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
“출근 안 한다니까 다행이긴 한데, 혼자 두고 가려니까 발이 안 떨어지네.”
“어디 가는데요?”
“곽 소장님이랑 약속 있어. 가맹점도 한 바퀴 돌고 와야 할 것 같고……. 올 때 뭐 사다 줄까?”
“음, 지난번에 먹었던 ‘윤이난밥’ 치즈김밥 진짜 맛있었어요.”
“알겠어. 올 때 꼭 사 올게.”
“요즘 소장님이랑 자주 만나는 것 같네요.”
“하던 일이 거의 마무리 단계라 내가 직접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소장님 질투해?”
“하, 네에. 제가 질투한다고 소장님께 꼭 전해 줘요. 서준 씨는 안 피곤해요?”
“나?”
괜히 물었다.
욕구를 다 채우고, 푹 자고 일어난 남자의 얼굴은 새삼 반짝거리고 있었다. 좋은 거라도 바른 것처럼 윤이 났고, 눈가에 그늘 하나 없었다.
“아녜요.”
“밥도 먹었고, 씻었으니까 들어가자마자 푹 자. 재재도 현진이가 다 챙겨 주고 출근했다니까 저녁까진 신경 안 써도 돼.”
“잘 다녀와요.”
“또 그냥 내리려고 그러네.”
다 큰 남자의 투정에 어휴, 하면서도 기꺼이 몸을 돌려 그의 뺨에 부드럽게 입을 맞춰 줬다. 차에서 내리려는데 다시 한번 손목을 붙잡았다.
“왜요, 또.”
“사랑해.”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 위로 입을 맞추고 그제야 놓아주었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혜수는 내렸다. 집 앞에서 익숙하게 유턴해 사라지는 차를 바라보다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후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벅차오르는 행복에 소리라도 지를 것 같아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고양감도 잠시, 현실은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듯 잊고 지내던 상처를 물고 왔다.
현관에 들어서자 익숙한 신발 한 켤레가 눈에 들어왔다. 유명 브랜드의 한정품으로 지금은 돈을 아무리 줘도 구하려야 구할 수 없는 모델이라고, 정우주가 자랑했었다.
“정우주?”
혜수가 신발을 던지듯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우주는 은색 캐리어 가방을 세워 놓고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몇 년간 늘 꼼꼼하게 분홍색 머리카락을 유지했던 그의 정수리에 까만 부분이 보였다.
“아…… 왔어? 조용히 짐만 가져가려고 했는데, 들켜 버렸네.”
“집으로 보내 달라고 그냥 연락하지.”
“내 짐 만지는 거 싫을 것 같아서. 그리고 나 이제 이사해서 거기 없어. 다 정리했거든.”
“다른 사람 집에서 사는 거야?”
따뜻한 겨울 햇살이 들어차는 집 안에 오랜 적막이 흘렀다.
“어? 어어. 나 드라마 촬영도 다 마무리했어.”
“벌써?”
“사정 있다고 말씀드리고, 비중 대폭 줄였거든.”
“왜?”
“치료 시작하면 어차피 기사 나갈 텐데, 그렇게라도 해야 최대한 피해가 덜 갈 것 같아서……. CG 작업을 하든, 잘라 내든 양이 적은 게 편하잖아. 뭐, 결국 나 믿고 써 준 사람들이 상처받는 건 똑같겠지만. 슬슬 준비해야지.”
“이번엔 제대로 치료받아.”
“응, 입원할 거야. 의도한 건 아니지만, 타이밍이 좋더라. 들어갔던 광고들도 계약 기간 끝났고, 조만간 소속사도 기간 만료야. 아, 조만간 결별 기사가 먼저 나갈 거야. 피해 없도록 최대한 막아는 볼게.”
“그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
“그건 그렇긴 한데…… 문제는 우리 윤 회장님이 어떻게 나올지는 상상조차 안 간다는 거야. 불똥 심하게 튈지도 모르니까 다니는 직장도 미리 대비해 둬.”
“나 일하는 거, 들었어?”
“솔이한테.”
“연락 닿았구나. 네 걱정 많이 하는 것 같았어.”
“다 들었어. 너 붙잡고 엉엉 울었는데, 뒤에 무서운 남자가 있었다고. 그 누나는 왜 그런 사람 만나냐고 그러더라.”
그 난리를 치고도 웃기니까 결국 웃음이 났다. 혜수는 피식거리며 본론을 꺼냈다.
“우주야, 사진 있잖아.”
“우리 윤 회장님 짓이라는 거 알아.”
“……아직 짐작이었는데.”
허심탄회한 고백에 정우주는 처음 보는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너한테 피해 가는 일 없도록 내가 잘할게.”
“그래.”
“혹시라도 내 걱정은 하지 마. 2년 정도 걸리지 않을까. 그 정도면……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까.”
“그래도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은 할 거야. 나도 그렇고, 아마 솔이 씨도 그중 하나겠지.”
우주는 민망한 듯 뒤통수를 긁으며 가방을 잡고 일어났다.
“가야겠다.”
“더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해.”
“혜수야.”
“응.”
“지금 행복해?”
“……불안할 정도로.”
“……나중에 무슨 일이 생겨도 지금 그 기분 잊지 마.”
“지난번에도 그렇고, 도대체 알 수 없는 소리만 하네.”
“그냥. 이젠 네가 항상 괜찮았으면 좋겠다고. 그러려면 우선 불청객인 내가 멀어지는 게 맞겠지? 마지막으로 악수하자.”
제대로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일방적으로 붙잡거나 붙잡히면서 끝난 게 아닌, 제대로 된 마무리였다.
***
‘여름 아틀리에’의 주말은 늘 쉴 틈 없이 돌아갔다.
혜수도 이제 혼자서 수업하는 게 제법 익숙해졌지만, 아직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 앞에만 서면 긴장되는 건 변함없었다.
그나마 오전 수업은 기존 수강생들의 보충 시간이었기에 익숙한 얼굴들을 보고 마음 편히 있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좀 달랐다.
평화로운 주말 오전 10시, 다들 제 그림 그리기에 집중하던 이들이 오늘은 유독 집중하지 못했다. 수강생들의 시선이 계속 한쪽으로 쏠렸다.
연신 흐트러지는 분위기를 보다 못한 혜수가 결국 구석에서 심각한 얼굴로 스케치북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나가서 커피라도 좀 마시고 올래요?”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그리니까 내가 다 피곤한 것 같아서.”
“커피 사 올게.”
서준이 재깍 자리를 비우자마자 수강생들이 하나둘 눈을 돌리며 질문을 시작했다.
“선생님, 저분은 누구시죠?”
“새로운 강의생인가요?”
“아틀리에 그렇게 다녀 봤지만, 와서 동그라미만 그리는 사람 처음 봐.”
혜수가 어색하게 웃었다.
“제 친군데, 그림 배우고 싶다고 해서요. 죄송해요. 방해되나요?”
“아뇨, 오랜만에 사람을 눈으로 보기만 해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걸 느꼈답니다. 존재만으로 무척 바람직한 분이시네요.”
“동감합니다. 매우 뜻깊고 행복한 주말인 것 같습니다.”
“실례지만 친구분, 애인…… 있으시겠죠?”
혜수가 난처하게 웃으며 그런 것 같다며 말을 흐리자 수강생이 고개를 저으며 눈을 질끈 감고 희한하게 탄식했다.
“아, 올라가지 못할 나무 너무 좋아. 짜릿해.”
“난 저 친구가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은 얼굴로 동그라미 그리는 게 너무 웃깁디다.”
“푸훕! 맞아요.”
연장자의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굳이 같이 있고 싶다는 서준의 말에 걱정했다. 잘 보여야 한다며 위아래로 슈트까지 빼입고 온 터라 더 눈에 띄었는데, 긍정적인 반응이라 다행이었다.
커피를 사 오겠다며 사라졌던 남자의 손에는 다른 수강생들의 몫까지 들려 있어서 분위기는 더욱 좋아졌다.
마지막엔 서준이 그린 동그라미에 다들 원하는 재료로, 좋아하는 색을 하나씩 칠해 주며 수업은 마무리됐다.
“점심 먹을 시간 없이 바로 다음 수업 해야 할 것 같은데, 배고프면 뭐라도 먹고 와요.”
“괜찮아.”
“서준 씨.”
“응?”
“나 봐요.”
잘 자고, 잘 먹는 것 같더니 또 눈 밑이 까매져 있었다. 요 며칠 손도 못 대게 한 부작용일까.
“또 못 잤어요?”
“일하느라고 오랜만에 밤새워서 그래. 으음…….”
길게 기지개를 켜며 주위를 살피더니 허리를 와락 껴안았다. 주말이라 여름이 없고, 아직 다음 수업 수강생들이 올 시간은 안 됐지만 대담한 행동이 불안하기만 했다.
“밖에선 이러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안에서도 못 하게 하셨잖아요.”
“못 잤으면 차라리 집에서 재재나 보면서 쉬지 그랬어요. 안 그래도 수술한 이후로 혼자 있으면 불안해하는 것 같았는데.”
얼마 전, 재재는 중성화를 성공리에 마쳤다. 우려와 달리 수컷 고양이의 중성화는 10분도 안 돼서 끝나는 간단한 수술이었다. 병원에 갈 때도, 마취가 끝나고 나서도 씩씩하더니 유독 혜수를 보고 왕왕 울어 댔다.
“상처도 다 나았는데 뭘. 나랑 현진이랑 있을 땐 조용하다가 너만 보면 엄살이 심해지는 거야. 하, 냄새 맡으니까 더 미칠 것 같네.”
서준은 혜수의 턱끝을 손끝으로 밀어 올리며 쇄골과 목에 입술을 비벼 대기 시작했다.
중성화라도 시켜야 할 기세였지만, 금방 수강생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오는 바람에 음란한 짓을 강제로 멈춰야 했다.
두 번째 수업은 작은 거울에 아크릴 물감으로 자신이 새기고 싶은 모양을 그리는 시간. 젊은 여자들이 많았다. 아까보다 더 구석에 앉은 서준 역시 190cm에 가까운 커다란 덩치로, 손바닥보다 더 작은 것 같은 거울에 무늬를 새겨 넣었다. 생소한 모습이 귀여워서 자꾸 웃음이 나왔다.
심지어 혜수 눈에만 그리 보이는 건 아니었는지 옆에 있던 학생은 대담하게 서준에게 호감을 표시했다.
“혹시 여자 친구 있으세요?”
“예?”
“주말에 이런 데 혼자 오시는 거 보면 여자 친구는 없을 것 같은데. 이것도 인연이잖아요. 번호 좀 주세요. 저도 혼자 왔거든요.”
“있습니다, 여자 친구. 거울도 주려고 하는 거예요.”
“아아…….”
민망할 정도로 단호한 거절이었지만, 여자는 꽤 시원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흥미롭게 그 상황을 지켜보던 혜수는 조금 더 저 남자가 쩔쩔매는 모습을 기대했다가 생각보다 여유롭게 넘기는 모습에 실망했다.
“선생님! 저 도대체 뭘 그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떡하죠? 벌써 15분이나 지났어요.”
“괜찮아요. 첫눈에 이거다 싶은 걸 고르세요. 평소에 좋아하는 무늬나 풍경으로 충분해요.”
“강사님!”
“네, 아. 여기는 아무래도 선을 가느다랗게 그려 주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이 색이 안 나오는 것 같아요.”
“보라색, 파란색, 초록색까지 섞어 볼게요. 꼼꼼히 섞지 말고 이렇게 러프하게 남겨 두면 명도를 표현하지 않아도 노을처럼 보이죠.”
“와, 대박!! 너무 예뻐요.”
어린 친구들이 많아서일까. 기운이 쏙 빠지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애매해서 점심도 먹지 못했는데 수업이 끝나고, 수강생들이 나가자마자 당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