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 접점-70화 (70/76)

[70화]

끝나자마자 혜수가 의자에 주저앉는 걸 본 서준은 기다렸다는 듯 아까 카페에서 사 온 케이크를 가져와 내밀었다.

“이런 건 언제 사 왔어요?”

“아까 커피 살 때.”

혜수가 딸기와 크림을 크게 떠서 한입 가득 물었다.

“음, 맛있다. 오늘 서준 씨 데려오길 정말 잘한 것 같아요. 맛있는 케이크도 먹고, 덕분에 재밌는 구경도 했네. 주말에 한가하면 또 와요. 응?”

“위기감 없다. 다른 여자가 남자 친구 번호를 물어보는데 어떻게 이렇게 여유로워?”

“근데 아까 그분, 정말 멋있지 않아요? 어떻게 그렇게 만나자마자 대담하게 표현하시지.”

“대담한 걸 좋아하는구나.”

“자꾸 은근슬쩍 만지는 건 변태 같거든요?”

사이좋게 케이크를 반쯤 먹어 치웠을 때, 테이블 위에 켜 놓은 노트북에서 메일 알람 소리가 들렸다. 크림이 묻은 포크를 내려놓고, 화면을 확인했다. 옆에 있던 서준이 그 출처를 힐끔 쳐다보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무슨 내용인데?”

“……언덕에서 저랑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메일이네요. 재정비 때문에 반년 동안 휴업도 하고 그러려나 봐요.”

“기분, 별로야?”

혜수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별로는 아닌데 좀 이상해요. 예상은 했어요. 3년 동안 결과물 하나 없는 작가를 붙잡고 있을 순 없으니까요. 이제 정말 혼자네.”

“그래도 메일만 보내 놓고 끝내는 건 좀 예의 없는 것 아닌가? 네 덕에 장사도 많이 하고, 돈도 벌었잖아.”

“……그걸 또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김이언 씨한테 네 습작 가져오면서 얘기 나눴어. 너한테 허락도 안 받고 저지른 짓도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얌전히 주겠다고 그러던데.”

“뭐, 그러긴 했죠. 그래도 막상 듣고 나니까 좀 충격이긴 하네.”

“차라리 잘됐어. 난 네가 혼자서 더 잘할 것 같아. 이참에 새로운 갤러리를 알아보거나, 공모전에 참가해 보는 게 어때? 은혜 말고, 진짜 네 이름으로.”

혜수가 활짝 웃으며 그의 입가에 묻은 생크림을 닦아 줬다.

“이제 정말 열심히 해야 해요.”

“할 거잖아.”

“응.”

어느새 마지막 수업 시간이 다가왔다. 세 시간으로 구성된 가장 긴 수업이었다.

“미리 구상해 오신 내용대로 스케치한 다음에 저한테 보여 주시면 천천히 도와드리겠습니다.”

네 커플, 총 여덟 명의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연필로 종이 위에 선을 긋는 소리만이 화실 안을 채웠다.

사랑하는 혹은 애정 있는 상대를 서로 바라보는 표정을 옆에서 직관한다는 건 심장이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사람을 그린다는 건, 결국 최소한의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행복하게 미소 짓거나 혹은 투덕거리며 수강생들은 스케치를 마쳤다. 채색을 앞두고 잠시 쉬는 시간, 사람들이 혜수의 뒷모습을 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표정이 좀 슬퍼 보이더라.”

“그래? 난 괜찮던데.”

“아니, 근데 뭘 그렇게 빨리 헤어졌지?”

“급 달아올랐다가 급 식었겠지. 자기는 헤어진 마당에 커플 프로필 수업이라니, 이상하다.”

“바람피웠나?”

수군거림의 내용과 시선의 이상함을 감지한 서준이 줄곧 무시하던 휴대폰을 확인했다. 때마침 현진이 메시지로 그에게 뉴스 기사 하나를 공유했다.

「국민 막내 삼촌 정우주, 미대 여신 이혜수 결별」

어느 한쪽도 시작한 적 없는 관계가 드디어 허무하게 끝이 났다.

서준이 혜수에게 다가가 기사를 보여 줬다. 혜수는 생각보다 빠르다고 중얼거렸지만, 당황하진 않았다. 수업은 별 탈 없이 마무리됐다.

일정이 모두 끝나고 나서야 여름 작가가 아틀리에로 돌아왔다. 오늘도 그냥 쉰 게 아니고 외부 일정을 모두 마치고 돌아와 정리까지 도와주는 참이었다. 정말 열정적이고, 부지런했다.

“혜수 작가님! 오늘도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나머지 정리는 제가 할게요!”

“그림만 건조실로 옮기면 될 것 같아요. 근데 혹시…… 기사 보셨어요?”

“아, 네? 네. 오면서…… 봤어요. 안 그래도 저 그것 때문에 걱정했는데, 수업하면서 불편한 일 있으셨던 건 아니죠?”

여름이 제 두 손을 기도하듯 잡고 걱정스레 물었다.

“아뇨. 근데 며칠 동안 이쪽으로 연락이 오거나, 기자들이 찾아올 수도 있어요.”

“어어!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내일부터 여동생도 와서 도와줄 건데, 유단자거든요!”

여차하면 물리력도 행사하겠다는 다짐을 참 밝은 얼굴로 얘기했다.

그 덕에 걱정을 조금 덜긴 했다.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일주일 정도는 제가 여기 없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아요.”

“휴, 다행이다.”

“네?”

“그만두겠다고 하실까 봐 조마조마했어요. 기사 보고 오면서 불안해서…… 이언이한테 엄청 징징거렸거든요. 쉬세요! 키트 제작 하고 나오기까지 얼마나 큰 도움 됐는데요. 한 번도 못 쉬시고 보강까지 해 주셨는데, 이참에 푹 쉬세요! 아, 그래도 친구분은 그림 그리고 싶으실 때마다 언제든지 나오세요!”

여름은 서준에게 한쪽 눈을 감고 찡긋거렸다.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틀리에를 나온 둘을 맞이하는 밤바람이 아직 찼다.

“오늘 이혜수한테 일이 많네. 괜찮아?”

“괜찮죠, 그럼. 그냥…… 분명 다 내 일인데 나만 빼고 돌아가는 기분이에요.”

“집에 가자.”

“응.”

#12. Fall in Blue

― 내가 사실 네 친아빠야!

극적인 대사와 함께 격정적이고, 요란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잠깐 잠들었던 서준이 눈을 번쩍 뜨고, 서둘러 노트북 화면을 닫았다. 영상은 일 때문에 켜 둔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자동으로 재생된 드라마 광고였다.

고양이의 발을 잡고 나란히 잠들어 있는 혜수를 보며 그는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겨울의 끄트머리에 다다랐지만, 서준의 발밑은 여전히 빙판이었다.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더는 미루지 않고, 이혜수에게 솔직하게 고백해야 했다. 숨기고 숨겼던 것들을 끄집어내야 할 때였다.

잠들면 혜수가 울다가 쓰러지는 장면이 반복됐다. 혹은 혜수가 매몰차게 떠나는데 그 뒷모습을 보면서도 잡지 못하는 무력한 모습이었다.

하루에 수백 번도 더 머릿속으로 연습하고 있었지만, 심장은 좀처럼 진정할 줄 몰랐다. 최악의 결말이 그를 신명 나게 괴롭혔다.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 주고 일어나 샤워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혜수나 자신이나 그 문제에서 멀어져 객관화할 수 있을 정도라고 여겼다. 이혜수가 다시 그림을 그리고, 주변에 그녀를 괴롭힐 수 있는 모든 문제를 정리한 후엔 어쩌면 자신 있게 밝힐 수 있겠단 자신감도 있었다.

다른 일은 몰라도 그 부분은, 철저한 계산 오류에 오만이었다.

저 여자가 우는 얼굴만 떠올리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혹여 자기를 떠날까 죽을 만큼 두려웠다.

짧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혜수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너 어제 늦게 잤지?”

“조금요, 작업하느라고……. 어디 가요?”

“곽 소장님 만나려고.”

“오늘도?”

“왜? 가지 말까?”

사실은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이상하게 불안했다. 일어나자마자 목뒤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서늘했고,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그런데도 말하지 못했다. 괜한 걱정으로 그가 해야 할 일을 미루게 하고 싶진 않았다.

“아뇨, 그런 의미가 아니라…… 꿈자리가 좀 사나웠어요. 운전 조심해요.”

하반신에 수건 하나만 걸친 서준이 곁에 다가와 앉았다.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췄다.

“오늘 마무리하고 오면 당분간은 쉴 수 있을 거야. 밤에 어디라도 다녀올까.”

“재재는요?”

“현진이보고 와 있으라고 하면 되지.”

“출근 불편하실 텐데…….”

“걔 엄청 성능 좋은 봉고차 있어. 거기 동물 병원 이름까지 새겨서 끌고 다녀. 가까운 바다라도 다녀오자.”

혜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더 자. 휴대폰 하나 두고 갈 테니까, 쓸 일 있으면 쓰고. 걸려 오는 전화는 궁금해도 받지 마.”

“받으면 잡아가요?”

“아마도.”

피식 웃은 혜수가 다시 비스듬히 침대에 누웠다. 남자가 준비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로션을 바르고, 머리를 깔끔하게 넘겼다. 주름이 제대로 잡힌 맞춤 슈트를 위아래로 챙겨 입는 게 새삼 멋있었다.

그러다 잠들었다. 서준이 뭐라고 중얼거리며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나갔는데,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잘 다녀오라는 인사도 하지 못했다. 잠결에도 붙잡고 싶었다.

“하아…….”

불안한 호흡을 내뱉으며 혜수가 일어났다.

다시 꾼 꿈도 또 악몽이었다. 방 안에 그가 뿌리고 나간 향수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지만, 오늘은 그것마저도 위안이 되질 못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다가오는 듯 계속 심장이 쿵쿵 뛰었다. 커피를 과도하게 마신 날처럼 비이성적이었다. 재재의 얼굴을 만져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고양이는 그 손이 귀찮았는지 귀를 앞발로 가려 버렸다,

“미안해, 재재.”

사료를 채워 주고, 물을 갈아 준 다음 본채로 향했다.

우주가 완전히 나간 이후엔 서준의 말대로 1층에 있는 방을 사용하고, 2층 방을 작업실로 꾸몄다. 그래 봤자 캔버스 몇 개를 짜 놓고, 재료를 둔 것뿐이었지만, 공간을 확실히 나눈 것만으로 집중이 잘되는 편이었다.

씻은 다음엔 늘 그가 준비해 둔 아침을 먹었고, 정리와 청소를 한 후에 위로 올라가 작업을 시작했다.

이젠 다시 붓을 잡고, 유화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물감 역시 더는 잿빛만 사용하지 않았다. 혜수가 처음 붓에 묻힌 색은 파란색이었다. 여전히 오랫동안 그릴 수 없지만, 전만큼 손이 아프진 않았다. 오래 그릴 수 없으면 여러 번 그렸고, 그리다 힘들면 절망하지 않고 휴식 시간을 가졌다.

중첩된 파란색의 붓질, 그 가운데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틈에서 묘한 불길함이 느껴졌다.

혜수는 붓을 내려놓았다.

도저히 집중할 수 없었다. 별채에 서준이 두고 간 휴대폰을 가지러 걸음을 옮겼다. 우주와의 결별 뉴스가 보도된 이후 또 휴대폰이 미친 듯이 울려서 제 건 꺼 두었기에 요즘 필요하면 늘 그의 휴대폰을 사용했다.

1층 거실까지 내려온 그때,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쾅, 쾅, 쾅!

우연일까. 뛰는 심장 박동과 동일한 속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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