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저도 연락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어요.”
“허허, 걱정하지 말아요. 어디에 떨어뜨려도 뒈지지 않을 놈이니. 나가 있으면 거의 일방적으로 연락해 오는 게 다인 놈입니다. 그놈 새끼, 예전부터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어요! 제 할 말만 하고 쏙 끊어 버리고!”
생각할수록 화가 난다는 듯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럼 다행일 텐데…….”
“맘고생 시키는 놈 뭐가 예쁘다고 걱정합니까? 다 됐다. 내가 밖에 나가서 눌러 볼 테니 확인 좀 해 주겠어요?”
“네.”
조금 더 간결해진 벨 소리가 들리자 모니터로 현관 밖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어때요? 선명하게 보입니까?”
“잘 보여요.”
다시 집 안으로 돌아온 그가 뒷정리를 시작했다.
“나머지는 제가 할 테니 그냥 두세요.”
“내가 이거 직업병이에요. 남의 집 건드려 놓고 더럽게 두는 꼴을 못 보지.”
“와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서요.”
바닥에 주저앉은 혜수가 맨손으로 먼지와 벽에서 떨어진 흙덩어리, 나사 따위를 모으기 시작했다.
“어허, 손 다쳐요! 손으로 먹고사는 사람이 함부로 이럼 쓰나!”
“절…… 아세요?”
“하, 커피 한잔 주겠어요? 정리는 내가 할 터이니.”
***
깨진 거실 테이블을 대신해서 작은 스툴 두 개를 엉성하게 붙여 놓은 꼴을 손님에게 보이자니 새삼 민망했다. 물론 동원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소리 없이 커피만 들이켜길 한참, 금빛으로 반짝이는 흰머리를 두어 번 손으로 쓸어 넘기고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군지 강서준이한테 들은 적 있습니까?”
“자세히 듣진 못했어요.”
“원체 제 얘기는 안 하는 놈이지요.”
“생각해 보면 저 때문에 더 숨긴 것 같아요. 제가 힘들까 봐…….”
“깊이 생각 말아요. 그 미친놈 뜻을 우리 같은 정상인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만 가만히 짓는 옆얼굴을 곽 소장은 자세히 살폈다. 가끔 눈에 띄었던 불쌍하고, 어린 ‘혜수’의 모습을 찾아냈다.
“나는 이혜수 씨가 누군지 압니다. 우주나, 은하도 알고 윤 회장 그 할망구도 잘 압니다. 또 이 집 지은 서준이 엄마나, 아버지도 나와 절친한 친구였지요.”
그 말에 혜수는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계절을 품은 꽃처럼 붉은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가 다물렸다. 눈물 하나 고이지 않은 눈엔 슬픔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두 사람, 시작은 힘들었어도 참 단란하고 행복했습니다. 부럽기도 했고, 동경하기도 했지요. 난 결국, 이 나이 이때까지 혼자지만, 지금도 그들이 내 가족이라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무엇이?”
“저 때문에…… 저 혼자…….”
다리 위에 공손히 올려 둔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안타까울 정도로.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혜수 씨는 생존자고, 피해자예요. 죄책감 가질 것 없습니다. 서준이 그놈은 그리 말 안 합니까?”
“했어요. 제 잘못 아니라고, 저한테 죄가 있으면 자기한테도 죄가 있는 거라고…….”
“거 보세요. 가족들이 괜찮다고 하지 않습니까. 내 솔직히 혜수 씨랑 윤 할망구 사이의 일은 잘 몰라요. 애초에 그 집 식구들은 무슨 상관이 있답니까? 제사 한번 안 지내는 인간들이.”
“절 도와주셨어요. 사고 때문에 망가진 다리랑 얼굴, 전부 다 고쳐 주셨어요.”
“그 핑계로 어린 혜수 씨한테 목줄 씌운 거 아닙니까.”
탁한 숨을 내쉰 그가 식은 커피를 들이켰다.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강서준이 한국 돌아와서 제이 윤 사업체를 열심히 캤어요. 갑자기 치킨집 한다고 나댔었는데, 혹시 알고 있습니까.”
“대충이요.”
“자세히 말했을 리가 없지. 일주일 전에 뉴스에 나왔던 폭행 동영상, 알지요? 그거 확, 터뜨린 거 강서준 그놈입니다.”
“몰랐……어요.”
“나도 그렇습니다. 무슨 대단한 수를 썼는지 몰라도 그 강건한 노인네가 스스로 물러난다고 했어요. 심지어 가족들한테 세습 안 하고 전문 경영인한테 맡겨서 투명하게 운영하겠다고 하더이다. 허허!”
이언의 말을 통해 듣긴 했지만, 설마 그게 서준이 한 짓이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제 아비 때문에 개인적인 복수를 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그놈이 혼자서 잘 먹고 잘 살면 말았지, 절대 그런 귀찮은 짓 할 놈이 아니거든. 그래서 내 물어봤더니, 갖고 싶은 게 있다네?”
“갖고 싶은 거요?”
“응, 뒤늦게 회사라도 가질 생각인가 했더니 그것도 아니야. 곰곰이 생각하다가 도저히 못 참겠어서 어제 거기서 일하는 성질 고약한 놈까지 찾아갔다 왔어요. 황 비서, 알아요?”
“네.”
“그놈도 군대 동기거든. 아, 글쎄 그놈이 뭐라는 줄 압니까?”
혜수가 도저히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쪽 이름을 꺼냈답니다.”
“……제 이름이요?”
“예, 약점 같은 것들을 수류탄처럼 꺼내다가 우르르 쏟아 놓더니 두 번 다시 이혜수랑 자기 건드리지 말라고 알아서 물러나라고 했답니다. 정말 미친놈 아닙니까? 하하! 또라이.”
윤 회장이 이 집에 와서 난동을 피우고 간 날, 혜수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그날, 나가라고 떠밀었던 눈이 오던 그날 저녁임이 분명했다.
“혜수 씨가 그 집에 망령처럼 붙잡혀 있던 게 안타까웠던 모양입니다.”
눈썹 위를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눈물을 참아 냈다. 서준은 그들에게서 이혜수를 떼어 내려고 안 보이는 곳에서 혼자 노력하고 있었다.
“전 그것도 모르고…….”
“그래서 내 지금 알려 주는 거 아닙니까. 미친놈이지만, 진실해요. 혜수 씨한테 진심이라고.”
그의 말에 숨이 막혔다. 서준은 처음부터 진심이었다. 끝까지 진실하지 못했던 건, 자기 자신인 것 같았다.
“서준이가요. 원래 잠 한숨 제대로 못 자고, 어쩌다 한국 들어올 때마다 시체처럼 맛이 간 눈탱이로 다녔습니다. 날을 세워서 곁에 사람 두는 법도 없었고. 근데 이번에 들어왔을 땐, 사람도 만나고 많이 웃었습니다. 그렇게 웃는 거 처음 봤어요. 언제 죽을지 모르니 건물도 다 팔아 버리라고 하던 놈인데 노후를 위해서 하나 남겨 두잔 소리까지 해서 미친 거 아닌가 싶었어요.”
입술에 피가 몰릴 때까지 꽉 깨물고 눈물을 참아 내려 했지만, 결국 또 흐르고 말았다. 그 겨울 이후, 제대로 흘려 본 적 없던 눈물이 기다렸다는 듯 콸콸 쏟아졌다.
동원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다 이혜수 씨 덕이겠지. 혜수 씨가 그 애 시간을 움직이게 했어요. 그러니…… 늙은이 소원입니다. 이제 둘 다 먼저 간 영혼들일랑 놔주고, 행복하게 살아요. 그 세 사람이 둘이 이렇게 지내는 거 보면 슬퍼하지 않겠습니까?”
혜수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고개를 숙여서 사과했다.
“죄송해요. 정말, 정말 죄송해요.”
“나야말로 그렇게 둬서 미안합니다. 힘들었을 텐데, 제대로 된 어른이 옆에서 도와줬어야 했는데…… 너무 늦게 아는 체해서 미안합니다.”
***
침대에 누워 희미하게 남아 있는 그의 냄새를 맡자 재재도 곁에 다가와 누웠다.
서준이 나간 이후, 재재는 부쩍 조용해졌다. 현진에게 물었더니 중성화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고 했다.
그날 아침까지 서준이 입고 있던 옷을 얼굴에 비볐다. 제 행동이 우습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라던 그는 정말 빠르게 사라졌다. 차도, 휴대폰도 다 두고 사라졌다.
한참 울다가 집 밖으로 따라 나갔을 땐, 주변은 이미 깜깜한 겨울이었다. 쌓인 눈 때문에 남은 발자국조차 보이지 않았다.
가는 길이 너무 미끄럽진 않았을까. 후회하며 울었다. 보고 싶어 울었다.
종일 그의 방에서 울기만 했다. 혼자 남겨진 게 무섭고, 두려웠다.
그러기를 몇 날 며칠. 가까이 다가와 등을 돌리고 앉은 재재의 뒷모습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밥을 챙겨 주고, 물을 챙겨 주면서 일상을 이어 나가려고 노력했다.
다시 붓을 잡았다. 뉴스에서 나오는 소식들이 조금 잠잠해지고 나선 다시 여름 아틀리에에 출근했다. 직접 운전하는 것도 무서웠지만, 할 수 있었다.
밥을 먹고, 다용도실에서 직접 커피를 내려 마시고, 그림을 그리면서도 온통 서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걸 가능하게 한 사람이 모두 강서준이었으니까.
툭, 툭.
침대 아래에서 무언가를 톡톡 치는 소리가 들렸다. 재재가 무슨 장난이라도 하고 있단 생각에 따라 내려갔다.
“재재, 너 뭘 가지고 노는 거야?”
침대 아래로 손을 뻗어서 꺼낸 건, 서준이 갖고 있던 비상용 휴대폰이었다. 배터리가 없어 꺼져 있었다. 이걸 치고 논 모양이었다.
순간 혜수의 눈동자가 선연해지며 빛을 냈다. 휴대폰을 충전기에 연결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서 전원이 켜졌다. 최근까지 본인이 이용했던 터라 최근 통화 목록이 낯설진 않았다. 혜수는 연락처 화면을 밑으로 쭉 내렸다. 막상 쓸 때는 신경 쓰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저장되어 있는 이름들이 평범하지 않았다. 전부 다 암호명처럼 저장되어 있었다.
함부로 발신했다가 그가 위험에 처하는 건 아닐까 덜컥 겁났다. 고민하던 찰나 ‘Bach’라고 저장된 전화번호가 눈에 들어왔다.
바흐와 통화한 이력과 발신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11시, 새벽 2시 혹은 그 이상……. 노트북을 켜서 어림잡아 시차를 확인해 본 결과 어떤 확신이 들었다.
혜수는 다시 검색창에 바흐를 입력했다.
「Johann Sebastian Bach」
“요한.”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며 소름이 돋았다.
모로코에서 서준이 무전을 나누고, 때때로 통화하던 젊은 남자. 그의 이름이 요한이었다. 그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위험한 존재도 아니었다. 확실했다.
시차를 확인하고 다시 한번 망설였지만, 도저히 기다릴 수 없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 흐어억. 제발…… 준!! 그쪽은 아침이겠지만, 여긴 아직 새벽이거든요?
자다 일어난 듯 낮게 쉰 목소리였지만, 한껏 짜증을 냈다. 분명 익숙한 목소리였다.
― 왜 걸어 놓고 대답을 안 해요? 어? 이 전화기 잊어버렸다더니 언제 찾았어요?
“강서준 씨, 지금 어디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