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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접점-74화 (74/76)

[74화]

보다 못한 이언이 물티슈라도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비웠고, 여름이 환하게 웃었다.

“작가님, 작가님. 빨리 드세요!”

붓을 빼앗고, 나무젓가락을 건넸다. 붓이 빠진 모양 그대로 꾹 쥐고 있던 손을 펼쳐 뻗었지만, 젓가락을 들자마자 떨어뜨렸다.

“윽!”

짧은 비명과 함께 손을 품은 채, 몸을 숙였다.

“작가님!”

“뭐야, 왜 그래?”

“나도 모르겠어! 작가님이 갑자기 손을…….”

상황을 인지한 이언이 몸을 반으로 웅크리고 괴로워하는 혜수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꿈쩍도 하지 않아 결국 안고 있는 손을 억지로 빼냈다. 부들부들 경련하고, 곱아 버린 손.

처음 보는 참혹한 광경에 여름이 입을 가리며 경악했다.

“시간 지나면…… 괜찮아져, 만지지 마.”

혜수가 손 만지는 것에 혐오감이 깊은 걸 이언도 잘 알고 있었기에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이를 악물고, 혼자 주무르는 걸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왼손에는 못 보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놀란 두 사람이 굳은 사이, 혜수는 고통에 휜 손가락을 가누었다.

“죄송해요, 못 볼 꼴을 보였네요. 이제 괜찮아요.”

“못 볼 꼴이라뇨. 병원 안 가 봐도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네, 요즘 괜찮았는데…… 다시 그러네요. 전 배 안 고프니까 식사하세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혜수를 여름이 붙잡았다.

“안 돼요! 작가님 요즘 너무 무리하셨어요! 제대로 식사도 안 하시고, 쉬지도 않으셨잖아요.”

“여름이 말이 맞아. 너 지금 얼굴 엉망이야. 사춘기 애도 아니고…… 사람 걱정 그만 시켜. 앉아서 밥 먹어. 안 그러면 병원으로 끌고 갈 거니까.”

“엉망……이야?”

혜수가 제 얼굴을 만지며 걱정스레 물었다.

“넌 무슨 말을 그딴 식으로 해!”

“어! 엉망이야! 비쩍 마르고, 눈 밑은 시커멓고 해골 같아.”

“미, 미친! 엉망 아녜요, 작가님! 좀 말라서 그렇지, 여전히 예뻐요. 이거 드세요. 이 집 치즈김밥 진짜 맛있어요.”

놀란 여름이 이언의 등을 사정없이 내리치고, 들고 있던 젓가락으로 김밥 하나를 들어 혜수의 입 앞에 가져다 댔다. 주는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입을 열어 받아먹었다.

“하, 너 요새 잠도 제대로 안 자는 거지? 밖에 그 사람 차 있던데, 그 인간은 너 이러고 있는 거 알아?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무슨 소리야. 요즘 혜수 작가님이 직접 운전하고 다니시는데.”

“……설마, 너 그 남자랑 헤어졌니?”

“아하하! 이 신박하게 미친 놈! 내가 혜수 작가님 위로하라고 널 불렀지, 전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을 캐물으라고 부른 거 아닌데. 작가님, 정말 죄송해요.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아무것도 모르는 여름은 혜수가 우주와의 이별에 힘들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혜수는 변명도 해명도 하지 않았다. 대답 없이 김밥을 오물오물 씹고, 꿀꺽 삼켰다.

그러더니 그 눈에서 거짓말처럼 눈물이 샘솟기 시작했다. 눈가에 매달려 있던 무거운 눈물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마른 볼 위로 흘러내렸다.

하필 치즈김밥인 게 문제였다.

서로 다른 얘기를 하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두 사람은 혜수의 눈물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이혜수!”

“자, 작가님! 어떡해, 어떡하지?!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이 미친 이언아!!”

“얘 이 정도로 안 울거든?”

“사람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데 울지, 안 울고 배기겠냐고!”

“그만, 둘 다 그만…… 그만해요.”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어?”

“야! 너 그만해. 작가님, 오늘은 그냥 돌아가서 쉬시는 게 좋겠어요. 어차피 수업도 하나밖에 안 남았고, 제가 다 마무리할게요. 김이언! 네가 모셔다드려.”

가방까지 챙겨 준 여름의 배려로 아틀리에를 나왔지만 비척비척하는 걸음걸이가 도저히 운전을 할 수 있는 상태로 보이지 않았다. 이언이 운전석에 오르려는 혜수를 붙잡아 조수석에 태웠다.

“벨트 해.”

내비게이션에 입력된 ‘집’으로 목적지를 설정하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가는 내내 혜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슬픔 어린 정적을 참아 내던 이언이 일 얘기로 분위기를 바꿔 보려 했다.

“갤러리로 네 안부 묻는 연락이 많이 와. 너랑 전시회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고, 컬렉터들 때문에도 한번 보고 싶나 봐. 너만 괜찮으면 일정 잡아 볼게. 그림 보니까 다시 시작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던데.”

“응, 할 수 있어.”

“……잘됐네. 그럼 청춘이나 언덕 전시 중에 하나라도 참가해 주지 그래?”

“언덕도 전시회 하려고?”

이언이 팔 한쪽을 차창에 올리고 한 손으로 핸들을 잡는 모습에 혜수의 머릿속은 속절없이 다른 누군가를 떠올렸다. 티 낼 수 없었지만, 이 자리에 이언이 앉아 있는 게 불쾌해지기까지 했다.

“이사하기 전에 지하실에 쌓아 둔 것까지 싹 모아서, 청춘전이랑 같이 준비하느라 골치 아파. 그림 하나 기부해 주면 감사하게 받을게.”

뻔뻔한 요구에 혜수는 조금 웃을 수 있었다.

“은하 언니는 만나 봤어?”

“거의 매일 만나지. 어제 가 보니까 가마 설치까지 끝냈더라.”

“요새 제이 윤 불매 운동으로 난리던데…… 기분, 괜찮아?”

“자기가 안 좋으면 뭐 어쩌겠니. 이 기회에 윤 회장님, 경영에서 물러나려고 하시는 것 같더라.”

“뭐?”

“뭐라니? 세뇌당한 피해자의 반응이니? 아니면 미운 정이라도 들었어?”

“그런 거 아니야.”

“그래, 제발 그러지 마. 그 마귀할멈, 더 털려도 모자라지 싶어. 수요일마다 불러서 무릎 꿇리고, 오라 가라 인형처럼 움직이게 한 것도 모자라 제 손자 스캔들에까지 이용하고……. 내가 그것만 생각하면 정은하를 몇 대 때려도 속이 안 풀려! 전에도 말했지? 그거 정신적 가해고, 폭력이야.”

“……내 잘못도 있지.”

“네 죄책감 이용한 게 제일 못된 거라고! 어휴, 됐다. 아무튼 가진 게 워낙 많은 사람이라 그 정도 추문으로 꿈쩍도 안 하겠지. 이참에 너나 나나 정 남매나 할멈이나 다 잊고 새로 시작하자. 맨 꼭대기 저 집이야?”

“응.”

“옛날엔 여기도 엄청 시골이었는데, 완전 부촌이 됐네.”

“부촌?”

“몰랐어? 여기 집값 장난 아니야. 내가 안 그래도 공장 겸 작업실 하나 만들려고 서울 근교 알아보다가 이 근처도 봤는데, 땅값이 어마어마하게 올라서……. 근데 넌 어떻게 여기 있지?”

이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집 앞에 차가 멈췄지만, 혜수는 내리지 못했다. 허벅지 위에 올려 뒀던 손을 내려다봤다. 왼손의 반지를 한참 만지작거리다 눈을 질끈 감아 봤지만, 또 눈물이 흘렀다.

“너 진짜…… 괜찮아?”

혜수는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 괜찮아. 안 괜찮은 것 같아. 그 사람 너무, 너무 보고 싶어.”

“그럼 보면 되잖아. 뭐가 문젠데! 은재 오빠란 놈이 너 싫다고 그랬어?”

“아니, 그래도 좋대. 근데 나까지…… 어떻게 그래?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욕심내.”

“이 답답아! 멍청아! 그게 너 때문에 생긴 사고였어?! 너도 피해자야! 죽은 사람들한테 부채 의식 가지고, 정 남매한테 붙잡혀서 이용당해 준 세월만 10년이야. 미안해하는 것도 그 정도 했으면 충분하다고! 그리고 그 사람, 너 지키려고 했어.”

얼마 전 서준이 은하를 찾아와서 부린 협박에 대해 알려 주니 혜수는 더 서럽게 울었다.

“으흑…….”

“너한테 오는 인연, 행운들 고마워할 줄도 알고, 욕심내면서 살아. 너 그럴 자격 있으니까.”

“그러려고 했는데……. 이번엔 정말, 그러려고 했는데…….”

“그만 울어 멍청아! 안 그래도 못생긴 얼굴, 더 엉망 되겠네.”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우는 법이 없었던 이혜수가 소리까지 내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이언의 마음도 일렁거렸다. 이성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다만 슬픔에 관한 동조였다.

지금까지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견디며 살아왔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언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고 혜수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붓고 나서야 이언을 보내 줬다. 그는 떠나는 택시 안에서도 한참을 걱정했지만, 혜수가 떠미는 바람에 그냥 갈 수밖에 없었다.

혜수는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동네 근처를 서성였다.

가끔 서준과 저녁 식사 후에 손잡고 산책하던 곳이었다. 거의 획일화된 집들 혹은 특별한 디자인의 주택을 바라보며 동네 한 바퀴를 다 도는데 이젠 그 일마저 너무 옛날처럼 느껴졌다.

같이 봤던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먹먹해질 정도였다. 또 울진 않았지만, 주먹으로 가슴을 쳐 내며 억지로 울음을 삼켜야 했다.

얼굴이 얼얼해질 때까지 걷다가 언덕의 꼭대기로 돌아가자 낯선 차 한 대가 집 앞에 서 있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누군지도 모르고, 위험한 줄도 모르고 그저 몸이 먼저 반응한 것 같았다.

대문을 열고, 복도를 지나 중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안경을 코 중간에 걸쳐 놓은 중년 남자가 어깨를 움찔거리며 소리쳤다.

“어이쿠!”

들고 있던 작은 드릴을 바닥에 떨구었다.

“누구……세요?”

바로 제 발밑에 떨어진 드릴을 혜수가 주워 주며 묻자,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인사했다.

“난 곽동원이라고 합니다.”

“……곽 소장님?”

“날 압니까?”

“도와주신다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주어도 붙이지 않은 말에 동원은 묘한 웃음을 띠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대로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그는 벽에 달라붙어 있던 도어 벨을 해체했다. 작은 상자에서 부품들을 꺼내고 능숙하게 선을 자르고, 새것과 이어 붙였다.

“허허, 그 망할 놈이 내 얘기도 하듭니까? 의외네. 아무튼, 주인 있는 집에 멋대로 들어와서 미안합니다. 이 시간이면 집에 없을 거라고 해서 이거 고쳐만 놓고 가려고 했는데 순 거짓부렁이었구먼. 그러니 내 탓은 하지 말고, 강서준 미워하세요.”

“혹시 서준 씨가 언제…… 언제 연락했어요?”

“일주일쯤 됐지요. 갑자기 전화 와서는 집에 도어 벨 카메라가 고장 났으니 꼭 좀 고쳐 달라고 하더이다. 직접 하라고 했더니 자기는 미국으로 출장 간다고 제발 좀 부탁한다고. 그 후로 연락이 안 되던데, 혹시 둘이 무슨 일 있었습니까?”

“……휴대폰을 두고 갔어요.”

“쯧쯧, 정신 나간 놈.”

미국으로 돌아갔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직접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확실히 전해 듣고 나니 발밑이 푹 꺼지는 것 같았다. 행여나 또 위험한 일을 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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