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
시내에 가까워질수록 보이는 짙은 붉은색 건물들과 바닥, 키 큰 야자수 나무와 벽을 카펫처럼 뒤덮고 있는 녹음 진 수풀. 오토바이와 마차, 다양한 사람들…….
강서준은 마라케시로 돌아왔다.
택시에서 내린 그가 복잡한 골목을 걷다 보니 광장이 나왔다. 아무리 길을 헤매도 길은 결국 제마 엘프나 광장으로 이어져 있었다.
띄엄띄엄 위치한 노점상들과 수많은 관광객과 인파. 코브라가 기어 다니고, 도마뱀이 들어 있는 바구니와 당나귀. 여전한 트럼펫 연주자와 헤나를 권장하는 소녀들까지.
휴대폰이나 GPS 없이 프린트된 지도로 길을 걷고 헤매던 그가 멈춰 서서 결국 제 얼굴을 붙잡고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어디를 돌아봐도, 아무리 걸어도 나타나는 광장처럼 결국 그 끝은 모두 이혜수였다.
이 도시에 있는 모든 것들이 혜수를 연상하게 했다. 시간의 틈에 숨어 있던 혜수가 튀어나와 씩씩하게 웃고, 손을 잡고, 앞서 나가고, 마지막엔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술과 공복에 쓰린 속보다 가슴이 아팠다.
그렇게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하는 그의 등을 서늘한 바람이 밀어냈다. 북쪽으로 걸었다. 구불구불한 수크(Souk_중동 지역과 북아프리카 지역의 재래시장을 의미) 안을 걷고, 물어물어 목적지를 찾았다.
북쪽 시장 천장엔 따가운 햇볕을 가리기 위해 대나무로 보호막을 쳐 놓았다. 그 때문에 바닥에 규칙적인 무늬가 생겼는데, 그걸 따라 한참 걸어야 했다.
손으로 짜서 만든 전통 카펫 가게와 번쩍번쩍한 조명 가게의 가운데 목적지가 나타났다.
아마추어 작가들이 그린 그림과 엽서가 잔뜩 꽂혀 있는 앞을 서성이자 주인이 나와 물었다.
“컬렉터? 찾는 게 있어? 아는 화가라도 있는가?”
걸려 있는 거라곤 대부분 색깔이 화려하고, 선이 진한 느낌의 강한 그림들이었다. 낙타를 탄 영웅, 종교적 상황, 신화, 사막의 풍경, 전통적인 옷을 입은 이들의 초상화들……. 그중에 서준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Wave.”
그의 말에 주인이 어깨를 들썩이며 모르겠다고 했지만, 서준은 빳빳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다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마약 거래에 사용됐던 그림들의 리스트, 영수증이라고도 할 수 없는 수기 거래 명세서가 그 내용이었다.
“경찰?”
“그림만 준다면 시끄럽게 만들 생각 없어.”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주인이 가게 뒤에서 작은 그림 하나를 갖고 나타났다. 그가 밤낮없이 찾아 헤매던 그림이 바로 여기 있었다.
파도였고, 이혜수였다.
목표를 손에 넣은 서준의 발걸음이 아까보다 훨씬 가벼워졌다. 이제야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됐다.
긴 미로 같은 곳을 지나오자마자 미국에서 새로 개통한 휴대폰을 켰다. 수천 번도 더 외운 번호를 눌렀고, 어쩐지 길게 늘어지는 것 같은 신호음이 한참 이어졌지만 상대방은 받지 않았다.
그때, 어떤 경고음이 휴대폰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주변인들이 흘끗거릴 정도로 신경이 거슬리는 소리에 화면을 확인하니 ‘기기 찾기’ 메시지가 떠 있었다.
알람을 껐음에도 또다시 울렸다. 그러기를 세 번, 뭔가 이상함을 느낀 그가 주변을 살피며 고개를 들었다.
수많은 인파 속에 유독 반짝거리는 여자가 서 있었다.
“휴대폰은 장식으로 들고 다녀요?”
눈가가 따가워지고, 말이 나오려던 입술이 달싹였다. 주변의 시선과 낯선 언어로의 웅성거림 따위가 뭉그러지며 두 사람만이 풍경에서 선명해졌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왜요? 또 위험한데 혼자 움직였다고 혼내려고요?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쉬웠어요. 서준 씨가 휴대폰을 안 켜는 바람에 한참 헤매긴 했지만. 요한이 아니었다면 찾지도 못했을 거예요.”
“혜수야.”
“이번엔 내가 먼저 찾았어요.”
성큼성큼 다가온 혜수가 서준의 손을 붙잡았다. 피곤함이 역력한 얼굴을 올려다보는 눈동자에 마찬가지로 마른 혜수의 얼굴이 비쳤다.
“……요한이 알려 줬어?”
“네, 서준 씨 메일이랑 통신사 계정 해킹했어요. 혹시라도 뭐라고 하지 말아요. 내가 먼저 연락한 거니까.”
“그렇게 입이 가벼운 놈은 아닌데.”
“당신 휴대폰이랑 노트북에 있던 자료로 협박했거든요.”
파기하지 않고 남겨 두고 온 자료들로 협박을 한 모양이었다. 기특하게도.
“연락은 어떻게 했어?”
“그게 중요해요?”
이죽거렸지만, 그마저도 사랑스러웠다. 여전히 비현실적인 광경이 체온과 감촉으로 점차 현실성을 띠기 시작했다. 정말 이혜수, 이혜수였다.
“겁도 없다, 진짜.”
“나 겁 없는 거 몰랐어요? 싫으면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가지 마.”
그의 눈엔 순식간에 복잡한 감정들이 서렸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불안해 보이기도 했고, 슬퍼 보이기도 했다. 혜수는 그의 손을 꼭 잡고 광장을 벗어났다.
둘은 이름 모를 자줏빛의 꽃 넝쿨이 심긴 벽 아래에 서서 햇살을 피했다.
“나랑 떨어져 있으니까 어땠어요?”
“……아무 생각 없었어.”
“어쩐지. 생각보다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더라. 난 힘들어 죽을 뻔했는데. 오죽하면 이언 오빠가 그런 소리 잘 안 하는 사람인데, 내 얼굴 보고 엉망이라고 했어요.”
“김이언이랑 왜 만나?”
묻는 말에 신경질이 묻어났다.
“이 와중에 그런 건 궁금한가 보네.”
“아무 생각도 못 했어. 맨날 술 마시고, 진상 짓만 했어.”
요한에게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혜수는 알면서도 일부러 물었다.
깔끔한 차림새지만 시커멓게 들어간 눈가와 옅은 술 냄새, 푸석푸석한 머리와 면도날에 베인 것 같은 상처.
떨어져 있던 시간이 불필요하지 않았음을. 서로를 그리워했다는 증거를 찾고 싶었다. 한 번 더 그의 입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다.
“지금처럼 떨어져 지내는 게 서로한테 좋지 않을까 싶어요. 난 아직도 세 사람만 생각하면, 11월만 되면 눈앞이 캄캄해져요. 죄책감에 불안하고 초조해서 계속 미안해하다가 또 도망치고, 결국엔 상처만 줄 수도 있어요.”
“결국…… 여기까지 쫓아와서 날 버리는 게 네 선택이야?”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혜수가 서준의 앞에 섰다.
“그래도 욕심내면 넘어올래요? 맨날 실망시키고, 상처 줘도…… 괜찮겠냐고.”
“상처받은 적 없어.”
“거짓말.”
“너한테 거짓말 안 한다니까. 그러니까 나 데려가, 이혜수. 그러려고 온 거잖아.”
우리가 가진 수많은 접점 가운데 유일한 나쁜 접점이 완전하게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
― 하필 출장 일정이 이렇게 잡혀서 미안해.
“괜찮아요. 공들이던 일이었잖아요. 잘 해결하고 와요.”
― 정말 내가 안 가도 괜찮겠어?
“……안 괜찮지. 근데 나 인터뷰 들어가야 해요. 끊어요.”
하얀색 원피스를 차려입은 혜수가 커다란 화랑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과 밝게 웃고, 인사했다.
꼬박 4년 만에 치러진 이혜수의 복귀전 타이틀은 ‘Fall in Blue’.
전시 시작과 동시에 수많은 관람객이 방문했고, 28점의 그림들 옆에 순식간에 빨간색 스티커가 붙었다.
온통 파란색인 전시회에 사람들은 다시 한번 이혜수와 사랑에 빠졌다. 혜수가 그랬던 것처럼.
관계자가 흡족한 미소를 띠며 다가와 물었다.
“이혜수 작가님, 통화 끝나셨나요? 인터뷰 시간이 거의 다 됐네요.”
“네. 끝났어요.”
“그럼 진행하겠습니다. 아, 작가님. 혹시 엣지 미디어 임도운 기자라고 아세요? 이따 오후에 시간 내 줄 수 없냐고 계속 집요하게 구네요.”
“아……, 그분. 잘 알죠.”
“어머! 일정 잡아 드릴까요?”
“될 수 있으면 저랑 마주치지 않게 해 주세요.”
상냥한 미소로 칼같이 거절하는 혜수를 보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관계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쪽은 오늘 인터뷰하기로 한 아인 미술 기자님이세요.”
“네, 안녕하세요. 기자님.”
“시간 내 주셔서 영광입니다. 좀 돌아다니면서 할까요?”
혜수는 밝게 웃으며 제 그림을 직접 안내하고, 소개했다.
“제목만 듣고 전 솔직히 작가님과 관련된 소문 때문에 우울함을 생각했습니다. 근데 보면 볼수록 그런 것 같지 않아요. 기존 작품들과는 많이 달라진 것 같기도 한데, 전작들에 비해 묘하게 밝고, 명랑해진 것 같네요. 작업 속도도 다른 때보다 무척 빨랐다고 들었습니다.”
그림을 살피며 찬찬히 옮기는 발걸음을 따라 타인의 시선이 들러붙었지만 이젠 불안하지 않았다.
“보시는 분마다 관점이 극과 극으로 달라지는데요, 받아들이기 나름이라고 생각해요. 심연이나 바다를 들여다보면 자신이 보인다는 것과 같은 맥락인 것 같습니다. 우울하다면 우울하고, 기쁘다면 기쁘겠죠.”
“자기 자신이 보인다. 음, 좋네요. 근데 이 ‘등’이라는 작품의 텍스쳐가 굉장히 독특해서 보니 모래입니다. 의미가 있나요? 판매작도 아닌데 가장 가운데에 디스플레이 됐고…….”
“선물하기로 한 작품이거든요. 그래도 새로운 시도라 보여 드리고 싶었어요.”
“왜 하필 모래였을까요?”
“추억이 있어서요.”
“받게 될 분이 누가 될지 몰라도 행복하시겠네요. 아, 이번에 언덕 스튜디오에서 진행하는 디지털 아트 플랫폼에 출품하신 작품도 모두 완판됐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김이언 작가의 제안이었다고…….”
폭풍 같은 일정이 모두 끝났다.
밤늦은 시각. 혜수의 발걸음 소리만 깨끗하게 울렸다.
그림을 비추는 조명들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다 꺼 버렸다. 직접 그린 그림들이 말을 걸어 주는 느낌이 파도쳤다. 우울함, 결핍, 사랑, 행복 따위가 이혜수를 덮쳤다.
가장 가운데의 ‘등’에 다다란 순간 누군가 유리문을 두드렸다.
깜짝 놀라 뒤돌아본 출입구엔 꽃다발을 든 서준이 서 있었다. 제법 먼 거리였음에도 대번에 알아봤다. 혜수는 구두 신은 발로 얼른 뛰어갔다. 문을 열고, 와락 껴안았다. 순식간이었다.
“뭐예요? 언제 왔어요?”
“안 괜찮다고 했잖아.”
“내가 그냥 갔으면 어쩌려고…….”
“휴대폰 확인 안 하길래 아직 여기 있겠다 싶었지.”
두 사람이 짧게 여러 번 입을 맞추며 재회했다.
꽃다발을 안겨 준 그가 그림으로 다가갔다. 하나하나 꼼꼼하게 바라보고, 혜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연신 몸 여기저기를 주물렀다.
“나한테도 안 보여 주더니 언제 이렇게 멋있는 걸 만들었어?”
혜수가 서준의 손을 잡고, 가운데 있던 ‘등’ 앞으로 다가갔다.
“이 그림, 어때요?”
“멋있어.”
“……자세히 본 거 맞아요?”
날이 선 반응에 서준은 당황하며 다시 자세히 살폈다.
“내가 뭘 놓쳤지?”
“급하게 오면서 꽃까지 사 왔으니까 봐준다. 서준 씨 등에 있는 흉터, 그린 거예요.”
“뭐라고?”
그림을 다시 확인한 그의 얼굴이 상기되자, 혜수가 활짝 웃으며 놀렸다.
“얼굴 빨개졌어.”
“좀…… 과하다, 자기야.”
서준은 진심으로 쑥스러워했다. 혜수의 말버릇을 따라 하면서 볼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과하지만, 본인 보면서 만든 거니까 받아 줘요. 선물이에요.”
“너무 과분한데.”
“큰 고기를 낚으려면 미끼는 좀 과분한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씀하시죠. 고기는 미끼를 확실하게 물었고, 뭐든 내드릴 마음의 준비가 됐습니다.”
“나랑 결혼해요.”
어깨를 안고 있던 서준이 한 걸음 물러났다. 혜수의 깜짝 발언에 당황한 그의 눈이 커졌고, 동공이 흔들렸다.
혜수는 그의 반응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 웃었다. 그러곤 옷 안으로 하고 있던 목걸이를 풀었다. 끝에 걸려 있던 동그란 반지를 빼내며 말했다.
“손.”
놀라서 꿈쩍도 안 하는 그의 커다란 손을 대신 들었다. 길고, 아름다운 그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혜수가 끼고 있는 것과 같은 브랜드, 같은 라인으로 나온 남성용 반지였다.
“무르기 전에 얼른 대답해요.”
“……사랑해.”
완벽한 대답이었다.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