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
긴 회상에 허덕이다 깨어나자 다시 현실이었다.
정원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어느새 눈이 내리고 있었다. 혐오하는 겨울. 아버지, 은재와 그 가족들……. 혜수가 사랑하는 모두가 이 계절에 사라졌다.
윤 회장에게 큰소리쳤다. 얼빠진 얼굴을 보고 내쫓는 데까지 성공했지만,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열이 오르고, 손발이 저리며 머리가 아팠다.
아름다운 집이 한눈에 들어오는 정원 가운데에 앉아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자 아깐 당당하게 털어 냈던 부채 의식이 흘러 들어와 이혜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가끔 그가 혼자서 읊조리던 말들이 퍼즐처럼 자리를 맞춰 찾아갔다. 겨울을 싫어한다던, 도망쳤다던, 윤 회장과 정우주, 정은하의 전시회, 가족이 없다고 했던, 될 수 있으면 기억하지 말라고 했던…….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
“다 알면서…….”
그에게서 전부를 뺏어 갔다는 죄책감과 동시에 드는 배신감에 몸의 열이 내렸다 올랐다 반복했다.
맨발로, 옷이 젖는지도 모르고 그러고 있는데 그 사람이 급하게 달려왔다. 그날처럼 위아래로 검은색 옷을 입은 서준이 제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혜수.”
왜 몰랐을까. 왜 여태 눈치채지 못했을까. 어깨를 잡는 커다란 손에 고개를 들었다. 소용돌이치는 감정이 몸 밖으로 튀어나왔다.
“왜 말 안 했어요? 왜…… 진작 말을 안 했어? 왜? 왜 내가 그 사람한테 듣게 만들어, 왜!!”
기어코 터져 버린 울음이 속절없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너 이럴까 봐. 이럴 게 뻔한데, 내가 어떻게 얘기해.”
창백하게 언 얼굴을 보며 그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답했지만 혜수는 돌연 바닥에 쓰러져 납작 엎드렸다. 그러곤 사과하기 시작했다. 서준이 생각했던 최악의 결말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정말…… 정말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많은 눈이 내리면서 조용했던 주변이 훨씬 고요해졌다. 들리는 거라곤 혜수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얇은 옷차림으로 눈이 쌓인 잔디 바닥 위에 엎드려 그녀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울부짖으며 쉽게 일어나지 못하는 혜수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억지로 안아 올렸다. 괴로워하며 바동거렸지만 서준은 얼어붙은 몸을 꽉 붙잡았다.
집 안에 들어서서야 힘이 빠졌는지 가만히 안겨 왔다. 그제야 품 안의 몸이 덜덜 떨기 시작했다. 밭은 숨을 내뱉더니 입술은 파랗게 질렸고, 눈동자가 점점 흐릿해졌다.
“혜수야…….”
대체 밖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있었는지 온몸이 차가웠다. 피가 돌지 않는 것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불을 덮어 주고, 방 안의 온도를 높였다. 따뜻한 수건으로 작은 손과 정원을 맨발로 돌아다닌 탓에 더러워진 발도 닦아 줬다.
이불을 다시 덮어 주며 얼굴을 살폈다. 얼어붙었던 피부가 온기에 놀랐는지 붉게 상기됐다. 이마의 찰과상은 더더욱 빨개졌다. 소독하고, 약을 발라 줬다.
“……차라리 네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으면 좋겠다.”
이루어질 리 없는 소망을 중얼거리고, 아직도 내리는 눈을 보다가 곁에서 잠들었다.
***
떠지지 않는 눈꺼풀이 무겁고 따가웠다. 눈을 뜨는 게 힘들고, 무서웠다. 누가 묶어 놓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뭔가 짓누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혜수가 겨우 팔 한쪽을 빼내 눈을 비볐다. 어두웠지만, 익숙한 천장. 은재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지었다는 아름답고, 예쁜 집은 그대로였다. 몇 번 눈을 끔뻑이다가 몸을 일으켰다.
바로 옆에 서준이 침대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그의 손이 제 다리 위에 올라와 있어서 내려갈 순 없었다. 옆모습을 보고 있자니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혜수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매만졌다.
서준은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났다.
“일어났어? 몸은?”
“……언제부터예요?”
“이것부터 마셔.”
처연한 시선, 떨리는 입가를 본 서준은 옆에 있던 텀블러부터 건넸다.
팔을 뻗는데 손이 굳어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 그걸 알아차리곤 서준이 혜수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입 앞까지 컵을 들이대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입술을 벌리자, 컵을 천천히 기울이며 직접 먹여 주었다.
달콤하고 따뜻한 차가 입안으로 들어오니 건조했던 목과 몸이 녹는 느낌이었다.
그의 손 위로 투명한 액체가 두어 방울 떨어졌다. 잠깐 움직임이 멎었다가 계속됐다.
“그냥 사고였어. 네 잘못 아닌 거 알잖아.”
서준의 말에도 혜수가 젖은 눈으로 고개를 저으며 이제 와 소용없는 후회를 부르짖으며 단호하게 부정했다.
“내가, 내가 정신 차리고 일어났으면…….”
터져 나오는 울음을 꿀꺽 삼켜 봤지만, 다시 터진 눈물은 뚝뚝 떨어졌다. 서준이 손끝으로 눈가를 닦아 주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공범일까.”
혜수가 우는 얼굴을 가리며 흐느끼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너도 그만해.”
한참 더 울었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내고, 손바닥으로 눈을 꾹 누르고 한참이나 있어도 이불을 적셨다. 서준은 그런 혜수를 껴안았다.
“그냥 처음부터 말해 주지 그랬어요. 너무, 너무 아파……. 너무…….”
“말했으면, 우리가 사이좋게 손잡고 죽은 사람들 추모라도 했을까.”
“흐, 윽…….”
서준은 혜수의 손 한쪽을 억지로 당겨 제 얼굴에 올려놨다. 그렇게 한참 온기를 확인하다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나는 네가 살아 줘서 정말 고마웠어. 그러니까 죄책감으로 사는 거, 그만하자. 앞으로 그만 미안해하고…… 나랑 제대로 살자, 혜수야. 제발.”
한참 끅끅거리며 울음을 막아 내던 혜수가 그의 몸을 밀었다. 젖은 얼굴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못 하겠어요.”
굳은 몸을 억지로 움직여 침대 밑으로 발을 내렸다. 여전히 눈물은 뚝뚝 떨어졌다.
옷장 구석에 둔 짐 가방을 꺼내 열었다. 서준이 얼른 달려가 그 가방을 빼앗았다.
“나보고 어떡하라고! 여기서 염치없이 당신이랑 살아요? 은재랑 부모님 생각하면서…… 여기서 내가 살아? 그게 돼? 그게 되냐고?!”
결코 보고 싶지 않았던 현실에 서준은 눈을 꾹 감고, 울음을 삼켰다.
“내가 나갈게.”
“싫어. 싫어요. 내가 나갈 거예요.”
“어떻게 이렇게 날 쉽게 포기해?”
“놔!”
목이 아플 정도로 소리쳤지만, 그의 힘과 고집에 챙기려던 옷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가 나갈 테니까, 네가 여기 있어. 난 너랑 못 끝내.”
“그런 게 말이 돼요?!”
울부짖음에도 그는 모든 일을 예상한 사람처럼 침착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을 꽤 오랫동안 준비해 왔을지도 모른다고, 혜수는 생각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어디 가지 말고…… 내가 아는 곳에 있어, 제발. 잠깐 떨어져서 시간을 좀 갖자. 연락 안 할게.”
덤덤하게 말했지만, 서준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혜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
― 퇴근 시간, 실시간 핫 키워드! 바로 1위부터 보겠습니다. 조금 전에 ‘직원 교육 클래스’라는 동영상이 올라오며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는데요. 영상부터 확인하시죠.
모 기업의 교육실, 한 남성이 직원들을 일렬로 세워 놓습니다. 차례대로 뺨을 때리고 그것도 모자라 목을 조르고 찹니다. 피해자들이 휘청거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폭행은 한참이나 이어집니다.
동영상 속 남성은 다수의 프랜차이즈 회사인 ‘제이 윤’ 기업의 상무 윤장욱 씨로 밝혀졌습니다. 윤 상무는 창업자 윤진영 회장의 사촌으로 해외 시장 진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핵심 경영자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작년 대비 18.4%의 매출 신장을 이루며 기적적인 행보를 보였던 대표적 자수성가형 기업이지만, 가족 경영 실태가 수면 위로 드러나며 비난과 질타를 받고 있습니다. 이르게도 불매 운동까지 시작됐지만, 제이 윤은 아직 조사 중이라는 입장만 밝히고 있습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뉴스를 확인한 서준의 입매가 한쪽으로 올라갔지만, 붉게 충혈된 눈에선 행복이란 1g도 느껴지지 않았다.
큰 사거리로 나와 급하게 차를 돌려 유턴했다.
채널을 바꿔도 모두 제이 윤 기업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상황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빠르게 커졌다. 폭행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는 제보와 더불어 가맹점주에 대한 갑질까지 폭로됐다.
서준이 차를 세운 곳은 제이 윤 본사 앞이었다.
성공 불패의 신화를 이룬 기업답게 본사 건물의 위상이 대단했다. 언론에서는 윤 회장을 바닥부터 시작한 진정한 자수성가의 대모로 칭찬했지만, 그 집안의 시작은 인천에서 시작한 불법적인 사업이었다.
윤진영은 그 배경을 부끄러워했다. 돈도 명예나 권력도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국 출신에 발목 잡혔다. 제가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없었다. 그 한계를 한탄하며 철저하게 과거를 지우고, 제 이름만 남겨 둔 게 지금에 이르렀다. 그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회사 1층의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회사 분위기 때문에 한층 더 예민해져 있던 젊은 경호원들이 그를 막아서고, 신분을 확인했다. 자기들과 비슷한 몸집과 당당한 남자의 태도에 한껏 긴장했다.
반면 서준은 그들과 대치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말했다.
“회장님 직속 황 비서님에게 강서준이라고 하면 알 겁니다. 돌아가라고 하면 남은 폭탄까지 기자들한테 던지겠다고 전해 주시고요.”
얼마 지나지 않아 로비까지 직접 마중을 나온 황 비서가 서준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도련님!”
로비에선 몇몇 기자들과 직원들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고, 분위기는 어두웠다. 이목을 걱정하며 속삭이듯 소리쳤지만, 서준은 환하게 웃으며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오랜만이네요.”
황 비서는 서준의 팔을 잡고, 곧바로 승강기로 이끌었다. 건물이 대단하다며 칭찬하는 얼굴엔 조소가 만연했다. 순순히 끌려 줬지만, 이내 팔을 뿌리치며 입고 있던 옷을 정리했다.
둘만 남게 되자, 황 비서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아,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저도요. 집 안을 아주 엉망으로 만들어 놓으셨더군요.”
“사람 보내겠습니다. 기분은 알겠지만, 지금 이 난리 통에 꼭 이러셔야 하겠습니까?”
“모르셨구나. 지금 이 난리 통, 제가 만든 건데.”
“……예?!”
“회사 상사한테 맞은 것도 서러운데 사직시켰으니, 얼마나 억울했겠어요?”
피해자는 현진의 이름으로 낸 가맹점에서 이미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대체…… 도련님!”
서준은 비웃으며 승강기에서 내려 길을 아는 사람처럼 앞서갔다.
살벌한 얼굴을 보고 황 비서는 흘러내리는 땀을 손수건으로 꾹꾹 눌러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