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회장실 앞에는 비서진들과 직원 몇몇이 비상근무 중이었다. 그들이 파티션 너머로 서준을 힐끗 쳐다봤다.
긴 복도를 지나자 짙은 나무 문이 나타났다. 고급스러운 색감에 휘황찬란한 조각들이 일일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기다리지 않고 제 손으로 문을 열었다.
휘익!
부지불식간, 무언가가 그의 얼굴 바로 옆을 날카롭게 지나갔다. 쇠붙이가 부딪히는 것 같은 귀 아픈 소리가 나더니 이내 벽에 맞아 깨져 버렸다.
형체 없이 바닥에 떨어진 건, 유리컵이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틀지 않았다면 분명 크게 다쳤을 것이다. 바닥에 흩뿌려진 조각들을 보고, 서준은 제집 거실의 처참해진 풍경과 혜수의 상처를 떠올렸다.
“회장님!”
뒤따라 들어오던 황 비서가 놀라 팔을 휘저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저놈을 데리고 들어와!!”
벌어진 상황에 이성을 잃은 모양이었다.
바닥이 울릴 정도의 큰 호통에 이제 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어린 날의 공포가 찬찬히 올라왔다. 그런데도 그의 발걸음은 멈출 줄 몰랐다.
“제 집에서 그런 것도 모자라셨나 봐요. 여전하시네요.”
은은한 천장의 조명, 직사각형의 긴 테이블과 여섯 개의 고급 브랜드 소파. 그 뒤로 윤 회장이 앉아 있는 책상은 권위 의식마저 느껴질 정도로 무거워 보였다. 번쩍거리는 대리석의 바닥, 색이 요란하고 진한 그림 두 점, 하다못해 화분마저도 고급스러웠다.
“너 이 새끼…….”
어느새 윤 회장 코앞까지 다가간 서준이 들고 있던 서류 더미를 책상 위로 던졌다.
“선물입니다.”
당황하여 뒤에서 구경만 하던 황 비서가 얼른 다가와 그것을 살폈다. 대각선으로 빠르게 읽어 내리며 내용을 파악하던 그가 숨기지 못하고 개탄했다.
“도련님,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황 비서의 반응에 윤 회장이 직접 서류를 빼앗아 읽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준비한 건지 수년도 지난 내용마저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확실한 증거를 기반으로 한 ‘제이 윤’ 기업의 실상이었다.
서준은 가장 가까이 있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광고 수수료 차별에 권리금 작업, 뭐 이정도야 제이 윤이랑 계약 맺은 가맹점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일 거고. 재계약할 때마다 인테리어 비용 부풀리는 것도 있네요. 가만히 있어도 제보가 들어와요. 어디서부터 건드릴까 고민될 정도로.”
죽을 줄만 알았던 놈이 예고 없이 들어오자마자 목을 무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상황. 집과 이혜수 때문에 열받았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준비된 물건을 내놓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반질반질한 얼굴로 찾아와서 사람 속 뒤집어 놓는 걸 보아하니 네놈 새끼도 결국 네 아비랑 다를 바가 없구나.”
“저야 다를 바 없죠. 제 아버지 아들이니까. 그러는 외할머니는요? 아버지께 못 배워 먹은 더럽고, 천박한 깡패 새끼라고 욕하시더니 지금 돌아가는 꼴을 좀 보세요.”
힘주어 부르는 호칭에 윤 회장은 책상을 내리치며 일어났다.
쾅!!
안으로, 밖으로 일이 터지는 까닭에 화를 참는 게 힘들었다. 화풀이할 상대가 없어졌다는 것 또한 크게 한몫하는 것 같았다.
“상놈의 새끼가!!”
명패를 들어 올렸지만, 옆에 있던 황 비서가 다급히 만류했다.
“회장님, 진정하세요. 일만 키우는 꼴이 됩니다! 도련님도 그만하십시오! 아무리 과거가 있다 한들, 외할머님이십니다.”
차갑게 조소를 띤 얼굴이 순식간에 사나워졌다.
“……네, 맞죠. 과거죠.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묻어 두려고 했어요. 그러게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건드리셨어요.”
윤 회장은 첫째 딸을 많이 아꼈다. 결혼하겠다고 데리고 온 사위가 보잘것없고, 제 배경을 떠올리게 한다는 사실을 잠자코 받아들이지 못했다.
기를 쓰고 반대하던 윤 회장은 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막내딸도 집을 나간 마당에 큰딸까지 잃을 순 없었다.
대신 자기 자신을 ‘죄 많은 사람’이라고 하던 형도를 오랜 세월 괴롭혔다. 폭력배로 먹고살며, 범죄 이력까지 있었다. 영주를 만나 개과천선했으나 그에겐 ‘서준’이라는 새빨간 핏덩이까지 있었으니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자식을 생각하고, 잃은 내 마음이 어떤지 네까짓 게 알 턱이 있냐?”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런 자식이 되고 싶은 생각 역시 추호도 없습니다. 아마 그래서 어머니도 외할머님과 인연을 끊은 거 아닐까요? 오죽하면 죽어서도 찾아오지 말라고 하셨을까.”
윤 회장은 아버지인 강형도에게 경영 수업을 핑계로 장사도 안 되는 상권에 가게를 짓게 하고, 무분별하게 재료를 보내면서 성공하라고 강요했다. 당연히 수익이 날 리 없었고, 개인 명의로 된 빚은 늘어났다.
매출을 확인할 때마다 찾아왔다. 강형도는 무릎을 꿇고 앉아 어린 서준이 보는 앞에서 뺨을 맞았다. 얼굴에 침까지 뱉었다.
물리적인 힘이 아닌 정신적인 폭력으로 사람이 무너지는 게 가능하다고, 아주 어려서부터 알게 됐다. 혜수에게 한 짓도 결국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서준 도련님!”
“제가 틀린 말 했습니까?”
윤 회장이 끝끝내 가족으로 받아 줄 거라는 희망과 사랑하는 여자를 위한다는 이유만으로 버티려 했다. 노력했으나, 대나무처럼 단단하고 꼿꼿하던 강형도의 자존감이 부러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어머니인 영주가 모든 사실을 알아차린 건, 서준이 교복을 입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망한 식당에서 목을 매려는 그를 발견하고 윤 회장의 만행을 알아차렸다.
“네놈이 죽었어야 하는데, 우리 은재가…… 내 딸 새끼가 죽을 게 아니라, 네가 죽었어야 한다고!!”
가족과의 인연을 끊었지만, 윤 회장은 은재만큼은 놓아줄 수 없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이제 더는 겁이 안 나네요.”
서준을 벌레 보듯 하는 눈은 변함없었다.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늙어 버린 여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던 시기도 있었다. 혜수가 아니었다면, 죽을 때까지 완벽한 타인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선물로 드린 건, 제가 건드리지 않아도 조만간 여기저기서 찌르다 보면 터지겠더라고요. 각오하셔야 됩니다. 비서님은 혈압 약 잘 챙겨 드리고.”
쾅!!
윤 회장이 책상을 내리쳤다.
“너, 이 새끼…….”
“하나 더 드릴까요? 조사하다 보니까 원재료 회사랑 제조업체 간에 SNPY라는 싱가포르 소재 계열사가 하나 있더라고요. 어쩜 그리 허술하세요? 정우주나 정은하나 누굴 보고 컸는지, 알 것 같아요.”
분노가 어려 있던 눈빛에서 당혹함을 발견한 건, 아주 찰나였다.
“그 회사가 중간 개입 한 8년 사이 생긴 이익만 134억 원, 그 출처는 가맹점주들 주머니. 아, 이건 비서진 측에서도 아직 모르는 일이겠네. 그렇죠, 황 비서님.”
자격지심이 깔려 있긴 하나 늘 평화로웠고, 성공의 냄새로 가득했던 사무실은 작정한 강서준의 무대나 다름없었다. 완벽한 복수극에 자리와 정신을 빼앗긴 두 사람은 평정심을 잃었다.
“회, 회장님…….”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자리에서 일어난 서준이 도심이 한눈에 들어오는 창가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혐오하는 눈이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윤 회장의 뒤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그들 쪽으로 돌리고 웃었다.
가게 구석에 숨어서 제 아비가 맞는 걸 바라만 보던 겁먹은 아이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청년이 된 남자의 구둣발 소리가 무거웠다.
가까이 다가온 그는 위협적이었다.
책상 아래로 쥐고 있던 윤 회장의 주먹이 분노로 마구 떨렸다. 혹시 모를 사태에 옆에서 잔뜩 긴장하던 황 비서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책상 위의 명패를 뒤집었다.
“최대한 빨리 자수해서 광명 찾으시고 이혜수랑 저, 두 번 다시 건드리지 마세요. 간단하죠?”
“네가…… 결국, 네가 결국!! 네 가족 죽이고 혼자 살아남은 그년이랑!! 붙어먹기라도 하겠다는 게냐?!”
서준의 미소가 살벌해졌다.
“선물이 부족하다고 느껴지셨나 봅니다. 그럴 줄 알고 우주나 은하에 관해서도 준비한 게 많습니다. 조만간 다 보내 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제가 정신 못 차리시는 우리 외할머니 드리려고 꽤 오래 준비했거든요.”
이미 그들의 목을 베어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
‘여름 아틀리에’의 한구석, 수강생들의 그림을 말릴 수 있는 건조실 옆에는 작은 작업실 겸 수업 준비실이 있다. 가벽을 세워 임시로 만든 공간이라 온풍기 바람이 닿지 않았다.
더운 건 참을 수 있어도 추운 건 절대 싫다는 여름을 빼고, 지금은 혜수가 거의 독차지하고 있었다.
“작가님, 저희 점심…….”
40호 캔버스에 푸르른 색을 촘촘하게 그려 내는 뒷모습에 여름이 제 입술을 얼른 막았다. 적당히 덮인 파란색, 아름답지만 보고 있으면 깊은 심연을 보는 것처럼 무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도대체 그 의미를 짐작하기 힘들었지만, 무척이나 슬픈 모습이었다.
일주일 내내 저 상태였다. 정우주 배우와 결별 기사가 나온 이후, 맡은 수업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틀어박혀서 그림만 그렸다.
슬슬 걱정되는 수준이었지만, 도저히 점심 먹자고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슬금슬금 뒷걸음쳐 나온 여름이 혼자 나오자 테이블 위에서 도시락을 까던 이언이 물었다. 혜수의 상태가 걱정되어 여름이 부른 참이었다.
“이혜수 데리고 나오라니까 왜 혼자 나와?”
“어후, 난 못 하겠어. 도저히 말을 못 걸겠어. 분위기가 너무…… 슬프고, 무서워.”
“하아.”
나무젓가락을 까서 제대로 세팅을 마친 그가 여름을 대신해 안으로 들어갔다. 시퍼런 그림에 압도당한 이언이 잠시 말을 잊었다.
“이혜수.”
“……언제 왔어?”
고개를 힐끔 돌려 잠긴 목소리로 물을 뿐, 일어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좀 전에. 밥 먹자. 김밥 사 왔어.”
“생각 없어.”
“너 요새 계속 굶었다며.”
“안 죽어.”
자기만의 세계에 완벽하게 빠진 이혜수는 낯설다. 저 상태를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이언은 가까이 다가가 억지로 붙잡아 일으켰다.
“여름이가 걱정해서 죽어!”
결국 작업실 밖으로 밀려 나온 혜수의 손엔 파란색 물감이 덕지덕지 묻은 붓이 여전히 들려 있었다. 손과 팔, 옷에도 온통 파란색이 묻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