만만한 여자가 아니다. 아마 꽤 시간이 걸릴 터였다.
“너는 아무 걱정 할 것 없다, 오필리어.”
그 와중에 클레멘츠 황태자는 달콤하게 속삭이며 제 두 손바닥 위로 나를 올려놓았다.
마치 사랑의 도피 중인, 숨어 있는 연인이라도 된 듯한 태도였다.
웃기셔- 대체 왜 병아리에게 모두들 이렇게까지 진심인 거냐고!
“삐약! 삐약!(돌아 버리겠네!)”
“그래, 나도 같은 마음이다.”
“삐약!(같은 마음 좋아하네.) 뺙.(넌 이미 돌아 있다.)”
“너처럼 귀여운 존재는 지금껏 내 인생에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게다. 다음 달에…… 황실의 어른들을 모시고 식을 올리자꾸나.”
“삐약(무슨 식 말이오…….)”
수상하게 볼을 붉히는 클레멘츠 때문에 소름 끼쳤다. 뉘앙스도 뭔가 이상하지만 외면하려 애썼다.
드디어 클레멘츠는 책상 위의 은쟁반에 덮어 두었던 공단 덮개를 벗겼다.
그 아래엔 병아리의 자그만 몸에 맞춰 만든 하얀 드레스와 면사포, 작은 장미꽃 봉오리와 진주로 만든 티아라가 있었다.
심지어는 하얀 철사로 만든 병아리 모양 바디에 정갈하게 피팅된 채로.
“너처럼 귀여운 병아리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
클레멘츠는 엄지손가락으로 더없이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음에 드느냐?”
아무리 황당한 일이 벌어져도 스트레스 받지 않으려고 했는데.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다. 가엾은 내 날개와 클레멘츠의 단단한 손 위에 선 두 발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마치 드라마 속의 막장 상황에 고혈압 시아버지가 뒷목 잡고 쓰러지듯, 나 역시 주황색 작은 두 발을 위로 꺾으며 뒤로 넘어갔다.
그래 봤자 클레멘츠의 넓은 손바닥 위였고, 풍성한 솜털 탓에 폭신- 하는 효과음까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오필리어, 왜 이러지? 드레스가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아아, 어쩌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 남들은 암만 기구한 조연이나 엑스트라에 빙의해도, 적어도 사람이긴 하던데.
기억은 아주 오래전, 처음 이 소설 속에 들어왔을 때로 돌아갔다.
나는 지방 하급 귀족의 딸이었고, 같은 지방에서 가장 유력한 백작 댁 영애의 시녀로 들어갔다.
벨라루시아 레우니스 모나한.
그 아가씨의 이름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는 읽고 있던 무료 연재 소설 ‘뷰티 앤 더 비스트’에 빙의했던 것이다.
* * *
“이럴 순 없어어어!!”
머리를 쥐어뜯으며 다시 봐도 화면에 표시된 문장은 그대로였다.
[클레멘츠 레스타 뒤싱겐은 그렇게 숨을 거두었다.]
“크흐으으으윽…….”
괴상한 신음 소리가 입술을 뚫고 나왔다. 두 눈엔 눈물이 맺혔다.
[여인을 사랑하게 되어, 그 자신의 목숨조차 그녀의 손에서 되돌려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으아악!!”
견딜 수 없어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 매트리스에서 튕겨 나온 핸드폰이 바닥으로 거칠게 떨어졌다. 할부 약정이 1년은 넘게 남아 있다는 사실은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고작 웹 소설 내용 때문에 이 난리를 치는 게 우습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 ‘뷰티 앤 더 비스트’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첫 화부터 취향에 꼭 들어맞아 읽고 또 읽고, 매일 새 연재분이 올라오는 시간을 오매불망 기다려 왔다.
이 소설의 매력은 신비로운 설정과 분위기였다. 그 신비로움의 근원은 바로 여주인공인 벨라루시아에게 있었다.
마물의 저주를 받아 밤마다 흑표범으로 변하는 백작 영애. 벨라루시아 레우니스 모나한.
서쪽 지방을 방문했다가 그녀와 마주친 남주인공, 클레멘츠 레스타 뒤싱겐 황태자.
겉보기엔 얌전하고 성숙한 백작가 영애지만, 벨라는 길들여질 수 없는 야성을 감추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 벨라는 클레멘츠에 대한 끌림을 그 본성대로 ‘잡아먹고 싶다.’라거나, ‘부러뜨리고 싶다.’같이 과격하게 표현했다.
클레멘츠 역시 평범한 남자는 아니었다. 분명 인간이지만 어딘가 인간 같지 않은 느낌이 있었다. 달이 뜨는 밤이면 더 짙은 이질감이 늘 그의 주위를 맴돈다.
[여주가 남주 볼 때마다 먹고 싶어 하는 소설은 처음…….]
[클츠야 도망쳐.]
[분위기가 무겁네. 이 소설 피폐물인가요?]
[윗분 피폐물은 아닌 거 같아요. 그냥 분위기가 강조되는 문체라서 그런 생각이 드는 듯.]
독자의 반응은 대충 이랬다.
어쨌든 절세의 미인인 그들은 한눈에 서로에게 끌린다. 하지만 여주인공 벨라는 흑표범이 되는 저주 탓에 함부로 클레멘츠에게 접근할 수 없었고, 클레멘츠는 자신을 은근히 밀어내는 그녀에게 더 호기심을 갖는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주는 신비감을 가운데 두고 한바탕 짜릿한 썸을 탄 그들은 함께 황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황궁에는 유력한 황태자비 후보로 거론되는 악녀, 사교계의 지배자 카밀 드 베일리스가 있었다.
클레멘츠의 옆에 벨라가 있는 걸 보고 눈이 뒤집힌 카밀은 그녀를 비참하게 밟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카밀 핵 짜증; 작가님 빨리 사이다를 주세요.]
[여주 남주 앞에선 당당하더니 저 카밀 핸드크림인지 하는 애 앞에선 한마디도 못 하고 당하네. 답답.]
[이거 피폐물인가요?]
[저만 남주 좀 쎄한가요? 왠지 일부러 카밀한테 벨라 약점 잡을 빌미를 준 거 같음.]
어느새 소설에 깊게 몰입한 나는 묵직한 묘사로 거듭해 표현된 벨라의 심리를 마치 내 마음처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한결같이 곁에 있는 클레멘츠의 사랑 역시 철석같이 믿었다.
그래서 주인공들을 변호하기 위해 열심히 덧글을 달기도 했다.
[벨라의 성장 과정을 떠올려 보면 저렇게 낯선 환경에서 따박따박 맞설 수 있을 리가 없죠. 윗분은 클레멘츠한테 왜 그러세요ㅠㅠ 우리 클레멘츠가 얼마나 벨라 바라기인데요.]
그렇게 애정과 열정을 다해 달려왔는데, 클레멘츠가 죽어 버리다니. 그것도 벨라의 손에! 그야말로 때 아닌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