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이름 아래 적당한 자유가 허용되는 시끄럽고, 복잡하지만 아름다운 도시. 아프리카의 붉은 보석이라 불리는 마라케시가 그곳이었다. “오늘,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림은 못 찾았지만, 덕분에 여기 온 거 후회 안 해요.” “마지막 인사말 같네. 그러지 말고 다음에 봤을 때 맛있는 거 사 줘요.” “그럼 좋을 텐데…… 우리가 정말 또 볼 수 있을까요?” “돌아가면 나랑 안 볼 건가?” 진심인지, 떠보는 건지 모를 질문에 혜수는 식물의 줄기처럼 뻗어 있는 혈관에 무심코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불을 지폈다. “시작이 이러면 안 되는데.” “다음이…… 없으면요?” 다소 비관적이고, 현실적인 물음이었지만 눈치 빠른 서준은 ‘당장 하자’는 말로 잘 번역해서 들었다. “후회하지 말아요. 말하는 걸 깜빡했는데 나 집착이 좀 심해요. 그쪽이 도망간다고 해도 찾아낼 거야. 시작하면 못 멈춰.” 혜수가 대답 대신 먼저 그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춰 왔다. 연한 부딪힘이었지만 확실한 도화선이었다. 10년 전부터 겨울을 피해 도망 다니던 강서준과 혹독한 겨울을 죄책감으로 견뎌 내던 이혜수. 두 사람의 악연은 서로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