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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접점-71화 (71/76)

[71화]

절대 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초대하지 않은 손님은 도저히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서준을 제외하고 이 집을 아는 건 우주나, 수의사님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저런 식으로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누군지 몰라도 돌아가 주길 바라며 최대한 느리게 걸어갔지만, 검은색 현관문 앞에선 여전히 인기척이 느껴졌다. 무서웠다.

쾅, 쾅!!

“이혜수 씨! 이 작가님!”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는 나이 든 남자의 목소리에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한참 망설이던 혜수는 무거운 문을 기어코 열었다.

문을 열자, 그 앞엔 안경을 낀 작은 남자와 검은색 정장을 제대로 갖춰 입은 윤 회장이 하얀 머리를 넘기고 서 있었다. 저승사자 같은 모습으로.

혜수는 그제야 불안의 원인을 확신했다.

“……회장님.”

허락받지도 않은 발들이 소중한 공간을 침범했다. 언젠가 아니, 조만간 다시 마주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곳에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다.

순식간에 거실까지 도달한 윤 회장이 집 여기저기를 둘러봤다.

“여기까지 직접 오실 줄은 몰랐네요.”

“나도 네가 여기에 있을 거라곤 꿈에도 몰랐단다.”

“오라고 하셨으면…….”

“은재 대신도 싫다고 하고, 내 딸 대신도 싫다고 하고, 우주랑도 그렇게 된 마당에 내가 무슨 명목으로 너를 오라 가라 한단 말이냐.”

“오라 가라 하지 못하시면 함부로 찾아오는 것도 하지 마셨어야죠.”

다부지다 못해 맹랑한 혜수의 태도에 윤 회장이 끅끅 소리 내어 웃더니 소파에 풀썩 소리 내며 앉았다.

“고개 빳빳이 들고 당당한 거 보아하니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구나. 황 비서, 지금 이 집, 누구 명의로 되어 있는 거지?”

“강서준 도련님 명의로 되어 있습니다.”

“못 배워 처먹고, 건방진 게 제 아비를 쏙 닮았군. 다 죽어 가는 병신 새끼가 그래도 제 몫은 뺏기지 않고 확실하게 쥐고 있었구나.”

“예, 착실하게 상속됐습니다. 그 규모도 30배 이상은 커져서 자산이 어마어마합니다. 아마 옆에서 곽 소장이 돕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너구리 같은 새끼.”

그들이 나누는 대화와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혜수의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도련님, 도련님, 도련님……. 황 비서가 우주를 부를 때나 쓰는 호칭이었다.

상황을 따라가려고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불안함은 상상력을 상쇄했다.

“이혜수, 넌 네가 누구 덕에 살아 숨 쉬고, 지금 그 지경까지 올라갔다고 생각하지? 개도 은혜를 알아!! 그런데 네가 감히 우주를 버려?!”

혜수의 대답에 윤 회장은 역정을 내며 들고 있던 가방을 던졌다.

팍!

이마에 정통으로 맞아 떨어졌다. 가죽으로 된 작은 가방은 얇은 피부에 상처를 내기에 충분했다. 혜수가 맺힌 피를 손으로 닦아 내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나가 주세요.”

“……나가? 나가라고?! 네까짓 게 감히 누구한테 나가라고 지랄하는 거냐! 아둔하고, 멍청한 년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폭발한 윤 회장은 거실에 놓여 있던 물건들을 벽과 바닥에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벽난로 위에 놓인 술, 테이블 위의 잡지와 컵 두 개가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졌다. 종국엔 무언가 박살 나기도 했다.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던 혜수가 옆에 다가가서 소리치고, 윤 회장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만하세요!”

“네가 감히!! 이게 다 누구 건 줄 알고 탐을 내?!”

“아까부터…… 아까부터 도대체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그래, 네년이 양심이 있다면 다 알고서 이러진 못했겠지. 은혜도 모르고 네년이 감히…… 우주를 내팽개치진 못했겠지!! 하필이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서준이랑, 내 앞에서, 나를 능멸하면서 내 딸 집에서!!”

“제발, 제발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세요.”

“황 비서!!”

뒤에 서서 대기하던 황 비서가 제 휴대폰을 혜수에게 건넸다. 사진첩의 낯선 가족사진. 아직 어리지만 확실히 은재였고, 그 부모님이었다. 그리고 곁에 있는 어린 남자는…….

“강서준이다.”

불이 꺼지듯 반짝이던 혜수의 안광이 순식간에 그무러졌다.

“오빠가 있다고 말했을 텐데, 기억 안 나니? 하기야 배도 다른 데다가 가족들 다 죽을 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무심한 놈이 무슨 소용일꼬. 없는 제 아비 무시했다고, 일찌감치 다 버리고 나가 살았으니.”

“도대체 무슨 말씀을…….”

“혜수야, 이 어리석은 년아! 양심이 있으면 이러고 있음 안 되는 거라고! 그 가족들 덕분에 빌어먹은 목숨으로 연명하면서 네가 어떻게 이러는 게야?”

윤 회장이 이죽거릴 때마다 빨간 립스틱 묻은 입술이 움찔움찔 움직였다.

화가 묻어 있던 혜수의 얼굴은 따뜻하고 잔인한 기억을 되살리며 점점 창백해졌다.

“거기다 이 집은 내 딸이, 은재 엄마가 마지막으로 지은 집이다. 그런 곳에서 감히…… 감히 이것들이 쌍으로!”

윤 회장이 비명을 지르며 테이블을 뒤집어엎었다. 유리로 된 무거운 테이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혜수의 옆으로 산산이 조각나며 떨어졌다.

“회장님, 더는 흥분하지 마십시오!”

황 비서가 달려들어 팔을 붙잡고, 말렸다.

헉헉 소리를 내며 흥분하던 윤 회장이 유리가 튀었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황 비서는 잽싸게 가방에서 노란색 약통을 꺼내 건네주었다. 윤 회장이 한 알을 입에 털어 넣고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듣고도 설마 했다. 아무렴. 네가 아무리 없이 살아도 주제도 알고, 양심이 있는 앤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서준이랑 만난다는 게 말이 되냐? 몰랐으니 그랬겠지. 그렇지?”

“……그래서요?”

혜수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대답에 윤 회장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뭐야?”

“강서준 씨가 은재 가족이라는 거 알려 주시려고 이 야단을 떠셨어요?”

광기가 서린 것 같은 눈동자는 자신에게 더는 죄가 없음을 선언하듯 단호했고, 차가웠다.

“결국은 네가 미친 게냐? 눈이 먼 게야?!”

“네, 저 미쳤고, 눈도 멀었습니다. 그 사람이 은재 오빠고, 그분들 아들이라는 게 제가…… 제가 그 사람을 만나면 안 되는 이유가 됩니까?”

“기어코 실성했구나.”

“제가 죽였어요? 그 사람들이 저 때문에 죽었습니까? 제가 회장님한테 저만 살려 달라고 빌었습니까? 그게 아니면…… 저까지 죽어야 만족하시겠어요?”

***

건물을 팔아 현금화한다는 건,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사람과의 만남, 오가는 서류, 계약, 각종 신고 및 세금 납부……. 간단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끝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서준의 아버지인 형도가 조금씩 사 모은 건물들은 하나같이 그 금액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몸집이 커져 있었다. 투기가 아닐까 의심받을 정도였다.

건물 한 채를 통째로 양도세로 상납하며 정리했지만, 평생을 놀고먹어도 될 만큼의 금액이 그의 손에 떨어졌다. 아버지가 앞을 미리 내다본 걸까 했지만, 곽 소장은 순전히 운이라고 했다.

“그놈 자식, 그 정도로 머리 안 좋아. 그냥 멋도 모르고 무식하게 받거나 뺏은 거지.”

곽 소장의 인맥 덕분에 건물을 사는 사람들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빠른 판매가 목적이었기에 그들은 좋은 가격으로 부동산을 사들일 수 있었다. 그 절차가 복잡할 뿐이었다.

“감사해요, 아저씨.”

“아, 쪽팔리게스리 갑자기 뭔 인사야! 그나저나 너 진짜 이 돈으로 뭐 하려고 그러는지 말 안 할 거냐?”

“아버지, 남들 아프게 해서 번 돈이라고 자기 자산 부끄러워하셨어요.”

강형도는 영주를 만나기 전까지 비합법적인 일을 하며 살았다.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해서 번 돈이라 싹 다 정리해서 사회에 환원할 거라고 습관처럼 말하곤 했다.

가족들이 모두 죽고, 무엇 하나 책임지지 않고 도망만 다녔지만 뒤늦게나마 그 뜻을 이어 주고 싶은 게 이유였다.

서준은 트레일러에서 지내고 있을 모건의 가족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엘리스와 했던 계약이 제대로 이행됐을 리 없다는 그의 예상이 맞았다. 범법 행위에 연관된 죽음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보상 하나 없었다.

널따란 등을 퍽퍽 치는 곽 소장의 손길이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들은 어지간히도 사이좋은 부자지간처럼 보였다.

“진작 말하지, 원. 네 살길도 남겨 두어라! 얼른 좋은 여자 만나서 결혼도 해야지. 응?”

“그 좋은 여자가 혜수는 아니길 바라시는 거예요?”

팔자걸음으로 뚜벅뚜벅 앞서 걷던 그가 우뚝 멈춰 서더니 한숨을 팍 쉬며 허리춤에 양손을 올렸다. 잘못된 염색 때문에 하얀 머리가 황금빛으로 빛나는 것 같았다.

“그래! 솔직히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나는 네가 구김 없고, 아픔 없는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 밝고, 씩씩하고, 사랑받고 자란 그런 사람으로다 말이다.”

“아저씨가 우리 혜수를 아직 안 만나 봐서 그래요.”

“우, 우리 혜수? 아이고, 진짜. 전에 봤을 땐 애가 좀 우울해 보였단 말이야! 윤 회장 옆에서 기도 못 펴고 꾸벅꾸벅하는 꼬락서니가 영 별로였어.”

“꾸벅꾸벅하게 만든 윤 회장님이 문제겠죠.”

곽 소장이 입술을 비쭉 내밀더니 탐탁지 않아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랑 그만하고, 조만간 한번 데려오든가.”

“그럴게요.”

“정말?!”

이혜수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주변의 풍경이 달라졌다. 따뜻하게, 진하고, 아늑해졌다. 보고 싶었다. 한시라도 빨리 달려가 안고 싶었다.

“근데 너 아까부터 전화 울리는 거 아니냐?”

“제 거예요?”

“어떻게 늙은 사람보다 더 둔해!”

전 같으면 이런 진동을 놓칠 리가 없는데, 지나치게 평화로워진 탓에 신경이 느슨해졌을지도. 동원의 말에 코트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확인했다. 발신인은 반갑지 않은 정우주였다.

“아저씨, 저 통화 좀 하고 갈 테니까 먼저 들어가세요.”

“오늘 저녁 안 먹어? 소 먹는 거 아니었냐?!”

“나중에요.”

곽 소장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지며 사라졌고, 서준은 한참 지나도 끊어지지 않는 전화를 받았다.

― 형, 어디야.

“너한테 알려 줄 필요 없을 것 같은데.”

― 그건 맞는 말인데, 밖이면 이혜수한테 가 봐. 윤 회장님이…… 그 집으로 찾아간 것 같아. 황 비서님한테 연락이 왔는데 상황이 좀 심상치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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