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여긴 어떻게…….”
“곽 소장님이 여기 좋아하셔서 알았어.”
“근데 왜 사장님이라고 불려요?”
“건물주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더니 저러시네. 현진이 병원 옆에 맛있는 식당이 하나 있는데, 저분이 거기 사장님 따님이셔.”
다행히 비극적인 결말을 말할 것 같진 않았다. 다만 서준의 새로운 모습을 목격한 것 같았다. 조금 더 말이 나오길 기대했지만 그는 정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식전주와 깜찍하게 생긴 아뮤즈 부쉬가 나올 때까지 침묵을 유지했다.
혜수는 급하게 술부터 마셨고, 서준은 제 것까지 넘겨주더니 입을 열었다.
“나 언제까지 기다려?”
불안함에 줄곧 떨어져 있던 시선이 그제야 부딪쳤다.
“네?”
“아까부터 변명 기다리고 있잖아.”
“음, 혹시 지난번에 집 앞에 와서 울었던 사람 기억해요? 이솔 씨라고 하는데…….”
“내가 궁금한 건, 그 개새……, 그 새끼 정체가 아니야. 네가 왜 그 새끼를 안아 주고 있었냐는 거지.”
넥타이를 약간 풀더니 손목까지 접었다. 말을 할 때마다 목의 핏줄이 불끈 솟았다. 그쪽이 먼저 안은 거라고 하면 당장 달려가서 패 버릴 기세였다.
뚝 끊긴 욕에서 자제하려는 난폭함을 다시금 엿볼 수 있었다. 자기가 중심인 일에 유독 폭력적으로 변하는 남자의 시선과 가학적인 태도에서 혜수는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정말 미친 건가 싶을 정도로.
“지난번에도 그렇고, 최근에도…… 우주랑 연락이 안 돼서 불안했나 봐요. 많이 울었어요. 달래 주고 싶었어요. 정말 그것뿐이에요. 걱정하는 그런 일, 그런 감정 하나도 없어요.”
“걱정하는 것 같아? 그냥 싫은 거야. 네가 다른 새끼랑 눈이 마주치는 것도, 웃는 것도, 몸이 닿는 것도 싫어.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고.”
최대한 화를 내지 않으려는 건지 중간중간 어금니를 사리무는 게 보였다.
정도가 지나친 소유욕이 기껍지만은 않았지만, 그의 말에 동의하며 다시 한번 사과했다. 이솔이 우주의 전 애인이고, 아무 감정 없다고 한들 굳이 안아서 달래 줄 이유 같은 건 그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성 지향성이 다르다 한들, 세상 어떤 애인이 달가워할까.
“미안해요.”
테이블 위로 올라와 있던 서준의 손등 위로 조심스레 제 손을 뻗었다. 푸르게 드러난 혈관을 따라 그리며 살포시 쥐었다.
그는 먹이를 기다리고 포진하던 동물처럼 빠른 속도로 작고, 하얀 손을 낚아챘다.
서준은 호흡을 고르며 제 감정을 억누르려 했다. 남자의 금욕적인 눈동자가 조명 아래에서 묘한 색으로 빛났다.
“정우주랑 연락할 거야?”
“아마도. 좀 신경 쓰이는 얘길 들었어요.”
“하지 마. 넌 그 새끼 스캔들 하나 가려 주겠다고 충분히 희생했어.”
남자의 손등을 쓰다듬던 작은 손의 움직임이 충격에 우뚝 멈췄다.
“……알고 있었어요?”
“넌 함부로 말할 수 없다고 했지만, 난 알아낼 거라고 했잖아.”
오만한 표정에 머리를 싸매고 했던 혜수의 고민이 재처럼 허무해졌다.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 같은 멍멍한 기분도 잠시, 음식들이 나왔다. 대화는 그 이상 이어지지 않았고 테이블 위로 붙잡고 있던 손도 빼냈다.
필사적으로 숨기려고 했던 고민과 노력이 증발하였고, 데인 상처처럼 민망함만 남았다. 여태껏 있었던 일들이 순차적으로 떠오르며 낯이 화끈거렸다.
그러고 보면 강서준은 정우주와 사귀지 않는다는 걸 짐작하면서도 때때로 정우주의 이름을 일부러 들먹이며 사람을 떠본 음흉한 남자였다.
좀처럼 먹어 보지 못한 생소한 요리들을 찝찝한 기분과 함께 씹어 삼켰다.
감을 얇게 슬라이스 하여 곁들인 샐러드, 다음으로는 커다란 전복을 화이트와인에 부드럽게 쪄 내고 그 위에 트러플이 올라간 플레이트가 나왔다. 달짝지근하기까지 했다.
낯설지만, 완벽한 요리가 연이어 나왔다. 묵묵히 배만 채울 수 있을 정도로.
개성 넘치고 훌륭한 테이블과는 별개로 화가 났다.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입 다물고 있었다는 태도가 생각하면 할수록 열받았다.
틈틈이 채워지는 와인을 미루지 않고 다 마셨다.
혜수의 빠른 속도에 서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잔을 채워 주려는 직원에게 손을 들어 만류했다. 병을 대신 잡아 제 옆에 뒀다.
식사를 다 마치고 나서야 따라 주는데, 혜수가 입구를 꽉 눌러서 계속 따르게 했다.
“뭐 하는 거야.”
잔을 아슬아슬하게 다 채우고 나서야 손을 치웠다.
“하던 얘기 마저 하려면 한 입으론 모자라요.”
들기도 무거워 보이는 잔을 두 손으로 들고 다 들이켜면서 시선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화내는 거야?”
“네. 근데 일단 내 잘못이 크니까 서준 씨 얘기부터 듣고 나중에 화낼게요.”
자못 뻔뻔한 태도에 어이없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서준은 바라던 바였다며 직구를 날렸다.
“아까 그 멸치 같은 새끼, 아이돌이지?”
“멸치 아니고, 이솔 씨요.”
“이솔이든 뭔 솔이든 더는 나서지 마. 할 만큼 했어. 더는 정우주 일에 간섭하지 마. 네가 안 나서더라도 든든한 뒷배 있으니까 그쪽에서 다 알아서 할 거야.”
흔들림 없던 혜수의 얼굴이 대놓고 구겨졌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아요? 정우주가 말했어요? 대체 언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예요?”
“게이 친구에 가짜 스캔들, 뻔하지.”
가담항설, 찌라시, 뜬소문 따위를 가려내기 위해 보기 싫은 정은하를 억지로 찾아가는 수고를 들였지만, 허세에 과정 설명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이럴 때마다 진짜 소름 돋아요.”
살 떨리는 숨을 내쉬며 혜수는 흘러내리는 옆머리를 쓸어 넘겼다.
“애초에 너만 괜찮으면 나는 그 새끼가 남자를 좋아하든 말든 관심 없어. 너는 다 네 문제로 돌리고 정우주 숨겨 줬지만, 결국엔 그런 게 더 사람 미치게 만들어!”
서준이 짜증스럽게 말하는데 똑같이 화가 치밀었다.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며 제가 고민하는 모습을 지켜만 봤다는 게 괘씸했다.
“꼭 정우주 스캔들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말했잖아요. 내 상황도 그랬다고. 다 알고 있으면서 또 설명하게 하지 마요. 심지어 이솔 씨가 정우주 애인이라는 것까지 알았으면…… 아까도 그렇게 화낼 필요 없었잖아요.”
“네가 안고 있는 상대가 게이면 내가 화낼 필요가 없다는 거야?”
곧바로 따라오는 반박에 혜수는 섣부른 대답 대신 입장을 바꿔 생각했다. 흥분해서 그런지 취기가 올라오는 것 같아 심호흡했다.
그가 어떤 여자든 안아 주는 광경을 상상하자 속이 메스꺼워졌다.
“그건 아까부터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허세를 부리며 여유로운 척해도 가뜩이나 거짓말로 성립되고 있는 이 얄팍한 관계에 서준은 내내 불안한 상태였다. 이렇게까지 화낼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결국 어울리지 않는 질문을 하고 말았다.
“그날 밤에 솔직하게 말해도 됐을 문제야. 꼭 남의 입을 통해서 듣게 만들어야 했어? 내가 너한테 도대체 뭐야?”
혜수만 놓으면 언제 끝나도 이상하지 않은 이 관계가 자기가 일방적으로 몰아붙여서 유지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불쾌한 예감이 일었다.
술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입안이 썼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불안해요?”
허를 찔리고 말았다.
늘 꿰뚫을 것처럼 올곧기만 하던 남자의 시선이 떨렸다. 항상 능숙하게 달콤한 말을 쏟아 내며 현혹하던 입술 사이에선 미처 숨기지 못한 당혹감이 흘러나왔다.
“뭐?”
“숨긴 건 미안하지만, 우주한테 최소한의 의리는 지키고 싶어요. 트라우마가 심했고, 유일하게 날 도와준 친구니까. 더는 없어요. 그런 게 아니면…… 혹시 내가 당신한테 확신을 못 줬어요?”
똑같은 마음임에도 불구하고 진실할 수 없는 모순된 죄책감이 부딪치며 서준을 외롭게 만들었다. 동시에 이 여자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불쾌함이 실크 리본처럼 스르륵 풀리기도 했다.
그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자 혜수가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울기라도 하는 걸까 걱정했지만, 이내 고개를 번쩍 들더니 갑자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까 열받네. 자기는 맨날 아무 얘기도 안 해 주면서 왜 나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털려야 해요? 자존심 상해. 구질구질해, 진짜.”
한껏 커진 목소리에 주변인들의 시선이 약간 느껴졌다.
취하기라도 한 건지. 돌연 흥분한 혜수는 병에 남아 있던 술을 직접 따르고 다 들이켰다.
어차피 근본적인 불안의 원인은 제가 누군지 밝히기 전까지 안고 가야 할 문제였다. 혜수까지 동조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서준은 잔을 꼭 붙들고 있는 손 위로 제 손을 가져다 덮었다.
“다 알면서 속 좁게 굴어서 미안해. 근데 말했잖아. 네가 가만히 앉아서 숨만 쉬어도 나한텐 위로라고.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 내 눈엔 네가 제일 멋있고, 예쁘고, 사랑스러워.”
화가 나서 일부러 피했던 시선을 마주했다. 열받고, 자존심 상하다가도 손을 매만지며 사랑을 속삭이는 남자에겐 늘 약해지고 말았다.
“난 이제 바닥끝까지 다 보여 줬어요. 그러니까 서준 씨도 나한테 숨기지 말아요.”
살짝 웃으며 손을 매만지던 그의 표정이 얼핏 슬퍼 보였다.
“……그럴게.”
대화가 잠깐 끊어진 타이밍을 귀신같이 잡은 직원이 다가와 빈 테이블 위를 달콤하게 채워 줬다.
“디저트는 위스키가 들어간 캐러멜아이스크림과 프랄린입니다.”
빈 와인병을 본 직원이 물었다.
“와인, 더 필요하실까요?”
“네.”
“아니요.”
완전히 다른 두 남녀의 대답에 당황한 직원이 어색하게 웃었다.
“일단…… 잠시만요.”
서준이 그를 돌려보내고, 제 디저트까지 혜수의 앞으로 밀어 줬다.
“지금 너 혼자서 와인 한 병 다 마셨어.”
“혼자 마시는 게 억울하면 같이 마셔요. 운전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실수할까 봐.”
투명한 잔을 선회하던 눈이 느릿하게 구르다 다시 혜수를 향했다. 짧은 문장 뒤에 숨어 있는 뜻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원했으니까.
“오늘은 그냥 실수해요. 나도 했으니까.”